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인권 칼럼] 새벽을 깨우는 사람

메릴랜드 새소망교회 안인권 목사
안인권 목사

"내가 새벽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시119:147) 시인은 이 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붙드는지에 대한 개인적인 고백을 기술한다. 이 시편 119편은 하나님 앞에서 시인이 가지고 있었던 사상과 그의 전 생애의 농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인의 시편들을 보면 특별히 이른 아침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온다.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시5:3). "아침마다 내가 이 땅의 모든 악인을 멸하리니 죄악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에서 다 끊어지리로다"(시101:8). "아침에 나로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나의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받듦이니이다"(시143:8). 이 성경 구절로 미루어 시인은 이른 아침, 하나님 앞에 하는 두 가지의 익숙한 일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는 기도하는 것이었고, 둘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었다.

시편 기자가 살던 시대로부터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신자라면 마땅히 행해야 할 아침의 의무는 바뀌지 않았다. 하나님이 그의 자녀들의 영혼에게 하늘을 날라오를 수 있는 두 날개를 주셨는데, 그것은 바로 말씀과 기도이다. 이 두 가지는 경건한 삶의 원동력이 된다. 세상에 살면서 세상에 묶이지 않고 하늘을 날아오를 수 있도록 있는 영적 능력의 삶이 말씀과 기도의 삶이다.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어떤 사람이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 날개를 다친 철새 한 마리를 발견했다. 날개가 부러져 날 수 없었던 그 철새는 동료들을 따라가지 못하고 홀로 남은 것이었다. 그 사람은 그 새를 잘 치료해 주고 일년 동안 보살펴 주었다. 이듬해 그 새의 친구들이 다시 돌아왔을 때 함께 가도록 그 새를 놓아 주었다. 그 새는 이번에도 친구들과 함께 떠날 수 없었다. 날개는 다 나았지만 그 동안 너무 살이 쪄서 날아오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날지 않으면 도저히 먹을 것을 구할 수 없었던 예전과 달리, 날아 다닐 필요없이 날마다 편히 배불리 먹을 수 있었던 것이 결국 날지 못하는 불행의 원인이 된 것이었다.

새의 본분은 나는 것이다. 그러나 날기를 게을리 하면 서서히 날개는 퇴화되고 몸은 무거워져 날 수 없는 새가 되고 만다.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다. 땅에 살고 있지만 땅에 속한 자가 아니요 하늘에 속한 자인 그리스도인은 영의 세계를 날아 다녀야 한다. 영적 날개가 말씀과 기도이다. 말씀과 기도의 삶을 게을리 하면 날개가 퇴화된 새가 되고 만다.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아무리 다양한 견해들이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그것과는 상관없이 모두가 동의해야만 하는 한 가지 진리가 있다. 그것은 바로 말씀과 기도의 경건 생활이다. 교회에서 일꾼을 세울 때에도 제일 중요하게 보아야 하는 것은 개인적인 경건 생활이다. 새들 중에 날지 못하는 새가 있듯이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경건 생활을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새가 날아야 먹이를 구할 수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이 말씀과 기도의 날개로 날아야 하나님으로부터 신령한 생명력을 공급받을 수 있다.

시편에서의 시인의 고백을 미루어 보건대 그는 경건 생활을 효과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사람이 분명하다. 특별히 시간에 대해서도 깊이 고민했던 증거가 보인다. 시인이 경건 생활을 위해 할애했던 시간은 주로 아침과 깊은 밤이었다. 이른 아침과 깊은 밤, 이 두 시간이 만나는 새벽이라는 지점을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 시간은 하나님과 단 둘이 친밀한 교제가 살아있는 놀라운 은혜의 시간인 것이다. 이것은 단지 며칠 동안만의 행사가 아니라 끊임없이 지속되었던 경건의 습관이었다. 시인은 새벽의 사람이었다. 남들이 다 잠들어 있는 이른 새벽에 그는 조용히 일어나 하나님을 만났다. 그리고 늘 그 감격을 품고 떠오르는 태양을 맞이하였다. 찬란한 태양을 맞이하는 감격스런 아침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새벽의 사람으로 살지 못하는 사람은 새벽을 깨우는 삶이 좋은 것을 몰라서가 아니다.

새벽을 깨우며 살고픈 소망이 있다. 그러나 소망대로 살지 못하는 것은 곤하게 잠자고 싶은 욕구를 이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수면은 누구에게나 꿀과 같이 달콤하고 편안하다. 새벽에 그 달콤한 잠에서 깨어 잠자리를 박차고 나온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두가 잘 알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새벽의 시간은 자신에게 너무나 불리한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은 도저히 새벽을 하나님 앞에 바칠 수 없는 여건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인의 삶을 보면 그러한 변명은 변명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시인이 야심한 밤에 깨어 하나님을 찾았던 것은 분주한 한낮의 일과로부터 시간을 구별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시인은 한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었다. 그에게는 결정하고 지휘하고 판단해야 하는 일이 끝도 없이 산적해 있었다.그가 잠을 자야 하는 밤 시간을 피해 낮 시간으로 기도 시간을 잡았다면, 그는 끝내 기도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는 왕으로서 마땅히 하여야 할 업무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마땅한 말씀과 기도의 삶 중 그 어떤 것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결국 달콤한 잠을 포기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사모하는 간절한 소원이 잠을 몰아내었던 것이다. 새벽 시간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 피곤하고 일이 많아서 새벽 시간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면, 그러면 가능한 시간은 언제인가? 새벽 시간은 기도하고자 하는 신자의 마지막 보루이다. 그 새벽마저 안 된다면 경건의 시간을 가질 만한 다른 시간은 거의 찾을 수가 없을 것이다. 새벽에 일어나지 못하는 것은 체질이나 건강의 문제만은 아니다. 문제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새벽의 가치를 어느 정도로 중시하느냐이다. 아무리 다양하게 변명한다 할지라도, 성도가 기도하지 않는것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시간은 괴롭지도 피곤하지도 않다. 시간도 얼마든지 만들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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