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의 말씀 : 삿 20:36-48
2. 시작 기도
아버지여! 내 눈을 들어 당신께 향하오니 은혜 베풀어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죽기에만 합당한 자를 다시 살리셨으나 내가 누구인지 수시로 망실하는 자입니다.
내 속의 음란과 탐심과 정욕과 교만의 본성은 어느새 죄의 세력에 굴복하여 나를 사망으로 몰고 가나이다.
나의 옳음을 증명하려는 교만과 광포로 인해 내가 사망 가운데 처하게 되었나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이오니 나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내 영혼, 심히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나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나도 용납할 수 없는 비참한 자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 안에 있는 당신의 사랑은 끊을 수 없음을 믿나이다.
오, 주여! 언약의 하나님만이 나의 도움, 에쩨르가 되심을 믿나이다.
속히 오사 나를 구원하소서. 나의 에쩨르가 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3. 본문 주해
이스라엘 자손들은 기브아의 불량배들을 내어주지 않은 베냐민 지파와 전쟁을 벌인다.
그러나 뜻밖에도 처음 두 번의 전투에서는 막강한 군사력에도 불구하고 베냐민에게 패배하고 말았다(이스라엘 군사 400,000명과 베냐민 군사 26,700명).
그들이 회개하고 희생 제사를 드린 후 언약궤 앞에서 묻자, 하나님은 승리를 약속하신다.
'삿 20:29-48'에서는 세 번째 전투를 다루며 이스라엘이 승리하고 베냐민 지파가 몰락한다.
그런데 35절을 분기점으로 하나의 사건에 대한 두 가지 이야기가 결합되어 있다.
곧 이스라엘의 승리와 베냐민의 패배에 대한 중복구절과 병행구절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매복 작전으로 승리를 거둔 것으로 아래와 같이 약술된다.
31절: 이스라엘 자손이 복병을 두고 퇴각하고 베냐민 자손이 이스라엘 자손 30명을 죽임.
39a절: 이스라엘 자손이 복병을 두고 퇴각하고 베냐민 자손이 이스라엘 군사 30명을 죽임.
32절: 베냐민 자손이 처음 두 번의 전투처럼 자기들이 이긴 것으로 생각함.
39b절: 베냐민 자손은 처음 전투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패한다고 생각함.
36절: 베냐민 자손이 자기들이 패한 것으로 생각함.
41절: 베냐민 자손이 화가 자기들에게 미친 것을 보고 놀람.
42절: 베냐민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 앞에서 몸을 돌려 광야로 도망함.
45절: 베냐민 사람이 몸을 돌려 광야로 도망함.
35절: 칼을 잘 쓰는 베냐민 사람 25,100명이 죽임 당함.
46절: 베냐민 사람으로 칼을 잘 쓰는 사람 25,000명이 죽임 당함(25,000명은 25,1000명과 같은 표현임).
베냐민에 대한 이스라엘의 승리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앞에서 베냐민을 치신 것이다(35절).
한편 베냐민 자손에서 모집한 군사는 26,700명이었으나 600명만 남고 다 멸절되었다.
이는 3차 전투에서 25,100명이 죽고 600명이 살아남아 도망한 것으로 보아 1,2차 전투에서 1,000명이 죽은 것으로 추산된다.
이스라엘 사람이 베냐민 성읍으로 쳐들어가 온 성읍과 가축과 만나는 자를 다 칼로 죽이고 성읍은 모두 불살라버렸다(48절).
이제 베냐민 지파는 림몬 바위에서 넉 달 동안 숨어있는 600명의 남자들만 남은 것이다.
작은 불씨가 온 산을 태운다.
베냐민 지파가 몰락하고 성읍이 불타버린 것은 기브아의 불량배가 지핀 불씨로 인함이다.
한 밤을 즐긴 죄악의 대가는 한 지파 전체를 죽음으로 몰고 갔고 그들의 성읍을 모조리 불태워버린 것이다.
죄에는 육체의 즐거움이 따른다(히 11:24; 죄의 낙 - pleasure of sin).
그러나 반드시 그 삯을 치른다. 그것은 자신만이 아니라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 나아가 그가 거처하는 성읍까지도 불살라버린다.
이 같은 죄의 세력은 언약백성 이스라엘에게도 여지없이 역사하였다.
후에 베냐민 지파의 비극은 이스라엘 전체의 비극이 되고 만다.
바벨론의 사령관 느브라사단은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을 불사르고 그 성읍의 모든 집과 고관들의 집을 불살라버렸다(렘 52:12-13).
이로써 언약 백성 이스라엘은 완전히 멸절하고 만다.
아,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영원히 신실하시다.
심판의 자리, 멸절의 자리에 새 언약을 선포하시고 약속하신다.
다윗의 가지에서 난 구원자가 오면 그를 통해 다시 자기 백성으로 받아들이시겠다는 것이다(렘 31:31-34; 33:14-18).
인간의 육체 안에는 죄를 즐기는 본성이 뿌리 깊게 박혀 있다.
죄를 좋아하고 죄를 즐기는데 어찌 그렇게 좋아하고 즐기는 죄를 끊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이율배반이다. 죄를 즐기는 본성을 가진 자가 죄를 미워하는 것이 어찌 가능하겠는가?
