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의 말씀 : 삿 19:1-15
2. 시작 기도
아버지여! 주께서 종을 곤고케 하심은 죄악의 연고로소이다.
죄의 세력은 죽을 몸을 지배하여 사망에 이르게 합니다.
죄의 몸이 불구가 되었으나 정험이 없어 다시 정욕을 따라 행하는 자를 어찌하오리이까?
죄의 세력에 속절없이 무너져 곤고한 자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도 나를 용납할 수 없어 주저앉은 자, 오직 보혈의 공로 의지하여 주 앞에 나아옵니다.
종을 불쌍히 여기사 구원하여 주소서. 내 영혼이 잠잠히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3. 본문 주해
사사시대는 가나안 정복이후 왕정시대까지의 기간을 다룬다(B.C 1375-1050년).
사사기에서 사사는 오직 하나님으로 언표되며(11:27), 인간 사사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다스린다.
인간 사사는 6명의 대사사와 6명의 소사사로 나누어진다.
대사사는 주로 외부로부터 구원의 일을 수행하며 소사사는 내부의 재판을 담당한다.
대사사중 마지막 사사는 삼손이다(B.C 1075-1055년).
사사기 17~21장은 삼손이후의 시대를 다루고 있다.
이 시대를 특징하는 관용적인 어구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다'이다(17:6; 18:1; 19:1; 21:25).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들은 자기들이 보기 좋은 대로 행하였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다'는 곧 그들이 왕되신 하나님을 버렸음을 뜻한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삼상 8:7).
언약 백성 이스라엘은 다른 나라와 달리 '인간 왕'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있어서 왕은 오직 한 분 그들의 하나님 야훼이시다.
그들이 말씀에 순종하는 쉐마를 준행하면 언약을 지키는 것이요, 그 때 하나님이 그들의 왕이 되셔서 다스리시는 것이다.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시 95:6-7).
그러나 이스라엘이 말씀을 떠나 가나안 풍속을 따르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트렸다.
그 결과 그들의 왕이 되시는 하나님이 그들을 떠나시고 그들은 자기 보기에 좋은 대로 믿고 행한 것이다.
그 구체적인 실상은 미가의 경우에서 보듯이 신앙의 제의는 확고하나 결국 자기 인생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믿으며, 그것을 지지해줄 영적 지도자를 세우는 것이다.
특히 단 지파는 하나님이 정하신 기업을 버리고 자기 보기에 좋은 땅을 무력으로 정복하고 그곳에 신상을 세우고 제사장을 세우는 성소를 세웠다.
단 성소는 후에 여로보암이 세운 벧엘 성소와 함께 국가적 성소로까지 발전하였다.
물론 이곳에는 황소 상을 하나님의 받침대로 여기는 패역함까지 더해졌다.
이들 성소는 언약궤를 받침대로 하여 서신 예루살렘의 참 하나님과 대비되는 불의한 성소이다.
벧엘 성소는 모든 것을 예루살렘 성소와 비슷하게 세웠으나 다른 신을 섬긴 성소이다(왕상 12:28-33; 14:8).
단 성소는 모세의 직계 손을 제사장으로 세웠으나 하나님이 금하신 신상과 드라빔을 둠으로써 혼합성소가 되었다.
말씀으로 역사하는 참 하나님을 떠나면 불가불 유사 신앙, 혼합신앙을 따를 수밖에 없다.
물론 그런 신앙은 때가 이르면 반드시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으로 끝이 난다.
사사기 19~21장은 전체 주제가 베냐민 지파와의 내전을 다룬다.
그 발단은 에브라임 산지에 사는 한 레위인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본래 레위인은 하나님이 주신 기업이 없었다(수 18:7).
다만 이스라엘의 각지파에서 내어준 성읍에서 거주하도록 되어 있다(수 21장).
에브라임 산지 외진 곳에 사는 레위인이 유다 베들레헴 여자를 첩으로 데려왔다.
그는 이미 본처를 두었는데 어떤 이유에서 후처를 들인 것으로 보인다(창 25:6 참조).
그 여자가 레위 사람에게 나쁜 짓을 저지른 후 베들레헴의 자기 아버지 집으로 도망쳤다(2절).
거기에서 넉 달 동안 머물렀다.
이에 레위인 남편은 그녀를 데려오고자 자기 종과 함께 나귀 두 마리를 끌고 길을 떠났다.
