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자신을 기억하고 그가 전해준 가르침을 지키는 것으로 인해 그들을 칭찬한다(2절).
그리고 이어서 공예배에 있어서 남녀관계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이는 남자와 여자가 기도와 예언을 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신약시대 예언이란 주로 성령의 영감에 호소하며 구약을 해석하면서 성도들을 권면하는 것을 포괄적으로 일컫는 말인데, 요즘 말로 하면 설교이다(김세윤, 고린도전서 강해).
남자가 기도하고 설교하는 것은 그리 문제되지 않았다.
문제는 여자가 기도하고 설교하는 일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문제는 기도와 설교하는 일 자체에 있지 않고 복장에 있다.
가르침의 핵심은 여자가 교회에서 기도하고 설교할 때에는 너울을 쓰거나 긴 머리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의 가르침은 철저히 성경적 원리를 기초로 하고 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깨달아야하는 것이 하나가 있다(3절).
그것은 모든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이며, 여자의 머리는 남자이고,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3절).
머리를 뜻하는 그리스어의 본래 의미는 '기원' 또는 '원천'이다.
그래서 성경의 다른 사본은 '기원'을 가리키는 헬라어 '아르케'를 사용하고 있다.
'기원'은 '어디로부터 생겨났다'는 뜻으로 후에 나오는 8,9절에 강력하게 시사된다(여자가 남자로부터 생겨났다...).
먼저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다.
아버지는 신성의 원천이시며 아들은 아버지와의 관계성 속에서 존재한다.
여기사 바울은 종속절을 가르치는데, 고린도전서 3:23과 15:28절에도 반영되어 있다.
곧 아들은 창세전부터 아버지께 복종하고 의존함으로써 존재하는 것이다.
이 때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여 자기의 본질을 계시하는 영광을 주신다(요 17:24).
그리스도는 창조의 대행자가 되셔서 남자의 기원이 된다(창 1:27).
그리고 남자는 여자의 존재의 기원이다. 이는 창세기 2장 18-23절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본래의 관계와 종속적인 관계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곧 하나님, 그리스도, 남자, 여자 이런 명제로 결론지어진다.
남자가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하거나 설교를 하면 그것은 자기의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는 것이다(4절, 쉬운성경).
유대교에서 남자는 반드시 머리에 무엇을 쓰고 예배를 드려야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수건을 벗은 얼굴로 주의 영광을 본다(고후 3:18).
만일 수건으로 가린다면 그리스도의 영광을 반영하지 못하는 것으로 그의 기원되시는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그러나 여자가 머리에 무엇을 쓰지 않고 기도하고 설교하면 그것은 자기의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으로 삭발을 한 것과 다름없다(5절).
여자가 머리에 무엇을 쓰지 않으려면 머리를 밀어버리는 것이 낫다.
머리를 밀어내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운 것이라면 무엇으로 가릴 것이다(6절).
이 말은 여자가 머리를 미는 것이 부자연스럽듯이 여자가 머리에 무엇을 쓰지 않으면 부자연스럽다는 표현이다.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므로 머리를 가려서는 안 된다(7절).
그러나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다.
남자가 여자에게서 기원한 것이 아니라 여자가 남자에게서 기원한다(8절).
또한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 받지 않았으며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돕는 자로 지음 받았다(9절)
여자가 남자의 형상이 아닌 것은 둘 다 각기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자가 남자의 영광인 것은 '돕는 자'로 지음 받은 그 정체성으로 인함이다.
교회가 그리스도 앞에서 영광스러운 존재이듯 여자는 남자에게 영광스러운 존재이다(엡 5:27-28).
이는 주 안에서 복종과 사랑의 존재법을 준행할 때 성취된다.
그런데 바울은 구약의 창조질서에서 신약의 새로운 질서로 옮겨간다.
그러나 주 안에서는 여자가 남자 없이 존재하지 않고, 남자도 여자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11절).
창조 시에는 여자가 남자로부터 생겨났다면 이후로 남자가 출생하는 것은 여자(어머니)를 통해서 태어나기 때문이다(12절).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결국 하나님께로부터 생겨난 것이다.
결국 모든 남자와 모든 여자가 하나님께 속한다.
또한 바울은 인간의 본성에 비추어 너울 쓰는 문제를 다룬다(13-15절).
스스로 판단해보아도 여자가 머리에 무엇을 쓰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옳지 않다(13절).
또한 자연 자체가 교훈하듯이 남나가 머리를 길게 하면 명예롭지 못한 것이다(14절).
여자가 긴 머리를 하는 것은 그 여자에게 영광이 된다.
이는 여자의 긴 머리가 그 머리를 가리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쐐기를 박는 말을 한다.
이렇게까지 교훈했는데도 다른 의견을 주장한다면 그가 할 말은 일반적인 하나님의 교회에서도 그런 일(여자가 너울을 쓰는 일)은 결코 없다는 것이다(16절).
