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말씀 묵상] 범죄와 전쟁과 죽음이 계속된다

본문: 삿 21:1-15

1. 오늘의 말씀 : 삿 21:1-15

2. 시작 기도

아버지여!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는 것은 주의 말씀을 거역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곤고와 쇠사슬에 매인 것은 지존자의 뜻을 멸시하기 때문이옵니다.
 하여 고통을 주사 마음을 낮추시며 넘어져도 돕는 자가 없게 하시나이다.
 광야에서 행하신 기적을 잊고 영생을 주신 크신 인자를 망실하는 자가 여기 있나이다.
 나의 욕심을 크게 내며 곤고한 중에 주를 시험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소서.
 비록 요구한 것을 주실지라도 나의 영혼은 쇠약해져가나이다.
 이 새벽, 환난 중에 부르짖는 자를 불쌍히 여기소서.
 흑암과 사망에게 건져내사 빛 가운데로 인도해주소서.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내 영혼을 소생시켜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3. 본문 주해

사사기의 중심내용은 하나님의 왕되심을 저버린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에 있다.
특히 베냐민 지파에 속한 기브아의 불량배들이 저지른 범죄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대대로 기억되는 죄악이다(호 9:9' 10:9).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들어 베냐민 지파를 치셨다.
베냐민 자손은 림몬 바위로 도망한 600명을 제외하고 몰살당했으며 그 성읍은 불살라졌다.

이스라엘 자손은 베냐민과 싸우기 위해 미스바에 모였을 때 했던 두 가지 맹세가 있다(20:1).
하나는 그들 중 누구라도 그들의 딸을 베냐민 사람에게 아내로 주지 않기로 한 것이다(1절).
여기 1절은 전쟁을 시작하기전 미스바에서 한 맹세를 기억하는 것으로 과거완료로 해석된다.
또 다른 하나는 베냐민과 싸우기 위해 미스바에 와서 여호와 앞에 이르지 아니한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라는 맹세이다(5절).

이스라엘 자손이 베냐민을 거의 진멸한 후 벧엘에 와서 큰 소리로 울며 탄식한다.
어찌하여 이스라엘에 이런 죄악이 생겨 이스라엘 중 한 지파가 없어지게 되었느냐는 것이다(3절).
그들이 이튿날 일찍이 일어나 한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 후 미스바에서 했던 맹세를 기억한다(4-5절).

그들은 베냐민 지파를 친 일을 뉘우치고 그 남은 자들에게 아내를 주고자 한다.
그리고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길르앗 야베스를 진멸하고 남자와 동침하지 않은 여자 400명을 실로 진영으로 데리고 온다(8-11절).
실로는 길르앗이 위치한 요단동편이 아닌 가나안 땅으로 강조되고 있다(12절).

온 회중이 림몬 바위에 숨어있는 베냐민 자손에게 전령을 보내 평화를 선언하였다(13절).
그들이 돌아오자 이스라엘 사람들이 길르앗 야베스에서 데려온 여자들을 아내로 주었다(14절).
하지만 600명의 남자에 비해 200명의 여자가 부족하였다.
백성들이 베냐민을 위하여 다시 뉘우쳤는데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지파들 중에 한 지파가 빠지게 하셨기 때문이다(15절).

말씀이 부재한 시대, 이스라엘은 스스로 맹세하고 다짐한다.
 그들은 전쟁에서 승리했으나 그 맹세가 올무가 되어 다시 길르앗 야베스를 치고 살육을 감행한다.
 그리고 남자와 동침한 적이 없는 여자 400명을 잡아와 베냐민의 남은 자들에게 아내로 준다.
 그들이 길르앗 야베스를 친 것은 자기들의 딸들을 베냐민 자손에게 주지 않을 것이라고 맹세했기 때문이고, 또한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자를 죽이겠다고 한 맹세로 인함이다.
 맹세의 올무가 계속된 범죄와 전쟁, 죽음을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악행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계속된다.
 베냐민 지파는 재건되고 그들 중에서 이스라엘의 첫 번 째 왕 사울이 세워진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사는 예수 그리스에게서 완성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맹세를 금하셨다.
 도무지 맹세하지 말 것인데 하늘로도, 땅으로도,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고 하셨다(마 5:34-35).
 이는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요 땅은 하나님의 발등상이요 예루살렘은 큰 임금의 성이기 때문이다.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는 머리로도 맹세하지 말라고 하셨다(마 5:36).
 우리는 오직 옳다 옳다, 아니다 아니다라고 할 것이며 여기서 지나치는 것은 악한 자의 역사라고 하신다(마 5:37).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맹세가 아니라 성령의 감동이 그를 인도한다.
 하지만 이것 또한 하나님의 비밀한 섭리를 제한하지 못한다.
 이는 비록 성령의 감동이라도 인간의 생각이 들어있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결말에 대해 '예'라고 하며 순종하는 것이다.

