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까지 독일통일 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 동·서독교회가 어떤 협력관계를 맺었는지 나누고, 한국교회는 남북통일과 동북아의 평화, 화해를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할 지 고민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예장통합 평양노회는 28일 백주년기념관 소강당에서 '독일의 통일에 기여한 교회의 역할'을 주제로 제1회 평평루(平平樓, 평화통일을 위하여 평양노회와 루드비히스부르크노회가 함께 여는) 대화마당을 진행했다. 이달 30일부터 열리는 세계교회협의회(WCC) 부산총회 참관 차 방한한 에리히 하르트만 노회장, 이권호 선교사 등 12명 가운데 11명이 이 자리에 참석했다. 이번 행사는 평양노회가 지난 2월 독일 뷔르템베르크주교회 루드비히스부르크노회와 선교협정을 맺은 후 이뤄진 첫 협력사업이었다.
이날 클라우스 디터 그레스 목사는 다페르너 장로의 증언과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통일과정에서 나타난 동서독교회의 협력관계'에 대해 발제했다. 그는 1천7백여 명 규모(예배 참석률은 독일교회 주일예배 평균인 3~4%)의 지역교회에서 목회사역을 하고 있다.
이날 그는 우선 "(동서독교회 주도로) 서독인과 동독인의 유대관계가 끊이지 않도록 한 것은 양국 문제로 냉전 기류가 생기고 긴장이 심화될 때 개인적으로 교류한 사람들의 얼굴을 먼저 머리 속에 그려볼 수 있게 했다"면서 "독일통일에는 전적으로 개인적이고 인간적인 만남을 통해 자신 안의 철조망을 무너뜨리고, 외적 장애물까지 뛰어넘도록 만든 한 사람, 한 사람의 기여가 있었던 것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면에서 전환(독일에서는 통일 대신 전환이라고 표현하기도 함)은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 시작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개인적 파트너 관계를 통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동서독교회가 개교회, 주교회 차원에서 파트너십 관계를 맺은 것은 동서독교회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통일에도 큰 기여를 했다고 말했다. 1961년 베를린 장벽 설치 이후까지도 독일전체교회로 존재하다가 1967년 서독교회와 동독교회가 분리됐을 당시 독일전체교회 차원에서 동서독 지역을 안배해 수십 년 간 교류해 온 것이다. 그는 "이런 동서독교회의 만남에는 어떤 정치적 간섭도 들어오지 않았고, 동서독교회의 파트너 관계 유지를 위해 독일 내무부의 경제적 지원도 이뤄졌다"고 말했다. 그는 "약 80% 정도를 정부에서 지원받고 나머지는 파트너십을 맺은 교회가 각자 부담하거나 개교회들이 지원했다"며 "이 외에도 교인들의 모금을 통해 동독지역의 많은 교회 건물들이 새로 단장하고, 동독에서 주문 후 10년을 기다려야 살 수 있는 자동차들을 동독 목회자들에게 지원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러한 동서독교회의 만남과 교류들은 정치적인 것과 관계 없이 서로에 대한 관심과 동등한 입장에서 교류하려는 것에서부터 이뤄졌다고 강조했다. 그는 "물론 정치, 사회적인 깊은 갈등과 대립관계에서 확실한 원칙 없이는 동서독교회의 만남이 원활히 이뤄질 수 없었다"며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은 소위 상대편을 선교하려고 하거나, 자신의 상태가 상대보다 우월하다고 드러내고 이를 설득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동서독교회의 파트너 관계를) 개인적, 정치적 수단으로 오용하려고 들어온 사람은 그 자리에서 즉시 쫓겨 났다"며 이러한 원칙들로 당시 주교회, 위원회, 심지어 개교회 사이에서도 그물망처럼 촘촘히 맺어진 파트너 관계들이 존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동서독 사람들은 1970년대부터 1990년대 통일 이후까지 꾸준한 만남을 가지고 교류했고 교회는이들에게 장소를 제공했다. 그레스 목사는 "파트너십을 맺은 동독교회를 방문해서 자주 토론을 벌였는데, 분단 현실, 국경 상황, 그리고 당시에는 현실에서는 불가능할 것으로 여겨진 공동의 미래에 대한 가능성 등을 주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눴다"며 "물론 동독에서의 생활 적응은 어려웠지만 놀랐던 점은 인간적으로 볼 때 서로가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40여년 간 사회주의 체제의 압력 가운데서 동독교회가 축소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남은 교인들이 가진 분명한 기독교 정체성과 신앙은 서독교회에 반성거리가 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레스 목사는 "동독 성도들은 많은 사람들 안에서 종교를 근본적으로 몰아낸(통일 후 실제 동독 사람들의 80% 이상이 무종교인이었다) 사회주의 교육 안에서도 그 이상의 개념으로 기독교를 믿고 있었고, 공공장소에서도 떳떳하게 자신을 교회 일원으로 공표하기도 했다"며 "이러한 모습들은 우리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게 했다"고 말했다.