곧 바울은 여자들이 머리에 아무 것도 쓰지 않고 기도하고 설교하는 것을 허락한 적도 없고 또 교회가 그런 풍습을 끌어들인 적도 없다고 말한다.
이로써 이 문제를 종결한다.
또 다른 오해는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예배시 머리수건을 쓰는 것이다.
주로 천주교와 안상홍증인회(하나님의 교회)가 그러고 있는데 이들은 11:1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라는 말씀을 준행한다고 한다.
참으로 무지한 일은 11:1절 말씀은 우상 제물에 관한 결론인데, 그것을 예배에 대한 가르침으로 끌어온 것이다.
성경은 진리와 상황이 결합되며 상황은 언제나 과거적이고 해석된 상황이라야 한다.
오늘 바울의 가르침은 당시의 특정한 상황에서 주어졌다.
먼저 그 전제는 갈 3:28절에 나오는 새 창조의 질서를 반영한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는 인종적 차별(유대인과 이방인), 성적차별(남자와 여자), 신분적 차별(주인과 종)이 폐지되었다는 사실이다.
한편 유대교의 회당에서는 남녀가 엄격히 구별되었고 오직 남자만 가르칠 수 있었다.
여자가 성경을 읽거나 해석하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 같은 성적 차별은 그리스도 안에서 폐지되었고 교회에서는 여자도 기도하고 설교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여자에게 주어진 자유가 무절제하게 사용됨으로써 교회안팎으로 물의를 빚게 되었다.
그것은 여자가 기도하고 설교할 때 너울을 쓰지 않음으로 인해서였다.
당시 여자가 쓰는 너울은 머리뿐만 아니라 상체를 가리는 머리 덮개를 말한다.
여자가 너울을 쓰고 기도하고 설교해야 하는 이유는 교회안팎으로 거침돌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당시 문화적 배경을 보면 유대인 여자나 그리스 여인들은 대개 너울을 쓰고 다녔다.
그런 문화권에서 여자들이 너울을 벗고 기도하고 설교하는 일은 심각한 문화충격이었다.
그것은 예배 참석자들에게 성적인 자극을 주거나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요즘과 비교하면 여자가 초미니스커트를 입고 허벅지를 다 드러내며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김세윤).
이는 심히 무절제한 일이요 교양 없는 행태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런 일이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거침돌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교회에 대한 오해와 음해의 빌미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직전 구절에서 그리스도인은 교회나 유대인이나 헬라인에게 거침돌이 되지 말 것을 촉구하였다(10:32)>
그런데 교회 밖의 사람들은 교회의 모임을 가리켜 남녀가 한 장소에서 종교의식을 하면서 혼음을 한다고 음해하였다.
이것은 당시 비두니아와 본도의 총독 플리니가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보낸 편지에서 언급되어 있다.
그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 여자들이 너울을 벗어던지고 남자들과 함께 한 방에서 예배하며, 기도와 설교를 하면 외부사람들에게 성적인 오해를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여자들이 공예배시에 기도와 설교를 하되 당시 사회의 관행대로 복장을 단정히 할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오늘 말씀의 진리성은 예배의 질서와 형태를 교훈하는 데 있다.
믿는 자의 예배는 그 본질이 하나님과의 사귐에 있다(요 4:24).
곧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는 아버지와 아들을 아는 영생의 사귐이 본질인 것이다(요 17:3; 요일 1:3).
그리고 영생의 사귐으로서 예배는 영생의 공동체 안에서 서로 사귐을 갖는 모임을 통해 완성된다.
그 모임에서는 남자든 여자는 동일하게 기도하고 말씀을 나눌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형태가 교회 안팎으로 거침돌이 되지 말 것이며 덕을 세워야 하는 것이다.
예배의 형태가 오해의 빌미를 주거나 음해의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은 예배에 대한 부차적인 것으로 특정한 상황에 적용되는 가르침이다.
♦묵상 기도
아버지...
말씀 앞에 저의 무지와 한계만이 드러납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옵니다.
예배의 본질은 알면서도 예배의 형태를 절제하지 못했나이다.
우직한 것은 우둔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와서 깨달으나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비천한 자입니다.
아버지여...
내 눈이 주를 바라며 은혜를 구하옵니다.
잠잠히 기다리오니 구원하소서. 한 걸음 한 걸음 인도하소서.
자기주장 의지를 십자가에 못박고 초탈의 자리에 거하나이다.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이오니 불쌍히 여겨주소서.
어디 가야 좋을 지,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하겠나이다.
아버지...
티끌과 재 가운데 엎드리나이다.
나의 지혜를 폐하소서. 나의 유익을 폐하소서.
예배의 형태로 인해 거침돌을 만든 자를 폐하소서.
엎드려 기다리오니 당신의 지혜로 이끄소서.
심판을 달게 받사오니 의로 다시 세우소서.
심히 미련한 자를 불쌍히 여기소서.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