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그런데 바울은 자신을 포함한 사도들이 바로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는 비참한 자리에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사도의 비천함이나 천박함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라, 사도의 긍지를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도는 원사도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린 채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된 운명을 그대로 떠맡는다는 것을 뜻한다.
사도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렇게 어리석은 자가 되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도리어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로운 자가 되었다.
사도들은 그리스도를 표로 삼아 약하고 멸시를 받으나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이유로 강하고 존귀한 자가 된 것이다(10절).
사도는 지금 그리스도의 비천한 삶을 그대로 살고 있다.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매맞고 집이 없이 유리방황하고 있다(11절).
사도는 자신의 손으로 친히 일을 하면서 복음을 전하였다(12절).
그들은 저주를 받지만 축복해주고 핍박을 당하나 참고 인내하며 모욕을 당하나 다정한 말로 권면하였다(13절).
서신을 쓰는 바로 그 순간까지 세상의 쓰레기와 만물의 찌꺼기가 되었다(13절).
아들을 십자가에 두신 하나님은 이제 아들이 보낸 사도들을 그 자리에 두신다.
사도의 삶의 자리는 세상이 볼 때 수치스럽고 가증스럽기까지 한 십자가의 비참한 자리인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죽이기로 작정한 자처럼 세상의 수치거리요 사람들의 구경거리이다.
문제는 그로부터 복음을 듣고 생명을 얻은 자들한테까지도 수치와 비방거리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사도의 자리는 사도뿐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처할 자리이다.
바울은 사도로서 그리스도의 자리에 서 있는 것을 당연시 여기며 성도들로 하여금 자신을 본받으라고 촉구하고 있다.
아, 누가 이 말을 받을 수 있을까!
하나님을 믿어 세상에서도 자랑거리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데 어찌 주님을 위해 수치스런 자리에 머물 수 있다는 말인가!
♦묵상 기도
아버지...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사도라 칭함을 받으나 정작 사도와는 무관한 삶을 살았습니다.
주께서는 사도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처럼 끄트머리에 두시는데, 저는 정반대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세상의 더러운 것이 되게 하시는데 저는 세상에서 보란 듯한 자가 되고자 했습니다.
만물의 찌끼처럼 되게 하시는데 저는 만물 안에서 두드러진 자가 되고자 했습니다.
오, 아버지...
십자가에서 내려와 십자가를 전하려 한 자였나이다.
모순된 사도, 공의로운 심판은 진실로 참되고 의로웠습니다.
모든 것을 가져가심이 아니라 나를 제 자리에 두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나로 자랑거리를 다 거두어 가심은 참 사도가 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비로소 세상의 구경거리,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었나이다.
아버지여...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사도의 자리는 여전히 가시방석 같습니다.
당신이 두신 사도의 자리를 박차고 세상의 보란 듯한 자리로 나가고 싶나이다.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이들의 눈을 의식하고 그 눈을 두려워하나이다.
비천한 자리에 있음을 부끄럽게 여기는 자를 불쌍히 여기소서.
세상의 구경거리 되신 그리스도, 그가 나의 주가 되시나이다.
비천하나 당당히 가르치는 자가 되게 하소서.
그들을 십자가에 달리신 주께로 인도하게 하소서. 주여, 도우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