그레스 목사는 "동독 교인들의 집에 가끔 서독 교인들이 방문하면 이웃 사람들은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기독교인들이 서독 사람들을 접촉한다는 데 놀라움을 갖고 지켜봤다"며 "서독교회와 동독교회가 파트너 관계로 존재한다는 사실은 동독교회들의 정체성을 더 강하게 했고, 또 사회적으로 부당한 대우를 할 경우 서독에 알려질 수도 있어 미리 조심하는 '보호'를 의미했다"고 말했다. 동서독교회의 파트너 관계로 인해 동독 안에서 동독교회가 여전히 영향력 있는 교회로 남아있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파트너 관계는 표면 아래 숨겨져 잘 보이지 않는 것 같았지만 편지를 주고 받고, 서로 만나고, 생각을 나누고, 예배를 드리고, 서로 기도해 주며 그 생각을 실천할 때 명백한 현실로 드러났다"며 1989년 라이프찌히의 니콜라이교회에서 진행되던 기도회가 7만여 명이 모인 촛불기도행진으로 발전하면서 통일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사례를 들기도 했다.
그레스 목사는 "현재는 동서독교회의 파트너 관계가 과거보다 줄어들어 약 10~15% 정도만 유지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수십 년 간의 파트너 관계로 동서독 사람들 간 유대관계 형성이라는 목적을 어느 정도 성취한 점, 통일 이후 연대 및 지원의 긴박성과 공감이 사라진 것, 사회참여 등 동독교회 목사들이 사역이 바빠진 점, 스파이 등이 밝혀지면서 일부 사람들에 대한 인간적 실망 등을 이유로 꼽았다. 그는 "하지만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든 반쪽 된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는다"며 "교회에서부터 시작된 평화의 혁명이 독일 통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하다"고 강조했다.
이날 '통독과 교회의 역할'을 주제로 발제한 이권호 선교사는 "평양노회와 선교협정을 맺은 루드비히스부르크노회는 한국교회와 독일교회의 가교 역할을 하는 자매결연으로 발전하기를 원한다"며 "이를 위해 통일, 화해, 디아코니아(봉사)의 세가지 주제로 구체적으로 협력하길 원한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2015년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열리는 교회의 날 행사 무렵 슈투트가르트 바로 옆에 위치한 루드비히스부르크에 한국교회와 북한, 일본, 중국 등 주변국 교회들을 함께 초대해 통일과 평화, 화해를 위한 장을 마련하는 것이 구상하는 계획 중 하나라고 그는 말했다.
이 선교사는 "루드비히스부르크는 2차 대전 후 독일과 프랑스 양국 정상들이 만나 화해를 했던 상징적인 도시"라며 "이 곳에서 한국의 통일문제뿐 아니라 2차 대전으로 인한 과거사 청산 문제 등을 주변국 교회들과 이야기하고 화해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현재 큰 그림을 그리는 상태에서 오늘 행사는 양 노회에 동기부여를 하고 협력의 필요성을 함께 느끼기 위해 마련된 것"이라고 말했다.
에리히 하르트만 노회장은 인사말에서 "파트너가 된다는 것은 함께 길을 가는 것이고, 우리가 가진 아픔과 기쁨을 함께 나눈다는 것"이라며 "바로 오늘 이 자리를 통해 서로의 아픔과 기쁨을 공유하고, 정의와 평화, 창조질서 보존을 위해 협력하는 파트너 관계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조남주 평양노회 부회장은 "독일교회가 평화의 왕인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평화의 사도로 부름 받아 통일을 이룬 것처럼 한국교회도 남북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용서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 다가설 때 하나님이 우리 민족의 통일을 이뤄주실 것을 믿는다"고 말했다.
이날 행사에는 평양노회 임원,. 에큐메니칼위원회 위원, 여전도회, 남선교회 회원, 총회 남북한선교통일위원회 위원 등 40여 명이 참석해 독일교회의 새로운 부흥과 한국교회와 평화통일을 위해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