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 이름만 들어도 떨리는 이름"

교회일반
목회·신학
오상아 기자
saoh@cdaily.co.kr
기독교학술원, '청교도의 영성과 한국교회'주제로 제32회 월례기도회 및 발표회 가져
기독교학술원이 4일 월례 기도회 및 발표회를 열었다. 왼쪽부터 강경림 김영한 원종천 박사.   ©채경도 기자

기독교학술원(원장 김영한 박사) 제32회 월례기도회 및 발표회가'청교도의 영성과 한국교회'라는 주제로 4일 오후4시 서울 종로 기독교학술원 세미나실에서 개최됐다.

'영국 청교도의 영성'을 제목으로 발표한 원종천 박사(아신대)는 "534년 영국 왕 헨리 8세가 수장령을 선포하고 영국 국교회를 설립한 이후 영국은 수많은 갈등과 수난을 겪으며 한 세기를 지내야 했다"며 "영국국교회의 교회정치제도를 놓고, 성공회라 불리는 기득권층과 청교도라 불리는 개혁파 사이의 갈등 이 쉽사리 해결되지 않았다"고 전했다.

원 박사는 "청교도는 한 세기 동안의 이 복잡한 역사적 상황 가운데, 탄압을 받으면서도 뜻을 굽히지 않고 교회 개혁을 외치며 성도들의 신실한 신앙을 함양하고자 부단한 노력을 기울인 자들"이라며 "당시 역사적 상황이 만들어낸 역경 가운데 나름대로의 독특한 청교도 영성을 형성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그 기간 ▲반체제운동▲윤리적 영성▲애정적 영성▲사회참여적 영성 등 다양하게 나타난 청교도 영성을 소개했다.

발표를 맡은 원종천 아신대 박사   ©채경도 기자

원 박사는 "1569년 청교도들이 교회정치제도 개혁을 제안하며 청교도 운동의 본격적 시작을 알렸다"며 "많은 분들이 이 운동을 정치운동으로 생각하는데 사실은 신앙을 위한 것이었다. 청교도 성직자들은 영국교회의 교회정치제도만큼은 시정되어야 실질적인 교회개혁이 이루어져 성도들의 영적 윤리적 개혁이 가능하리라고 보았다"고 전했다

그는 "청교도 운동의 실질적 출발이었던 이 교회정치제도 개혁운동을 점화한 이는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였던 토마스 카트라이트(Thomas Cartwright,1535-1603)로, 그가 주장한 교회정치 이론은 장로교주의로 영국교회의 감독제도에 대한 반발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청교도들은 1580년대 중반까지 장로교운동을 계속했으나 엘리자베스 여왕과 존 위프기프트 감독의 강한 반발 앞에 역부족이었다"며 그러면서 "1580년대 청교도 운동의 형태가 영적 설교, 개인윤리의 촉구,가족종교 등으로 전환됐다'고 전했다.

원종천 박사는 1607년 성공회 감독 토마스 로저스가 1580년 말과 1590년 초를 회고하면서 "이 사람들은 패배하였으나 죽지 않았고 저 구석에 후퇴하여 있더니 새로운 방법으로 우리들을 공격하기 시작했으며 그 반격은 평신도들을 목표로 쏟아 부은 수많은 책들이었다고 말했다"고도 소개했다.

원 박사는 그들이 특히 주일성수 강조, 가족들의 거룩한 삶과 가장의 권위 있는 영적 다스림을 중요하게 여겼다며 "가족의 가장인 경건한 아버지에 의하여 다스려지는 가정은 '어리석은 개들과 삯꾼들에 의하여 다스려지는 교구'의 최소한의 보충 내지는 대안이 되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1590년부터 엘리자베스 여왕이 죽은 1603년까지, 그 뒤인 30년 동안 청교도 운동은 중요한 변화를 경험했다"며 "청교도들에게 개인적 영성은 개혁을 이루는 길이었다"고 보았다.