그녀가 그를 집에 들이자 그녀의 아버지가 그를 보고 반가워하였다(3절).
"그 첩이 행음하고"의 히브리어 원어는 "그녀가 배반하고"(히, 자나)이다.
그녀는 매춘행위를 한 것이 아니라 그와 다툰 것이다(쉬운성경).
이들 부부는 결혼생활에서 불화가 생긴 것이고 남편이 그녀를 설득하기 위해 그녀를 찾은 것으로 보아 그 책임은 남편에게 있었음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 아내와 장인이 그를 반겨 맞이한 것으로 보아 불화의 원인은 그다지 심각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특이한 사항은 구약성경에서 아내를 거부할 권리가 남자에게만 있는데 결별이 여자의 주도에 시작되고 있는 점이다.
이것은 구약성경에서 유일한 사례이다.
레위인 사위를 반겨 맞이한 장인은 그를 지극히 환대한다.
장인은 사위 일행을 사흘 동안 머물게 하였고 그들은 먹고 마시고 밤을 보냈다(4절).
"밤을 보냈다"는 표현은 이들 부부가 관계를 회복했음을 시사한다.
장인은 사위의 기력을 회복시켜주고자 다시 한 밤을 더 지내게 하였다(5-7절).
다섯째 날도 더 유숙할 것을 강권했으나 레위인 일행은 떠난다(8-9절).
그들이 떠나 여부스, 곧 예루살렘의 맞은편에 이르렀다(10절).
그들 일행이 여부스에 가까이 갔을 때 해가 지려하자 종이 주인에게 여부스 성읍에 머물자고 하였다(11절).
그러나 레위인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하지 않은 이방 사람의 성읍 대신 기브아로 가자고 한다(12절).
본래 여부스는 베냐민 지파에게 할당된 땅이었다(수 18:28).
그러나 베냐민 지파는 그 성읍을 정복하지 못하여 여부스 사람들이 그대로 살고 있었다(삿 1:21).
이곳은 후에 다윗이 정복하여 다윗 성으로 삼았다(삼하 5:6-10).
레위인 일행은 위험이 감지된 이방인의 성읍을 피하여 안전한 동족의 땅으로 들어간다.
곧 기브아 성으로 들어가 그 날 밤을 거기서 지내려고 하였다(14절).
그러나 그들을 자기 집에 데려가서 재워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15절).
레위인은 안전한 곳인 기브아로 들어왔다.
하지만 그는 그를 기다리는 베냐민 사람들의 폭행과 아내의 죽음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가 기브아에서 당한 일은 이스라엘이 지은 죄악의 표본이 된다.
"그들은 기브아의 시대와 같이 심히 부패한지라 여호와께서 그 악을 기억하시고 그 죄를 벌하시리라"(호 9:9).
"이스라엘아 네가 기브아 시대로부터 범죄하더니 지금까지 죄를 짓는구나 그러니 범죄한 자손들에 대한 전쟁이 어찌 기브아에서 일어나지 않겠느냐"(호 10:9).
본문에 나오는 레위인 부부는 모든 인생의 단면을 보여준다.
부부가 결혼하고 무슨 일로든지 다투고 또 화해를 시도한다.
화해가 결실을 맺자 장인은 기뻐하고 그들을 극진히 대접한다.
이들 부부는 다시 화목하게 살기 위해 집으로 돌아온다.
무엇보다 남편은 가족과 일행의 안전을 고려하여 이방인의 성읍을 피해 동족의 성읍으로 가는 세심한 노력을 다한다.
그러나 이들을 기다리는 것은 가히 끔찍한 재앙이다.
그들 중 누가 과연 그들에게 닥칠 재앙을 생각이나 했겠는가?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언약백성에게 왕이 부재한 것이며 그 왕은 곧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모든 인생은 행복을 꿈꾼다.
그것이 실패하였을 때 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다시 새롭게 시작한다.
하지만 그 배후에 하나님이 부재했을 때 그들도 상상하지 못할 고난이 오고 재앙이 임하기도 한다.
뭇 인생들은 누구나 행복을 꿈꾸나 하나님 없는 행복은 재앙으로 귀결되는 것이 자명하다.
요즘 한국은 행복 병에 걸린듯하다.
새로 들어선 정부는 국민행복시대를 호언하여 출발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행복은 요원해 보인다.
