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를 위한 신앙강좌] 기독교 미술사(4) - 비잔틴 미술에서의 성상 논쟁(Iconocla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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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기자
백석대학교 기독교학부 김병호 교수(현대기독교미술학회 부회장)

313년 일명 밀라노 칙령이라고 하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국교화 선언과 327년 로마 제국이 동과 서로 나뉘고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플에서는 고유한 비잔틴 예술이 발달했다.

이 비잔틴의 예술의 주요 표현 형식 중에 하나가 성상화(Icon)였다. 그리고 이 성상화는 결국 초기 그리스도교의 극렬한 교리적 논쟁의 중심에 서게 됐다.

이 성상 논쟁의 배경에는 두 가지의 이슈가 있었다. 첫째는 교리적인 문제- 둘째 계명의 문제,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과 관련된 문제- 였고, 둘째는 정치적 상황- 교황권 확장에 대한 왕권 회복운동- 과 이해관계였다. 그 후, 비잔틴 황제를 수장으로 하는 그리스 정교회와 로마 교황을 중심으로 하는 로마 가톨릭으로 갈라져(1054)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1)제1차 성상논쟁

726년 비잔틴 황제 레오 3세는 공식적으로 성상에 반대하는 입장에 섰고, 730년 성상을 사용하는 일을 공식적으로 금지했다. 이 조치로 성상숭배자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고, 이 박해는 레오3세의 계승자 콘스탄티누스 5세(741~775)때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이후 레오 4세의 사후 섭정을 하던 여황제 이레네가 787년 니케아에서 소집한 제7차 에큐메니컬 공의회는 성상파괴주의를 단죄하고 성상 사용을 재확립했다.

(2) 제2차 성상논쟁

814년 레오 5세가 즉위한 뒤 다시 권력을 잡은 성상파괴론자들은 공의회(815)에서 성상 사용을 다시 금지시켰다. 성상파괴론자들이 권력을 잡은 이 두 번째 기간은 842년 황제 테오필로스가 죽음으로써 끝났다. 843년 그의 미망인인 황후 테오도라는 최종적으로 성상숭배를 회복시켰으며, 동방정교회는 지금도 이 사건을 정교회의 축일로 기념한다.

성상 논쟁의 핵심은 아이콘(성상화)이다. 서방신학에서는 아이콘을 다루는데 조심하고, 우상으로 보는 성향이 많다. 그러나 서방에도 아이콘이 있었으나 표면화되지 않았을 뿐이다. 없애니 더 은밀하고 더 신격화됐다. 그러나 신학 안에서는 금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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