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민 칼럼] 명함에서 인생의 무게를 재다

김종민 목사ㅣ애틀랜타성결교회 담임

지갑이 두툼할 때처럼 기분 좋은 것이 또 있을까? 구겨지지 않은 지폐 몇 장을 지갑에 넣고 길을 나서면, 세상의 모든 문이 자동문처럼 나를 향해 열리는 것 같고 집 나갔던 자신감이 이자를 쳐서 돌아오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그런데 돈 말고도 지갑이 부풀어 오르는 경우가 있다. 왜 이러지 하고 열어보면 여지 없이 그 범인은 켜켜이 쌓인 명함들이다. 한 장 한 장 받은 명함들을 적시에 잘 정리해 놓지 않으면 이내 지갑이 배탈이 난다.

명함 속에는 온 세상이 통째로 다 담긴 것 같다. 특별히 튀는 명함이 아닌 한, 규격에 맞는 작은 직사각형 모양인데 그 안에서도 색깔도 다양하고 디자인도 다르다. 그 속에 있는 이름과 직업들을 보면,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은 얼마나 작은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래서 명함철을 이리저리 뒤적이며 어떤 건 빼고 또 어떤 건 새롭게 꽂아 놓기도 한다. 그러면 이내 처리해야 할 명함들이 한쪽에 수북이 쌓인다.

명함을 정리하면서 '아, 명함에도 생명이 있구나!'하는 생각을 문득 하게 된다. 아직도 이렇게 빳빳하고 새것 같은데도 나에게 더 이상 의미가 없는 것들도 있고, 오래 전에 받은 명함이지만 아직도 소중하게 자리를 차지 하고 있는 명함도 있다.

이 준엄한 심판대가 비단 내 책상에서만 일어나는 일이겠는가? 아마 사회 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연말의 명함학살 전쟁에서 내 이름이 얼마나 살아 남아 있을까 하는 것이다. 부디 살아남기를 바래 보지만 그 생사여탈권은 이미 내 것이 아닌데 별 수가 있을까 싶다.

누군가에게서 쓸모 없다고 여겨지는 것,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 사람이 도대체 누구지"하고 잊혀지는 것을 어떻게 막을 수가 있으랴? 모든 사람에게 필요하기를 바라고 어떤 사람에게도 잊혀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처럼 이기적인 욕심이 또 있을까 싶다.

좋은 기억은 매듭이 없다. 단어 시험처럼 억지로 머릿속에 쑤셔 넣는 것이 아니라, 혼자 있을 때도, 서러울 때도,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도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이다. 그저 흘러 가는 물처럼 생각나고 그렇게 또 흘러가는 것이며, 꼭 생각해 내려고 애쓸 필요도 없는 것이다.

문제는 잊혀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것이다. 잊혀지지 않으려고 또는 잊지 않기 위해서 억지로 기억의 매듭을 짓는 순간, 그 매듭은 감옥이 된다. 상처를 받았던 기억의 매듭이 인생의 이곳 저곳에 엮이면, 매번 스스로 만든 매듭에 걸려 넘어질 수 밖에 없다.

수 많은 사람들이 잊혀지지 않으려고 기억의 매듭을 매어 놓는다. 자서전을 쓰기도 하고, 동상을 세우기도 하고, 자신의 이름을 딴 단체를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잊혀질 것은 잊혀지고 기억될 것은 기억되는 것이지 발버둥쳐 얻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에게 원한의 매듭이 되지 않고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잊혀지는 사람이 된다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좋은 기억으로 떠 오르는 사람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명함이 버려진다고 우리 인생까지 버려지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의 기억에서 사라진다고 실패한 인생이 되는 것도 아니다. 명함은 떨어지면 다시 찍어내면 되는 것처럼, 기억에서 사라지면 또 다른 만남을 준비하면 되는 것이다.

다만, 이번 명함에는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한 이력이 아니라, 그 이름과 직책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기 위한 노력은 한 움큼 더 들어 있어야 한다. 그래야 가벼운 인생이 되지 않을 테니까.

#김종민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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