철학자 탁석산씨가 쓴 '행복스트레스'라는 책이 있다.
그 책에서는 사람들, 특히 한국사람들이 앓고 있는 행복증후군이 얼마나 허상인가를 드러내고 있다.
그 책의 내용에 이런 말이 있다.
'철학자 빠스깔 브룩크너는 행복이 우리 민주주의의 유일한 지평선이 되었다고 적절하게 표현하였다. 이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만물의 척도로 작용하는 통찰력이다. 현대의 여명기를 즈음하여 대부분의 남녀들에게 하나님이 행복이었던 것에 반하여, 그 이후로는 행복이 우리 신이 되었다'
그렇다! 빠스칼의 말대로 하나님을 대신하여 행복이 현대에는 신으로 군림하고 있다.
그 바탕에 민주주의 사고, 우리 모두가 행복할 자격이 있다는 생각이 깔려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이 아닌 자기 노력으로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불행의 원인도 자신에게서 찾고, 행복 또한 자기 노력으로 찾는다.
신앙의 변질은 행복을 위해 하나님을 수단으로 삼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수단화에 결코 이용당하지 않으신다.
인간이 노력하고 수고하여 얻은 행복은 한시적이며 반드시 심판에 이른다.
그러나 영원히 인자하신 하나님은 바로 심판의 자리에 참된 행복을 주신다.
하나님 자신이 행복이 되는 영생으로 이끄신다.
4. 나의 묵상
나는 지독히도 불행한 성장과정을 안고 있었다.
그래서 누구보다 행복하게 살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 이정표는 가정행복으로 수량화되었다.
한동안 레위 부부를 화해시킨 장인의 역할을 하였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다투고 갈라진 부부를 화해시키는 역할을 다하였다.
당장의 회복이 이루어지고 새로운 소망이 생겨났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들은 다시 다투기도 하고 때론 더 큰 재앙이 임했다.
내가 바로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에 입을 다물고 잠잠하다.
사람이 만든 화해, 사람이 만든 행복이 얼마나 무상한지 깨달을 뿐이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마저 이용하려 했으나 참담하기 그지없다.
행복을 위해 질주하던 인생, 수고하고 무거운 인생을 향해 주님이 오셨다.
그리고 그런 인생들을 초대하신다. 하나님 나라로 초대하신다.
"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자여! 하나님 나라가 너희의 것임이라"(마 5:3).
마음이 살쪄 세속의 행복을 신으로 삼고 달려온 자에게 그 나라가 임하였다.
오늘도 두려운 것은 마음이 살찌는 것이다.
행복의 신은 오늘도 내게 손짓한다. 사라지고 없어질 존재물이 행복의 조건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성령의 소욕은 내게 말씀하신다. 진실로 행복한 자는 말씀을 즐거워하는 자이다.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언약 안에 거하는 자이다.
그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하나님의 선하신 역사이며, 행동하심이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시 1:1-3).
5. 묵상 기도
아버지여...
말씀을 떠나 언약밖에 살던 자였습니다.
스스로 행복을 찾아 나선 자요, 한 때 이루던 자였습니다.
여느 인생처럼 때로 다투고 때로 화해하고 다시 시작하곤 하였습니다.
인생의 피난처를 찾아 두리번거리며 스스로 안전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내 속의 불안과 두려움은 가시지 않았습니다.
오, 아버지...
하나님이 부재한 인생, 어찌 스스로 행복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세속의 행복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한 자가 되었을 뿐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행복이 아니라 행복을 신으로 삼은 자로 전락했습니다.
무지속의 광신이 저의 인생을 초토화시켰습니다.
행복을 구하던 인생에게 재앙이 임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된 행복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아들의 죽음과 무덤 안에 생명의 길, 참된 삶이 있었습니다.
아버지...
나의 복이 무엇입니까?
죄악의 길에서 떠나 말씀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기뻐하며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의 세력은 다른 것에서 기쁨을 찾으라고 합니다.
허탄하기 그지없는 감각적인 즐거움, 육체적인 기쁨을 따르게 합니다.
영혼의 기쁨이 없는 육체의 기쁨은 기만입니다.
오, 주여! 종을 불쌍히 여기소서. 나의 피난처 당신의 품이옵니다.
그 안에서 숨 쉬며 안식하며 기뻐하나이다. 할렐루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