이어 1640년대 영국에서 시민전쟁이 일어나기 전 청교도 영성은 윤리적 행실을 강조하는 것에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통한 사랑의 체험을 강조한 애정적 영성으로 전환됐다. 이는 17세기 전반에서 시작해 1640년대 시민전쟁 시기를 거쳐 중반 이후까지 나타난다.

원 박사는 "이와 같은 강조점의 전환은 1640년대 시민전쟁을 향해 급속도로 치닫고 있던 영국 청교도들이 겪던 상황적 어려움과 심리적 불안에 그 직접적인 원인이 있었다"며 "전쟁을 예고하는 사회정치적 혼란과 불안에 이어 드디어 전쟁이 터진 상황에서 영국국교회는 당시 국민들에게 적당한 해독제를 줄 수 없었다"고도 전했다.

기독교학술원의 월례기도회 및 발표회가 열리고 있다.   ©채경도 기자

그는 "청교도 지도자들의 경건한 영적 설교,상담,개인적 방문을 통한 목회적 영적 보살핌이 실제적인 도움이 되었다"며 "청교도 지도자 리차드 십스는 당시의 고된 삶에며 비롯되는 특별한 필요를 발견했다. 십스는 우리 삶의 슬픔이 주도적인 사랑으로 우리를 먼저 감동케 하신 그리스도를 향한 애정으로 가려지고 평정된다고 가르쳤다"고 전했다.

그러다 1640년대에 들어서며 영국 청교도 운동의 양상은 사회참여 영성으로 변화돼 나타났다고 원 박사는 전하며 "1640년대에 들어서면서 의회파와 왕당파 사이에 본격적인 무력충돌은 불가피하게 되었다"고 전했다.

그는 "청교도들이 하나님과 영국 사이에 맺은 사회언약을 강조하며 부패한 영국국교회와 영국 왕정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회개와 개혁을 촉구하였다"고 했다. 이후 전쟁은 청교도가 후원하던 의회파의 승리로 막을 내리고 왕정과 영국국교회의 감독제도는 무너지고 장로교 교회정치제도가 국가법으로 통과됐다. 

원종천 박사는 "한 세기를 걸쳐서 진행된 청교도 운동이,비록 정권을 장악한 후 약 20년 동안(1640-1662) 미숙한 현실정치와 분열로 많은 실패로 막을 내렸지만 그 후예들에게 많은 영적 교훈과 전통을 남겼다"며 "우리 신앙의 자세와 삶의 모습을 비교해 보아야 겠다"고 전했다.

신촌성결교회 이정익 목사가 설교를 전하고 있다.   ©채경도 기자

앞서 이날 기도회에서 '복음의 진수(요 14:6)'라는 제목으로 메세지를 전한 신촌성결교회 이정익 목사는 ""청교도란 말은 듣기만 해도 가슴이 뛴다"며 "(이들은) 복음과 예수가 '길'이란 것을 전하는데 목숨을 바쳤던 사람들"이라고 전했다. 

그는 "청교도는 중세 가톨릭의 잔재가 가득했던 영국 국교회 와 함께 할 수 없다고 핍박을 각오하고 항거한 이들"로 "변화, 개혁을 원했고 자기 자신에게 엄격했다"며 "복음에서 사람들이 이탈되는 이 시대 요구되는 것 또한 변화와 갱신,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이다"고 했다.

이 목사는 또 "일반인에게 성경이 소외되던 시대에 그것이 아님을 강조하며 진리의 최고 권위를 성경에 두고 성경 원문을 소중히 여기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이 있음을 강조했다"고 덧붙였다.

이 목사는 "이 모임을 통해 변화의 물줄기가 한국교회에 도도히 흘러가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했다.

이날 개회사를 전한 김영한 박사는 '청교도의 영성의 특징'을 주제로 ▲하나님 나라를 대망하는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사는 사람들 ▲언약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 ▲하나님을 묵상하는 사람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실천하는 사람들 ▲윤리적 도덕적으로 성결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 ▲주일과 가정을 엄수한 사람들 ▲세상 안에서 하나님 영광을 위한 삶을 사는 사람들으로 정리했다.

#기독교학술원 #원종천박사 #월례회 #김영한박사님

지금 인기 많은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