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바울은 다시 고린도교회의 현실로 돌아온다.
그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영적인 자들과 같이 대하지 않고 육신에 속한 자로 대한다(1절).
여기서 '육신에 속한 자'(헬, 사르키코스)는 '육신'(헬, 사르크)의 파생어로서 그리스도를 믿으나 '자기주장 의지' '본성적 욕망'(the sinful nature)을 따르는 자이다.
바울은 그들을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다(2절).
그것은 그들이 밥을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아직도 그들이 밥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들에게 처음부터 십자가의 말씀을 전했다.
그래서 그가 말하는 젖과 밥은 동일하게 십자가의 말씀이다.
젖과 밥이 둘 다 음식에 속하나 그 형태가 다르듯 바울이 전한 내용은 십자가의 말씀이나 그 형태가 다를 뿐이다.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은 구변과 지식이 많고 은사도 많이 받았다.
그러나 그들이 방언을 말하고 예언을 말하는 등 성령의 은사가 많다고 해서 '영적인 사람' 결코 아니다.
그들은 여전히 육신에 속한 자요, 미성숙한 자요, 인간적인 기준에 따라 행동하는 자이다.
그 증거는 그들 안에 시기와 분쟁이 있고, 사역자들을 추종하고 자랑하는 것이다.
'나는 바울 편이다. 나는 아볼로 편이다'라고 하는데 어찌 인간적인 표준을 따라 행하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워츠만 니가 쓴 '영에 속한 사람'은 한국교회 신자들에게 '유일한 교본'(?)처럼 여겨진다.
그는 사람을 영, 혼, 육으로 나누고 오직 영의 지배를 받는 사람을 영적인 사람으로 보았다.
그는 육적인 본성으로 살지 말고 혼적인 느낌에 속지 말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 것을 표방한다.
순교적인 삶과 죽음이 기반이 된 그의 가르침과 많은 영향력을 주었고 그 효과도 거두었다.
그러나 이것은 성령을 따라 사는 체험적 실천을 말한 것이지 '영에 속한 자'의 '본질'을 논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이 말하는 영적인 사람은 십자가의 말씀을 통해 창세전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약속을 아는 자이다.
곧 복음을 통해 영원한 생명의 도를 알고 영원한 생명을 살아가는 자이다.
그는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을 알고 만물 위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하나님 안에 거한다.
영어성경(NIV)에서는 육신에 속한 자를 '세상에 속한 자'(worldly)로 번역하였다.
그가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은 단지 시간의 경과함으로써 자연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묵상 기도
아버지...
육신에 속한 자였으나 영에 속한 자로 생각했습니다.
은사와 체험이 영에 속한 자의 증거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제 안에 시기와 경쟁이 항상 있었고 사람을 따르고 사람을 따르게 한 자였습니다.
만물 안에 갇힌 자요 세상의 정욕과 육신의 생각을 따르는 자였습니다.
아버지...
당신의 심판은 영에 속한 자로 이끄셨습니다.
만물이 황폐한 자리에서 만물 위의 하나님을 보게 하셨습니다.
성령의 가르침으로 창세전 미리 정하신 지혜를 알게 하셨습니다.
아들 안의 생명을 주어 당신과의 사귐에 이르는 은혜를 주셨나이다.
아버지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은 넘어지고 쓰러집니다.
육신의 생각이 나를 속이고 나를 다스립니다.
냉랭한 마음, 착잡한 심정, 낙심과 불안이 엄습하나이다.
다시 하늘의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그 얼굴을 앙모하나이다.
육신의 느낌을 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끊을 수 없는 당신의 사랑을 신뢰합니다.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여전히 찬송하나이다. 할렐루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