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를 위한 신학강좌] 기독교 미술사(3) - 비잔틴 미술

목회·신학
편집부 기자
백석대학교 기독교학부 김병호 교수(현대기독교미술학회 부회장)

황제 갈렐리우스(305~311)의 사후 로마는 그의 심복 막시미누스 다이어와 콘스탄티누스, 막센티우스, 리키니우스로 4분돼 통치하는 체제가 됐다. 갈렐리우스의 심복 막시미누스는 311년 4월30일 기독교인에 대한 '관용칙령(Edict of Toleration)'을 내리고, 콘스탄티누스는 313년 기독교 국교화를 선언했다. (편집자주: 콘스탄티누스는 서쪽의 제일 작은 지역을 통치하고 있었지만 나머지 세 황제와의 전투에서 이겨 324년 통일된 로마를 다시 이루게 된다. 이 과정 중에 콘스탄티누스는 예수님을 꿈에서 보고 십자가와 하나님의 표식을 내걸고 싸우면 이길 것이라는 계시를 받아 전투에서 승리한다.)

카타콤의 기독교인들은 시각 언어를 통해 복음을 전하고 정체성을 만들지만 지상에 올라오면서는 경쟁력 있는 문화를 만들어야 하니 로마의 기독교 문화를 받아들였다.

그러면서 330년 당시 수도가 로마에서 부가 축척되던 신흥도시 콘스탄티노플(비잔티움, 현재 이스탄불)로 옮겨가며 기독교문화의 중심지도 옮겨가 그곳을 중심으로 비잔틴(Byzantine) 문화가 만들어졌다.

기독교 국교화 이후 콘스탄티누스는 그로 인한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고 질서를 잡아 국가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그래서 문화적으로 융성했던 시기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재위 527~565)때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을 정비하여 하기아 소피아 성당(거룩한 지혜)을 건축하기도 했다. (편집자주: 동시대 역사가 프로코피오스는 "그 높이가 하늘의 경계에 닿았고, 다른 건축물들 가운데 우뚝 솟아, 마치 위에서 나머지 도시를 내려다보는 것처럼, 도시에 속하지만 그것을 지배하면서 아름답게 장식한다. 건물의 안은 햇빛과 햇빛을 반사한 대리석의 빛이 가득 차서, 그 빛이 바깥으로 흘러넘친다"고 묘사했다.)

하기아 소피아 성당은 비잔틴 문화의 중심지로, 비잔틴 건축을 대표하는 건물로 자리매김했으나 지금은 기독교와 이슬람의 성지가 됐다.

화려한 기독교 문화가 집약된 곳이었지만 내부 벽면이 후에 이슬람 문장으로 덧칠해져, 현재는 국가적 차원에서 관광지라는 차원에서 이슬람 문장을 벗겨내 부분적으로 그 안에 그려진 기독교적인 그림들을 볼 수 있다.

또한 라벤나 아폴리나레 성당은 가장 오래된 모자이크 작품으로 유명하다. 비잔틴 예술에서 모자이크는 빼놓을 수 없는 특징으로, 당시 보석의 일종이었던 유리조각으로 만들어져 신비한 이미지를 풍겼다.

비잔틴 건축물은 마이크가 없는 대신 공명효과를 낼 수 있어야 해서 아치 형태로 만들어졌다. 그래야 소리가 뒤까지 다 들릴 수 있었다.

또한 '돔'은 교인들에게 심리적 영향을 주기도 했다. 아래서 소리가 나면 그 소리가 위에서 다시 울려서 내려오니 하늘에서 응답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효과였다.

'돔'에는 화려하게 '모자이크' 로 장식했는데, 신이 인간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통로라는 의미를 기념하는 이유였다. 또한 그런 느낌을 갖도록 장식했다.

한편, 기독교가 국교화된 이후 예수 그리스도의 이미지는 '전능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미지로 바뀌었다. 카타콤 시대는 어린양을 안고 있는 목자의 이미지였다.

이런 변화는 기독교 공동체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바라봤느냐 하는 것과 그 공동체 안에 그 이미지가 필요했던 시대라는 것을 반영한다.

즉, 기독교 국교화라는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의 전능성을 드러내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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