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의 말씀 : 삿 21:16-21
2. 시작 기도
아버지여!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여 나의 중심이 상하나이다.
나는 석양의 그림자처럼 쇠잔하며 메뚜기가 바람에 불려가듯 쓰러지는 자이옵니다.
세상에서 분깃을 받으려는 자들의 비방거리요 그들이 나를 보면 머리를 흔드나이다.
사유하기를 즐기시는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 인자하심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내 인생이 당한 모든 일이 주의 손으로 하신 일인 줄 저들이 알게 하소서.
저들이 수치를 당할지라도 주의 종은 즐거워하나이다.
주께 크게 감사하며 많은 사람 중에서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궁핍한 자를 구원하시기 때문이옵니다.
내 영혼이 주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하오니 내 영혼과 육체가 살아계신 하나님 안에서 기뻐 외치나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3. 본문 주해
이스라엘 자손은 기브아의 죄악으로 인해 베냐민을 치고 베냐민은 멸절 위기에 놓였다.
그 후 이스라엘 자손은 베냐민을 위하여 뉘우치고 그들의 남은 자 600명에게 아내를 얻어준다.
이들은 자기들이 맹세한대로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길르앗 야베스를 치고 처녀 400명을 붙잡아와서 베냐민 자손에게 아내로 주었다.
그래도 200명의 여자가 부족하였다.
하지만 이스라엘 자손들은 자기 딸을 베냐민 자손에게 주지 않기로 맹세했기 때문에 다른 여자들을 구하고자 하였다.
마침 초막절로 추정되는 여호와의 명절을 되었다.
그리고 이스라엘 장로들은 베냐민 자손에게 명하기를 포도원에 숨어 있다가 실로의 여자들이 춤을 추러 나오면 그들 중에서 각각 하나를 붙들어 아내로 삼으라고 하였다(20-21절).
만일 그녀들의 아버지와 형제들이 와서 시비를 하면 장로들이 그들에게 말할 것이다.
곧 이 일은 전쟁을 할 때 베냐민 각 사람에게 아내를 주지 못했기 때문이며, 그들은 스스로 딸을 준 것이 아니니 죄가 없을 것이라고 해명하겠다고 하였다(22절).
베냐민 사람들은 장로들이 말한 대로 하여, 춤추는 여자들중 한명씩을 붙잡아 데리고 가서 아내로 삼았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 기업에 돌아가서 성읍을 건축하고 거기에 거주하였다(23절).
그런 후에 이스라엘 자손들도 각각 자기 지파와 가족들이 있는 기업으로 돌아갔다(24절).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25절).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보기에 좋은 대로 행하였다"(25절).
사사기의 결어는 사사기 전체를 규정짓는 이스라엘의 상태이다.
사사기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이후 왕조시대 직전까지를 배경으로 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시고 시내산에서 그들과 언약을 맺으셨다(출 19-24장).
언약의 내용은 그들이 말씀에 순종하는 쉐마를 준행하면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여타 다른 나라와 달리 인간이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그들의 왕이 되시겠다는 말씀이다.
시내산 언약은 모압 언약으로 갱신되었고(신 29장), 여호수아에 의해 세겜 언약으로 확정되었다(수 24장).
언약 백성 이스라엘에게 요구되는 한 가지는 말씀에 순종하는 쉐마이다!
하지만 가나안에 들어온 이스라엘은 쉐마의 길을 버리고 가나안의 풍습을 따르고 가나안의 신들을 섬겼다.
하나님은 그들을 징계하시고 그들은 고통 중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이에 하나님은 사사를 세우셔서 그들을 구원해주셨다.
'범죄→고통→부르짖음→구원'이라는 '부르짖음의 공식'이 그들이 영적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부르짖고 구원받는 신앙은 시간이 갈수록 악화되었다.
결국 사사기 후반에 들어 이스라엘은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완전히 타락하게 된다.
단 지파는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버리고, 베냐민 지파는 멸절 위기에서 겨우 건짐 받는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 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복, 곧 영생의 복이다(갈 3:8, 26).
영생의 본질은 하나님과 그 아들과의 사귐이며, 이로써 하나님 나라가 실현된다.
이 점에서 이스라엘 역사는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구현을 위한 통로가 된다.
이스라엘이 범죄하고 더욱 악화되어도 하나님의 구원사는 중단되지 않는다.
이 같은 구원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되었다.
곧 시내산 언약, 모압 언약, 세겜 언약은 옛 언약에 속하며 새 언약으로 완성된 것이다(눅 22:20).
그러므로 이스라엘 역사를 통한 구원의 역사는 끝나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만민이 구원받는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새 언약의 구원역사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완성된다.
신약시대 새 언약은 주의 계명에 순종하여 주 안에 거함으로써 유지된다(요일 3:23-24).
이는 옛 언약에 있어 쉐마의 삶은 이방 땅 가나안에서 성취되어야 했듯이, 가나안으로 표상되는 세상 한 가운데에서 성취되어야 한다.
그런데 가나안에 많은 주와 신들이 있듯이, 오늘날 세상에도 많은 주와 신들이 있다.
문제는 이스라엘이 왕되신 하나님을 버리고 가나안 신들을 섬겼듯이, 우리 역시 왕되신 주를 버리고 세상을 섬기는 위험을 안고 있는 것이다.
말씀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고 그리스도보다 다른 것들을 주로 삼는 것이 그것이다.
누구든지 그것에 매이고 그것에 자신을 종으로 내어주면 그것이 그의 주인이 된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 6:16).
신앙생활의 배도 여부는 매우 실제적이다.
말씀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고 주님보다 다른 것에 매이면 곧 배도의 길을 가는 것이다.