그러므로 스스로 결심하고 스스로 맹세해도 스스로 죄를 끊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를 끊는 능력은 결코 우리 안에 있지 않으며 밖으로부터 온다.
낯설고 흉측해보이기까지 하는 십자가에만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구원자로 오셨다. 그가 세상에 오심은 죄를 멸하기 위함이시다.
그는 죄가 주는 즐거움에 취해 사망의 길을 가는 모든 인생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가 육체의 고난을 받으심으로써 죄를 멸하신 것이다.
이제 누구든지 그와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고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친다(벧전 4:1).
죄를 즐기는 옛 사람은 십자가에 죽었다. 이로써 죄를 즐기는 죄의 지체는 불구가 되었다.
이것은 지식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몸을 쳐 복종해야 하는 고백이다.
신자는 죄악된 세상에서 죄를 즐기는 본성을 가지고 사는 것을 고통스럽게 여겨야 한다.
그래야만 십자가가 은혜가 되고 죄를 그치는 능력, 곧 죄의 몸이 불구되었음을 기쁘게 받아들인다.
4. 나의 묵상
오늘도 말씀 앞에서 전율한다.
몇 사람의 죄악이 뿌린 씨앗이 한 지파를 몰락시키고 그 성읍을 불살라버린다.
죄의 삯으로 인해 불타는 성읍이 내 눈에 밝히 보인다.
불타는 그 성읍 안에 내 인생이, 내 가족이, 내 공동체가, 내 교회가, 내 나라가 있다.
은밀하게 즐긴 한밤의 죄악을 그대로 방치하고 제거하지 않은 죄악이 이리도 참담하다.
악을 미워해야 마땅한 내 속에 악을 즐기는 본성이 있으니 어찌할꼬!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낼 것인가?
어제 나눔에서 어느 목사님이 음란죄를 다루면서 빌리 그래함 목사 이야기를 하셨다.
누군가 그에게 '어떻게 평생 음란 죄를 이겼냐'고 물으니, 그는 유혹이 올 때마다 '두 번 다시 쳐다보지 않았다'(Don't look twice!)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나는 그 두 번 째는 십자가를 쳐다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였다.
죄를 즐기는 육체가 십자가에서 죽어 이미 불구자된 죄의 몸을 보아야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십자가 능력으로 죄의 몸을 불구로 만들지 않고 어찌 죄를 즐기는 본성을 이겨낼 것인가 말이다.
내 안에 홍수가 범람하는 아침이다!
외관상 상황의 문제이나 하나님은 이로 인해 나의 거룩성을 시험하신다.
죄로 인해 불살라진 과거를 안고 살면서도 여전히 죄를 즐기는 본성을 방치하는 나를 보게 하신다.
이아침,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한다.
뿌리 깊게 인이 박힌 나의 교만, 음란, 정욕, 향락의 죄를 자백한다.
내가 깨달은 것은 부분적임에도 불구하고 나의 옳음을 증명하고자 한 자만의 죄악을 토설한다.
홍수는 밖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내가 자초한 것이다.
심히 가난하고 궁핍한 자가 되어 긍휼을 구한다. 죄사함을 은혜를 주시는 아버지의 긍휼을 구한다.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두르시리이다 (셀라). 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시 32:6-8).
한없이 인내하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아버지 사랑에 목이 멘다.
죄를 자백하고 사함 받은 자, 홍수는 여전히 범람하나 나를 삼키지 못한다.
주님은 나의 은신처요 환난에서 보호하시며 구원의 노래를 부르게 하신다.
주께서 내 갈 길을 가르쳐 보이시고 주목하여 훈계하신다.
주께서 정하신 길, 죄사함의 감격 속에서 구원의 노래를 부르며 달려간다.
5. 묵상 기도
아버지여...
한밤을 즐긴 죄의 낙이 이처럼 무서운 멸망을 가져왔나이다.
꿈을 꾼 듯 지나간 인생, 죄악을 즐기며 살았나이다.
베냐민 성읍이 불타는 그 곳에 내 인생이 보이나이다.
아, 종이 심히 참담한 것은 심판으로 불타버린 과거가 어제 같으나 여전히 죄를 즐기는 본성을 제어하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은밀하게 즐긴 죄악의 삯은 대낮에 불타는 성읍으로 돌아옵니다.
주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소서.
아버지여...
홍수가 범람하는 아침, 내가 내 죄를 토설하고 자백하나이다.
죄를 즐기는 본성에 사로잡혀 세상의 즐거움을 구하는 불쌍히 여기소서.
나의 옳음에 사로잡혀 그것을 증명하는 결과를 바랬던 교만한 자를 불쌍히 여기소서.
말씀을 즐거워하는 것보다 존재물을 즐거워한 자를 불쌍히 여기소서.
죽기에만 합당한 자를 다시 살리셨으나 개가 토했던 것을 다시 먹는 자를 불쌍히 여기소서.
오, 아버지...
당신의 인애와 긍휼이 무궁하나이다.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으니 이제는 죄악을 미워하나이다.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내게 미치니 아니함은 주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이옵니다.
나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소서. 주께서 정하시고 이끄시는 그 길을 보이소서.
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으나 주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르시나이다.
나의 갈길 다가도록 나를 두르시는 주의 인자하심을 믿나이다. 할렐루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