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파(독일), 개혁파(스위스: 칼빈, 쯔빙글리), 재새례파(신비주의), 카톨릭 종교개혁 등 다국적이며 다양한 형태의 종교개혁이 유럽 전역을 휩쓸며 이러한 급격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 기독교 미술도 커다란 변화를 맞게 되었다.
르네상스 말기 종교개혁으로 일어난 프로테스탄트는 근본적으로 도상숭배를 부정함으로써 기독교 미술과는 다소 소원한 사이가 되었다.
그러나 미술로 종교개혁을 지지하는 인물들도 있었다. 북유럽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화가인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urer, 1471 ~ 1528)는 독일의 화가이자 판화가·조각가로 그림을 통해 종교개혁을 지지했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의 연작 '요한 묵시록'은 계시록의 내용(6장)을 15개의 목판화에 담은 것으로 교황이 음부에 내려가는 장면을 묘사했다.
가톨릭교회는 프로테스탄트 측의 공격과 르네상스 미술의 이교화에 대항해서, 반종교개혁 운동을 일으켜 기독교 미술을 다시 성화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바로크 미술은 반종교 개혁에 앞장섰던 미술로 전통 질서 확장을 위해 예배당의 실내장식을 다시 하는 등 운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 운동은 일정 부분은 성공을 거둔다.
루벤트와 렘브란트가 활동한 바로크 시대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정치적 대립이 극에 달했을 때이다. 겉으로 보기에 종교적 대립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신흥 부르주아 계급과 구체제의 귀족계급 사이에 발생한 정치적 갈등이었다.
루벤스는 칼뱅주의자 집안에 태어났지만 후일 가톨릭으로 개종한 '가톨릭적 바로크'의 대표적 작가였다. 이런 까닭에 루벤스의 그림은 교화와 궁정을 위해 제작되었다. 반면 렘브란트는 '프로테스탄트적 바로크' 작가였다.
렘브란트의 '도살된 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연상하게 한다. 또한 렘브란트는 '예수의 초상화'도 그렸다. 그리스도의 두상을 누구도 감히 인간적으로 그리지 못했지만 그는 인간 예수를 표현했다. 신앙 안에서 감정이 표현되기 시작하는 그림으로, 그의 그림들은 근대를 여는데 지대하게 영향을 미쳤다.
종교개혁 이후 북유럽은 허무주의 그림이 유행했다. 네덜란드가 무대의 중심으로 옮겨 왔다. 당시 수도원 문화가 나오며 일반인도 성금요일에는 경건한 삶을 위해 생선을 먹었다. 경건생활을 위해 생선을 1년에 200일 먹는 수도원도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생선을 소금으로 염장해 파는 무역이 네덜란드에 발달하며 17세기에 돈을 많이 벌었다. 그 돈을 문화에 투자했고 상인들이 왔다 갔다 하며 네덜란드 풍경화가 발달했고, 전 유럽에 퍼지게 됐다.
고급문화로 허무주의가 나타났다. 삶과 죽음을 상징하는 대상을 동시에 그림 안에 그리는 바니타스 정물화가 주로 그려졌다. 그것을 통해 생에 대한 애착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의'메멘토모리'와 함께 생에 대한 애착을 나타냈다. 1000년 이상 있었던 거대한 질서가 무너지며 맞은 혼란의 시대였다.
근대로 넘어오며 소재 중 하나는 '폭포' 처럼 인간의 손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일반은총에 대한 해석을 찾아냈던 것이다. 감각적인 것과 하나님의 거룩함을 강조했던 상상력의 신학자 조나단 에드워즈의 영향을 받았다.
이에 관념적이었던 것이 사실적이면서 자연과 관계되는 것으로, 특별은총에서 자연은총으로 흡수되며 창조의 아름다움을 담아내려 하는 시도가 진행됐다.
허드슨리버스쿨 시대는 청교도 정신을 이어 받은 화가들이 활약했다. 미국에 가서 창조의 아름다움과 위대한 자연풍광을 그리며 그 안에 하나님 영광을 나타냈다. 코토팍시 산과, 에콰도르의 안데스 산맥 등도 소재로 많이 사용됐다.
이어 근·현대 기독교 미술 작품으로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가 실내장식한 프랑스 니스 방스(Vence)에 있는 로제르 경당을 꼽을 수 있다. 작은 성당이자 기도처로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빛이나 색으로 영성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 보여준다. 또한 니스에 있는 국립샤갈성서미술관에 전시된 샤갈의 성서화와 스테인드 글라스 등도 대표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