역사학의 발전에 의해서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선교적이지 않다는 것을)반박하는 다양한 새로운 문서들과 활동 근거들을 찾아내게 된다. 반박의 중요한 근거 중에 하나는 칼빈이 제네바에서 목회했던 생피에르 교회다. 성베드로 교회로 옛날에는 성당이었던 걸 교회로 바꾼 것이다.
제네바 중 구제네바에 해당하는 곳이 이 지역이다. 구제네바는 아주 작은데 약간 언덕진 곳에 교회가 가장 높은 곳에 있다. 그래서 실제로 사람들이 어디서나 이 교회를 볼 수 있다. 이는 중세교회의 모습 중에 하나이다.
중세교회는 고딕성당이기 때문에 가장 높다. 그래서 어디서나 보여서 교회가 이정표 역할을 한다. 어디서든지 사람들이 교회를 보면 저기가 중심이니까 동서남북을 가늠할 수 있는 그런 역할을 했다. 여기도 굉장히 비슷한 구조로서 교회가 중심이 돼있는 걸 볼 수 있다. 16세기에 있었던 제네바교회를 봐도 그렇다.
아무튼 '칼빈의 목회 연구'가 활발해짐에 따라 새로운 선교에 관한 정보를 얻게 됐다. 칼빈은 원래 프랑스 사람인데 제네바로 오게 됐다. 초청치고는 굉장히 특별한 초청을 받게 됐다. 칼빈이 27세의 아주 젊은 나이에 '기독교 강요'라는 엄청난 책을 쓰게 된다. 그때는 그렇게 두꺼운 책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쉽게 들고 다닐 수 있는 사이즈로 만들어진 책이다.
그 책을 쓴 목적이 뭐냐면 프랑스에 개신교가 생겼는데 그 당시 왕이 16세기 초반 프랑스와1세였다. 프랑스와1세 왕은 대외적으로는 개신교를 지원하고, 국내에서는 개신교도들 핍박하는 희한한 정책을 쓴다. 정치적으로 탁월한 왕이라고 볼 수 있다.
국내에서는 개신교도를 아주 핍박했다. 국내에서는 프랑스의 정권이 힘이 약해지는 것을 우려해서 개신교인들을 핍박하고, 독일 쪽에서 루터를 중심으로 개신교가 생긴 것은 기분이 좋아 지원했다. 왜냐하면 독일 쪽에 개신교가 생겨서 가톨릭교회와 라이벌이 되면 정치적인 힘이, 말하자면 동맹관계가 약해지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가톨릭과 개신교가 지역별로 나눠지고 있으니까 이 왕이 기분이 너무 좋은 것이다.
그런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칼빈이 개신교도들이 너무 많은 핍박을 받으니까 너무 안타까운 것이다. 그런데 프랑스와라는 왕이 무식한 왕이 아니니 '기독교 강요'라는 책을 써서 제일 앞페이지에 헌정사를 쓴다. 그 헌정사가 바로 프랑스와 왕에게 드리는 헌정사이다.
'왕이시여 이 글을 잘 읽으시고 개신교 신앙이 바로 이러한 것을 깨달으시고 개신교 신앙이 참으로 성경에 근거한 신앙인 것을 아시고 개신교인들을 핍박하는 것을 멈추어 주시옵소서'
말하자면 그런 내용이다. 그것을 유럽에 있는 사람들이 빠른 시일 안에 읽을 수 있게 됐다. 그래서 '이 젊은 친구가 보통 친구가 아니구나' 그렇게 돼서 젊은 나이에 제네바의 목사가 됐다.
프랑스 사람이니까 제네바의 이민자로, 민자 목사로 갔다. 프랑스와 제네바는 아주 가깝다. 칼빈은 제네바에 와서 너무 편안하게 목사하면서 사람들에게 감동을 줬다. 그러나 이민자니까 스위스 사람들이 칼빈에게 고약하게 굴기도 해서 호락호락 목회를 할 수는 없었다. 굉장히 힘들었지만 제네바 사람들은 칼빈의 설교를 들으면서 회개하고 변화되어져가고 있었다.
그런데 늘 칼빈의 걱정은 프랑스에 두고 온 민족이었다. 자기 민족들이 개신교인이 됐다는 것 때문에 핍박을 받아서 너무 안타까운 것이다. 그래서 칼빈이 자기 설교집을 만들어서 프랑스로 보내주고 여기서 설교집을 판 돈이 생기면 여기로 피난 온 프랑스 난민들을 도와주는 기금으로 썼다. 정말 그 당시에 아주 파격적인 대단한 목회를 한다. 그러면서 이 당시에 제네바에서 프랑스로 목사들도 많이 보내고 필요하면 독일 쪽으로, 이태리 쪽으로, 스페인 쪽으로 필요한 쪽으로 목사들을 보내준다.
당시 프랑스가 남미 쪽에 식민지를 개척하는데, 거기에도 프랑스 개신교도들이 가게 된다. 칼빈은 그 사람들을 위해서도 목사를 보낸다. 소위 디아스포라 선교이다. 그러니 그게 선교가 아니고 무엇인가? 16세기 같은 그런 세기에 그 엄청나게 멀리 떨어진 곳에 사람들을 보냈다.
물론 가톨릭교회와 비교한다면 아무리 많이 했다고 해도 엄청나게 작은 것이다. 가톨릭은 이미 아주 잘 정립된 그런 교회였고 가톨릭 교회 외에도 수도회라는 것을 갖고 있었다. 베네딕틴 수도회, 프란체스칸 수도회, 어거스틴 수도회 등 수도회를 많이 갖고 있다. 거기다 16세기에 예수회까지 생겼다.
가톨릭교회는 (선교에 있어서) 너무 크고 잘 정립돼있기 때문에 개신교하고는 비교를 할 수가 없다. 개신교는 가톨릭과 싸우는 것만으로도 너무 힘에 부쳤다. 실제적으로 가톨릭과 비교가 안 되지만 칼빈이 했던 것만 갖고 보더라도 이 사람들이 '선교적이지 않다'라고 말하는 것은 굉장히 억울한 것이다.
제네바 중심부에는 종교개혁 공원이 있고 그 공원을 통과하면 제네바대학교가 있다. 칼빈은 목회자를 양성하고 제네바 사람들에게 고등교육을 제공하기 위해서 제네바아카데미를 세웠고, 나중에 그것이 제네바대학교로 바뀌었다.
제네바에 칼빈이 갔을 때는 고등교육 기관이 없었다. 그래서 자체로 생산한 지성인 계층이 없으니 제네바는 외국인 목사들을 모셔올 수밖에 없었다. 제네바에 칼빈이 들어와서 목회자들도 양성해주고 지성인들도 만들어줬다. 제네바가 지금의 제네바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칼빈의 역할이다. 칼빈이 들어와서 정말 많은 부분에서 개혁을 했다. 그는 교회를 통해서 그런 역할을 한다.
칼빈은 정치인은 결코 아니었다. 시민권도 죽기 5년 전에 받아 실제적으로 정치적인 힘도 없었다. 하지만 설교를 듣고 있는 정치인들을 말씀으로 변화시켰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칼빈이 말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정치를 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