바울은 성령의 감동으로 고린도에 두 번 갈 것을 계획하였다(고후 1:15).
 마게도냐로 가는 길에 한번 들리고 거기서 돌아오는 길에 다시 한 번 들리기로 한 것이다(고후 1:16).
 이렇게 계획할 때 경솔히 하지 않고 육체를 따라 '예 예' 하거나 '아니라 아니라' 하지도 않았다(고후 1;17).
 진지하게 영을 따라 한 결정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주어진 결말은 한 번도 가지 못한 것이다.
 이에 대해 바울은 하나님의 신실함을 받아들이고 "예"하고 순종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고후 1:18).
 "But as surely as God is faithful, our message to you is not 'Yes' and 'No"(NIV).

4. 나의 묵상

내가 원치 않은 상황으로 전개되는 현실 앞에 먹먹함을 금할 수 없다.
선교회가 교회로 전환하는 일, 다시 교회를 접고 선교회가 존속되는 일로 인해 마음이 산만하다.
때로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누운 것 같고 곤고와 쇠사슬에 매인 것 같다.

내 생각은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 하나 성령의 감동 안에 육신의 생각이 들어있다.
분명한 것은 '내가 틀릴 수 있는 사실'이고 또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고집스럽고 완악하다.
무시로 부딪치며 깨어지며 다듬어졌다고 하지만 자기주장 의지는 사그라지지 않는다.
어느새 맹세의 올무에 걸린 자가 되어 사람을 탓하고 상황을 탓한다.

다 알 수 없는 하나님, 지존자의 뜻을 멸시하여 곤고와 쇠사슬에 매인 모습이다.
틀릴 수 있다는 한계를 잠잠히 받아들이며 티끌과 재 가운데 엎드린다.
성령의 감동 안에 육체의 생각이 들어있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뜻 앞에 무릎 꿇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실하시다"(고후 1;18).
지금껏 무엇 하나 내 뜻대로 된 것이 있었던가?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궁핍과 환난 속에서 당신의 일을 해오시지 않으셨는가?
나의 결심, 의지, 결단, 맹세는 하나님의 역사를 제한할 뿐이다.
약하고 비천한 자리에 있을 때 나의 도움 되시며 나의 강함 되시는 주를 신뢰한다.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자를 기억하시는 하나님, 그 인자하심을 찬양한다.
"우리를 비천한 가운데에서도 기억해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 136:23).

5. 묵상 기도

아버지여...
종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아있나이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함이요, 지존자의 뜻을 알지 못함이옵니다.
스스로 맹세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전쟁을 치른 일은 지나간 때로 족하옵니다.
이제는 맹세를 금하고 다짐을 중단하고 결심을 버리나이다.
오직 주 뜻대로 인도하시는 그 길에 "예"하며 달려가기를 원하옵니다.

아버지...
그럼에도 불구하며 종은 양과 같이 미련한 자이옵니다.
한 치 앞만을 바라보며 당장의 소원만 이루어지기를 바라나이다.
각기 자기 길로 가는 인생들 중에서 종을 구원하여 주소서.
내 뜻과 소원을 멸하여 주소서. 당신의 뜻, 당신의 소원만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버지여...
종과 선교회에 대한 당신의 뜻은 신실하시나이다.
그 뜻 앞에 나를 복종시키며 '예'하며 따라가게 하소서.
종을 더욱 정결하게 하시고 공동체를 더욱 정결하게 하소서.
우리가 틀릴 수 있다는 겸비함으로 당신의 뜻만을 구하며 그 뜻을 따라 행하게 하소서.
나의 두려움, 말씀을 떠나 행하는 것이옵니다. 그 일이 당장 선해도 결국 죽음에 이르는 길이옵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의 품으로 이끄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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