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고린도전서 11~14장은 전체적으로 예배에 대한 가르침이다.
그리고 12~14장에서는 예배와 관련한 영적은사를 다루고 있다(1절).
고린도교회는 성령의 은사가 풍성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성령의 은사에 대해 무지하였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성령의 은사에 대해 무지하지 않기를 원하며 그것을 가르치고 있다.
성령의 은사를 경험하는 것은 때로 초월적이고 황홀경의 체험을 동반한다.
그런데 이 같은 현상과 체험들은 이방신이나 악한 영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경험할 수 있다.
그래서 외적으로 감각적으로 경험하는 것만으로 그것이 하나님의 영이나 성령의 역사라고 단정할 수 없다.
성령의 역사는 '예수가 주시다'라는 인격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그 근본이다.
예수가 주시며, 우리가 그의 종이 되는 복종과 사랑의 관계를 통해 하나님의 영의 역사를 확인하는 것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가 되시고 우리가 그의 종이 되어 복종의 삶을 사는 것이 성령에 이끌린 삶이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보내시는 성령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의 삶을 누리게 하는 말씀과 일치한다(골 3:6-7).
그러므로 모든 은사는 '예수는 주시다'라는 신앙고백을 전제로 하며 그 아래에 종속된다.
이처럼 성령의 본질적인 사역인 '주님과의 관계'와 부수적인 사역인 '은사'는 구별된다.
이제 바울은 이것을 당시 주류 사상을 통하여 은사의 특성을 예증한다.
먼저 스토아 철학자들은 우주 전체를 한 몸과 비교하였다.
곧 신적인 것들과 인간적인 것들을 포함하여 모든 것이 하나, 한 몸인 것이다.
또한 영지주의 사상 역시 우주를 한 몸으로 보았다.
그리고 몸의 지체들인 모든 인간은 한 몸 안에서 한 정신에 따라 행동한다고 하였다.
몸은 하나의 단위이며 많은 부분(지체)들로 나뉘어져 있다(12절).
몸은 그것을 구성하는 지체들이 많으나 결국 하나인 것처럼 그리스도도 그러하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인종, 신분의 차별과 상관없이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을 이루었고, 모두 한 성령을 마셨다.
'한 성령으로 세례 받았다' '한 성령으로 마시게 되었다'는 모두 단순과거시제로서 반복되는 행동이 아니라 단 한 번의 경우를 가리킨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것은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장사되고 부활하였음을 뜻한다(롬 6:4).
한 성령을 마신 것은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여(6:19), 우리 삶에 성령의 열매가 넘친다는 뜻이다(갈 5:22-23; 요 7:37-39).
특히 성령을 마신다는 표현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진술에 대한 보충어이다.
즉 성령이 우리를 에워쌀 뿐 아니라 우리 안에 거한다는 것이다(쉬운성경; 한 성령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가령 발이 '나는 손이 아니므로 몸의 일부가 아니다'라고 말한다고 해서 발이 몸의 일부분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15절).
마찬가지로 귀가 '나는 눈이 아니다'라고 해서 귀가 몸의 붙어있지 않은 것이 아니다(16절).
온 몸이 눈으로만 되어 있다면 듣는 곳은 어디이며, 온 몸이 귀로 되어 있다면 어떻게 냄새를 맡겠는가?(17절).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원하시는 대로 몸 안에 각각 다른 기능을 하는 여러 지체를 두셨다(18절).
그런데 모든 것이 하나의 지체라면 몸은 어디에 있겠는가?(19절).
상식적으로 보아도 몸은 하나의 지체만으로 구성될 수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지체가 많다고 해서 몸이 여러 개는 아니며, 몸은 하나뿐이다(20절).
도리어 몸의 지체는 몸의 다른 지체를 필요로 함으로써 지체로서 온전한 몸을 이룬다.
그래서 눈이 손에게 '너는 필요 없어'라고 할 수 없으며, 머리가 발에게 '너는 내게 쓸데없어'라고 말할 수 없다(21절).
교회는 다양한 은사를 통해 다양한 기능을 맡은 성도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몸과 지체의 비유로 설명할 수 있다.
몸의 지체는 서로를 필요로 하듯 교회구성원들의 은사 역시 서로를 필요로 한다.
하나의 은사를 절대화하지 못하며 그 은사는 다른 은사를 통해 통합되고 완성된다.
그러므로 성도는 서로의 은사가 소중함을 인정해야 하고, 오직 주를 섬기는 데 쓰여져야 한다.
이것이 몸을 구성하는 지체로서 합당한 일이다
병 고침의 은사가 있는 사람이 방언의 은사가 없다는 이유로 교회의 일원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지혜와 지식의 말씀을 맡은 사람이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을 멸시할 수 없다.
만일 서로 다른 은사를 이유로 차별하고 멸시하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해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손이라는 지체로 얼굴이라는 지체를 때리는 격과 같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하나의 은사는 절대화할 수 없으며 전체 그리스도인의 활동을 제약할 수도 없다.
아무리 탁월한 은사라도 그 자체로 서지 못한다.
은사의 독자성은 은사의 다양성에 의해 조화되고 균형을 이루고 완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 안에는 다양한 은사가 실재하며,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된 것이다.
♦묵상 기도
아버지여...
어찌도 이리 어리석은 자이옵니까?
은사를 받고 은사를 사용하나 실상 은사에 무지한 자였습니다.
오만하고 방자한 자를 벌하심이 마땅하나이다.
하나의 은사를 절대화할 수 없는데 그러하였습니다.
특히 말씀의 은사를 절대화하며 교만한 자였나이다.
아버지...
다시 광야로 내모시고야 깨닫게 되니 무지한 말이나 노새와 같나이다.
그것들은 재걸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듣지도 행하지도 못하나이다.
이제야 말씀 앞에서 깨닫습니다.
어떤 은사라도 다양성의 은사를 통해 보완되고 통합되어야 마땅하옵니다.
먼저 길을 내시고 이끄시니 그 은혜 앞에 엎드릴 뿐이나이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저는 죄인이로소이다!
아버지여...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물질적인 지원을 뛰어넘어 다양한 은사가 절실합니다.
내게 주시지 않은 은사를 소중히 여기고 그들과 함께 주의 몸을 세우게 하소서.
여러 교회들, 여러 성도들과 더불어 손잡고 그들의 다양한 은사에 힘입게 하소서.
그들과 더불어 영생의 진리, 생명의 말씀을 전하게 하소서.
오직 주를 섬기며 하나님 안에서 행하기를 원하옵니다.
주여 인도하여 주소서. 나는 갈길 모르니 인도하여 주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