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오 칼럼] 2014년 한국 교회·사회는 안녕하십니까?

정진오 목사/LCMS 한인담당 부목사   ©미국시온루터교회(LCMS)

지난해 말 한 대학생이 붙인 "안녕하십니까?" 대자보가 한국 사회에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대자보라는 말조차 낯선 시대에 "철도 민영화, 불법 대선 개입, 밀양 주민 자살" 등 세상 일에 무관심하게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안녕하십니까?" 라고 묻는 한 대학생의 글이 한국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안녕하십니까?" 한마디가 페이스북과 인터넷을 통해 사회 각계 각층으로 번져 이를 두고 큰 논란이 일었다.

약 496년전 독일에서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1517년 10월의 마지막 주일, 루터가 비텐베르크라는 작은 동네의 교회 정문에 95개 항목에 달하는 대자보를 붙였다. 그리고 인쇄술의 발달과 더불어 이 대자보는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마침내 종교개혁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 되었다.

루터의 대자보도 처음부터 대단한 신학적 논의나 사회적 저항을 위해 쓰여진 것은 아니었다. 당시 로마 카톨릭 교회는 소위 죄를 면책해주는 면죄부를 팔고 있었다. 루터가 목회하고 있던 비텐베르크는 작은 도시여서 아무 때나 면죄부를 살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면죄부를 사기 위해 강을 건너서 이틀 걸어가면 나오는 큰 도시까지 나가야만 했다.

교인들이 면죄부를 사겠다고 돈을 모으고 저축해서 비텐베르크에서 뗏목을 타고 조그만 강을 건너서 또 다른 동네에 걸어가야 한다. 교인들의 그런 어려움을 본 목회자 루터는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꼈다.

루터의 질문이다: "우리 안녕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시작된 것이 루터의 95개 대자보이다. 중요한 것은 루터가 불러일으킨 개혁은 이러한 목회적 돌봄과 관심에서 출발했다는 점이다. 루터가 쓴 95개 논제 대자보는 목회자로서 교인들이 죄를 면책 받겠다며 면죄부 사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만은 없었던 마음에서 출발한다.

흔히 한국의 보수적 성향의 교회는 사회적 문제에 무관심한 채 신앙의 개인적 차원에만 관심한다. '나 한 사람, 내 가족 하나님 믿고 구원" 받으면 그걸로 만족한다. 반대로 진보적 성향의 교회는 사회적 문제와 그에 대한 저항에만 관심을 갖는 나머지 개인의 신앙적 훈련과 결단을 약화시킨다. 이럴 때 보수적 성향의 교회는 사회적 문제에 무관심한 이기적인 공동체가 되기 쉽고, 반대로 진보적 성향의 교회는 단지 사회 운동 모임이 되기 쉽다.

교회는 단지 신앙을 개인적 차원이나 사회 개혁 차원에만 국한시켜서는 안 된다. 종교개혁가 루터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목회적 돌봄과 관심이 사회적 차원으로 확대되어야 한다. 참된 신앙은 교회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사회적 차원으로 확대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교회 공동체의 관심이 사회적 개혁을 요구하는 차원으로 확대되는 것을 말한다. 그럴 때 교회는 참된 신앙의 공동체인 동시에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다.

멀리 미국 땅에 살면서도 한국에 있는 가족들과 나라를 걱정하는 분들이 많이 있다. 한인 이민자들은 혹 한국에 있는 '내 자녀가 민영화 문제로 해고되는 것은 아닌지?", "경제 위기로 사업이 실패하는 것은 아닌지?" 고민하며 기도 부탁하는 분들이 있다. 한국 전쟁에 참여한 미군이나, 한국 미군 부대에서 근무했던 미국 교인들은 한반도 평화를 걱정하며 "한국에 또 전쟁은 있는 것은 아닌지?" 를 자주 묻기도 한다. 아마도 그런 교우들의 마음이 필자로 하여금 이 곳에 글을 쓰게 만드는 것 같다.

개 교회 성장주의에 빠져 사회적 문제와 책임을 등한시 하는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 사회적 저항과 운동의 이데올로기에 빠져 신앙 공동체의 참된 교회의 모습을 잃어버려서도 안 된다. 루터의 95개 반박문 대자보처럼 참된 목회적 돌봄과 관심이 시대와 사회를 향한 질문으로 이어져야 한다.

2014년 새해가 밝았다. 한국 교회와 목회자들, 그리고 기독교인들에게 던져진 질문이다: "우리 안녕할 수 있습니까?"

새해에는 한국 교회가 이 시대에 희망을 전하는 교회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정진오목사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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