지금은 신상을 섬기거나 하는 종교적 우상의 시대가 아니다.
보이지 않은 영적 도덕적 우상의 시대로 이는 맘몬(재물), 성공, 쾌락으로 규정짓는다.
이것을 통해 자아를 극대화하며 자기 인생을 획득하는 것이다.
요즘은 자아폭발시대라고까지 하는데 그 궁극적인 원인은 하나님을 떠나 자의식이 생긴 것에 있다(자아폭발, 스티브 테일러).
말씀을 떠나면 주되신 그리스도를 버리는 것이다.
심지어 교회 안에도 말씀을 떠나는 자기보기에 좋은 대로 믿고 행하는 이들이 만연하다.
세상 뉴스, 세상 정보는 환히 아는데 생명을 주는 말씀에 대해서는 참으로 무지하다.
영적 지도자들은 생존의 문제는 그렇다 쳐도 성공과 명예의 우상에 걸려 성장에만 눈멀어 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예수를 주로 고백할 수 없는 상황에서 주로 고백하였다.
이들은 황제가 주가 되는 세상에서 그것을 부정하고 예수를 주로 고백함으로써 인생 전체를 몰수당했다.
그들이 핍박과 죽음의 위협을 무릅쓰고 오직 예수를 주로 고백한 것은 성령의 역사였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이 시대에도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주들이 믿는 자를 굴복시키고 있다.
날마다 새로워지는 첨단기기, 오락산업, 예능프로가 주들이 되고 있다.
결국 잃어버리고 말 자기 인생을 사는 것, 존재물, 맘몬, 쾌락, 성공이 믿는 자들의 주가 되고자 위협한다.
이런 상황에서 오직 주로 고백하게 하는 성령조차도 감각적 체험으로 치부되고 있다.
많은 신들과 주들이 가득한 때, 누가 진실로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가?
오직 하나님의 은혜요, 말씀에 붙잡힐 때이다!
작금의 교회, 새 언약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사사시대를 방불한다.
새 언약 백성의 신앙과 삶은 말씀을 순종하는 쉐마의 자리를 떠나 자기 보기에 좋은 대로 믿고 행동한다.
이것을 위해 자기의 영적 욕구를 만족시켜줄 많은 지도자와 선생을 둔다.
지도자도 선생도 오직 그리스도 주님이신데 말이다.
그래서 고통은 지속되고 회복은 요원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들이 재림하시는 그 날까지 구원의 역사를 이끌어 가신다.
이때의 신실한 자는 누구인가?
오직 말씀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영생의 삶을 살면서 내적으로는 주님을 닮아가고 외적으로는 주께서 분부하신 영생의 증인으로 사는 것이다.
4. 나의 묵상
사사기 묵상을 마치면서 그들과 일반인 나의 참상을 돌아본다.
하나님이 크신 은혜로 구원하시고 사명자가 되게 하셨다.
그러나 나는 말씀을 떠나 주되신 그리스도를 버리고 나보기에 좋은 대로 행하였다.
영생의 도를 알지 못하지 주께서 분부하신 영생의 증인은 요원하였다.
거룩하고 경건한 표어는 외쳐댔으나 실상은 다른 주를 따라갔다.
진리에 몽매한 채 목회성공에 매달렸고 그것이 주는 맘몬, 성공, 쾌락을 은밀히 추구하였다.
지금도 다른 주들로 인해 위협을 받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갈수록 하강곡선을 그리고 결국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런데 나는 그를 나의 주로 고백하면서도 그와 반대로 가고 싶어 한다.
내가 무엇인가 열심히 하면 갈수록 상승곡선을 그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주를 따르는 길은 고난 끝에 죽음인데, 나는 고진감래의 환영에 사로잡히곤 한다.
아, 말씀은 만물을 벌거벗기듯 내 마음과 생각을 드러내어 심판한다.
그렇다! 나는 내 결심과 힘으로는 예수를 주로 고백하지 못한다.
오직 성령으로만, 은혜로만 수많은 주들과 신들 중에서 예수를 나의 주로 고백한다.
사역의 상승곡선을 바라며 그로 인한 안정과 성공을 꿈꾼 자를 십자가에 못박는다.
오늘도 그의 죽음과 장사됨에 연합되어 오직 생명으로 살기 원한다.
5. 묵상 기도
아버지여...
심히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불쌍히 여기소서.
언약백성이 말씀을 버리고 왕되신 당신을 버렸나이다.
하여 자기 눈에 보기에 좋은 대로 믿고 행동하였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신실하셔서 끝까지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시나이다.
오, 아버지...
사사시대의 이스라엘은 오늘 우리 모습이요 나의 모습입니다.
많은 주와 많은 신이 내 눈 앞에 어른거립니다.
성공, 맘몬, 명예, 평판, 인기, 안정, 풍요, 안락, 효용성 등의 주들이 제 앞에 있나이다.
어찌 내 힘으로 이것들을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티끌과 재 가운데 누워 자복하오니 다만 불쌍히 여기소서.
성령이 아니고서는 당신을 주로 고백할 수 없나이다.
아버지...
나의 패역함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심은 당신의 신실하심입니다.
내가 바라는 한 가지, 말씀 안에서 당신의 품속에 거하는 것이옵니다.
구원이 완성되는 그 날, 수치당하지 않게 하소서.
환난 가운데 즐거워하여 그 날에 다시 오실 주와 같이 되게 하소서.
견고하며 흔들리지 않으며 영생의 도를 증거하기에 게으르지 않게 하소서.
나의 나된 것은 나의 주되신 당신의 은혜이옵니다. 오, 할렐루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