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이에 대하 그는 자발적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사도적 권리를 포기하였음을 진술한다(9장).
그리고 이어서 다시 우상의 제물에 대한 가르침을 계속한다(10장).
그는 사도로서 누릴 수 있는 분명한 권리를 복음을 위하여 제한하였음을 고백한다.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1절).
바울의 반어적 표현은 고린도교회에서 영적자유를 만끽하는 이들을 겨냥한 것이다.
그들 사도들이 교회 공동체의 부양으로 먹고 마실 권리가 없겠는가?(4절).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된 아내로 하여금 공동체의 부양을 받지 않을 권리가 없겠는가?(5절).
어찌 그와 바나바만 스스로를 부양하기 위해 일해야 한다는 말인가?(6절)
사도의 생계를 마련해주는 관습은 사람의 관습에서도 타당한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나라에게 군인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 포도를 심고 열매를 먹는 것, 양떼를 기르고 그 젖을 먹는 이치와 같다(7절).
그런데 이 일은 사람의 관습을 떠나 성경적으로도 당연한 권리이다(8절).
사도들의 생계를 책임지라는 말이 아니겠는가?
밭을 가는 사람은 당연히 어떤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을 타작하는 사람도 대가를 기대하며 일하는 것이 당연하다(10절).
그래서 사도들이 영적인 것을 뿌려 교회를 세웠다면 교회가 사도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은 결코 지나친 일이 아니다(11절).
더구나 다른 사도들이 이런 것을 요구했다면 그 교회를 세운 개척자인 바울이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12절).
그러나 바울은 그 권리를 행사하지 않았다.
이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12절).
기록된 성경은 말씀과 상황이 결합되어 있다.
그 해석은 말씀을 영원한 진리로, 상황을 해석된 상황으로 결합한다.
고린도교회의 상황은 과거적 상황이며 모든 시대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 말씀하는 진리는 영원한 것이다.
현대교회에서 교회가 목사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은 자연스럽다.
목사는 교회를 돌보고 목양에 전념해야 하기 때문에 불가피한 일이다.
문제는 당사자인 목사가 복음과 교회, 성도들을 위해서 얼마나 절제하고 포기하느냐에 있다.
일부 교회는 목사가 생계 이상의 요구를 하면서 시험에 들곤 한다.
가톨릭은 교회규모에 관계없이 일정액의 생계비를 지원하고, 개신교에서도 구세군교회가 그러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회는 교회의 규모에 따라 목사의 사례가 달라진다.
그래서인지 상당수 목사들은 생계유지를 위해 거리로 나아간다.
대리운전, 막노동, 보험외판원, 편의점 알바, 학원 강사 등으로 전전한다.
내가 아는 목사들만 해도 이 정도이다.
차라리 이들은 당당하고 부끄러울 것이 없다.
바울도 바나바도 친히 일하면서 복음을 전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그들을 보는 시선은 따갑다. 능력 없는 목사, 은혜 없는 목사라는 취급을 받기 때문이다.
♦묵상 기도
아버지...
말씀 앞에 서니 수치와 멸시가 가득합니다.
사도적 사명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려는 저 자신이 부끄러울 뿐입니다.
염불보다 잿밥에 마음이 있는 중들과 다를 바가 무엇입니까?
마음을 심판하시는 당신 앞에 티끌과 재를 무릅쓰고 엎드리나이다.
아버지여...
이 종을 불쌍히 여겨주소서.
세상이 주는 짐을 벗고 자유하기 원합니다.
이생의 근심, 재물에 대한 걱정, 먹는 것과 마시는 것에 대한 염려를 내려놓습니다.
당신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자에게 모든 것을 주시는 믿음을 더하소서.
이제껏 그렇게 역사하신 당신을 찬양하나이다.
아버지...
모든 상황에서 사도적 사명을 다하게 하소서.
하오나 모든 상황에서 사도적 권리를 포기하는 용기를 주소서.
나는 할 수 없사오니 내 안에서 소원을 두고 행하소서.
사나 죽으나 당신의 것, 당신의 뜻을 위해 살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