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의 말씀 : 삿 10:10-18
2. 시작 기도
아버지여! 당신께 향하는 나의 마음은 정함이 없으며 그 언약에 성실하지 않나이다(시 78:37).
마르고 메마른 땅에서 주를 시험하며, 탐욕대로 음식을 구하는 자가 바로 이 종이옵니다.
하여 주께서는 나의 날들을 헛되이 보내게 하시며 두려움으로 보내게 하시나이다.
오, 아버지여!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인생,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바람 같은 자를 불쌍히 여기소서.
거듭 거듭 반항하여 주를 슬프시게 한 자를 긍휼히 여기소서.
오직 하나님은 긍휼하심으로 보혈로 내 죄악을 덮어 진멸하지 아나하시나이다.
이 새벽,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내 육체와 영혼을 소생시키시니 나의 나된 것은 오직 주의 은혜이옵니다.
말씀 앞으로 이끄시는 이 은혜가 한량이 없나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3. 본문 주해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 앞에 다시 악을 행하였다.
이들은 말씀에 순종하는 쉐마를 저버리고 이방나라의 신들을 섬겼다.
그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에게 임하였는데, 그들이 신으로 섬긴 나라들로 인해 고통을 당한다.
언약 백성이 하나님 섬기기를 저버리고 하나님 대신 섬기는 그것이 그들에게 고통을 가져온 것이다.
이스라엘은 괴로움이 심해질 때 여호와께 부르짖어 아뢴다.
그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들을 섬김으로 주께 범죄하였다고 자복한다(10절).
그런데 이제까지 그들이 고통 중에 부르짖으면 즉시 응답하시던 하나님이 그들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신다(13절).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굽, 아모리, 암몬, 블레셋, 시돈, 아말렉, 마온 사람들로부터 구원하셨다(11-12절).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이 건져내신 바로 그 나라의 신들을 섬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이 지금 섬기고 있는 신들에게 부르짖어 고통에서 건짐 받으라고 하신다(14절).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하나님께 부르짖는다(15절).
자신들의 죄를 자복하고 주께서 보시기에 좋을 대로 행하시되 다른 신들이 아닌 오직 주께 구한다(15절).
그리고 그들 가운데 있는 이방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를 섬긴다(16절).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괴로움 가운데 있는 것을 보시고 마음아파 하신다.
그 때에 암몬 사람들은 길르앗에 진을 치고 이스라엘 자손은 모여 미스바에 진을 친다(17절).
길르앗 백성의 지도자들이 말하되 누구든지 암몬 사람과 싸움을 시작한 자가 자기들의 지도자가 될 것이라고 한다(18절).
성경에서 길르앗은 크게 두 곳을 가리키는데 요단 동편과 서편에 각각 위치하고 있다.
요단동편의 길르앗은 베냐민 지파의 땅에 속하며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7.5km 떨어져 있다.
이곳은 사무엘 시대 이스라엘이 금식하며 회개하여 블레셋과 싸움에서 승리한 장소이다(삼상 7:5-11).
한편 본장(10장)에 나오는 미스바는 요단서편의 갓지파와 므낫세 반지파에 속한다.
이곳은 '길르앗의 미스바'로도 불리며(삿 11:29), 야곱을 추격한 라반이 돌무더기를 쌓고 언약한 곳으로 갈르엣이라고도 하였다(창 31:48-49; 또 미스바라 하였으니).
사사기는 '범죄→고통→부르짖음→구원받음'이라는 '부르짖음의 공식'이 반복된다.
이스라엘 백성은 비록 범죄하였으나 위기 중에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즉시 응답하신다.
그러나 사사기 후반으로 갈수록 부르짖음의 공식은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고통 중에 부르짖으나 즉시 구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이들에게 행하신 구원에도 불구하고 다시 하나님을 저버린 이들을 외면하신다.
하나님을 떠나 그들이 섬긴 신들에게 가서 부르짖고 구원받으라고 하신다.
이때 이스라엘은 다시 죄를 자백하고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받아들인다.
다만 다른 신들에게 구하지 아니하며 '오직 주께' 구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그들 중에 있는 모든 이방신들을 제하여 버린다.
그러자 하나님이 그들을 괴로움을 보시고 마음에 근심하신다.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은 크게 두 가지 사명을 성취해야 한다.
하나는 말씀에 순종하는 언약공동체를 이루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 속한 세계만민에게 제사장 나라가 되어 그들을 구원하는 사명이다.
그래서 이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시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이 사명을 망실(忘失)하고 도리어 그들이 구원받은 이방 나라의 신들을 섬겼다.
신앙생활에서 중립지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말씀을 버리고 하나님을 버리면 언제든지 이전에 믿었던 다른 신들을 섬긴다.
이스라엘의 회개는 단지 죄를 뉘우치는 자리에 머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사명의 자리로 돌아가야 할 때 온전해진다.
사사시대 이스라엘은 신약시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그림자이다.
모세와 여호수아가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의 지도자가 되었듯이, 영원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는 믿는 자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하나님 나라로 이끄셨다.
믿는 우리 역시 두 가지 사명을 수행한다.
하나는 날마다 생명의 말씀으로 사는 영생의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영생의 도를 전하여 그들도 역시 영생의 공동체 안에 들어오게 하는 것이다(요일 1:1-4).
그런데 이 같은 본질적 사명을 망실하면 언제든지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고 만다.
만물 안의 신앙에서 구원받았을지라도 다시 만물 안에 갇힌 신앙으로 돌아간다.
상황해결, 문제해결, 체험적 신앙, 삶의 질의 고양으로 회귀하고 만다.
영생의 사귐에 꾸준히 자신을 드리지 아니하면 다시 이전의 신앙모습으로 돌아간다.
바울 사도는 복음을 알고 영생의 도를 안후 이전의 신앙생활을 모두 배설물로 여겼다.
그리스도를 아는 고상한 지식으로 인해 이전에 열심을 내고 자랑하던 모든 신앙생활을 해로 여긴 것이다(빌 3:8).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하기만을 구하였다(빌 3:10).
영생의 진리는 아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육체에 속한 모든 것들을 해로 여기며, 나아가 날마다 말씀 앞에 자신을 드리는 것이다.
진리의 영, 성령께서는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시고 이끄신다.
4. 나의 묵상
하나님께서는 나를 어디로부터 구원하셨는가?
그 구원의 목적에 합한 삶을 살지 않으면 나는 언제든지 구원받기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나는 육신에 속한 자기주장 의지로 하나님을 신앙하는 자였다.
전통과 유산에 고착되어 만물 안에 갇힌 신앙생활에 몰두하였다.
신앙의 목적은 고작 땅의 일을 구하는 것이요 그것을 부요케하는 것이었다.
보란 듯한 삶이 신앙의 증거였고, 그로인해 뭇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려 한 무지한 자였다.
하나님은 그런 나를 심판하시고 영생의 진리를 알게 하셨다.
날마다 말씀으로 살며, 영생의 도를 전하게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시로 이전의 삶과 신앙생활로 돌아가려는 유혹을 받는다.
아직도 해로 여기지 않고 배설물로 여기지 않는 내 모습 앞에 경악한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이 거기로부터 구원해내셨는데 다시 그것들을 섬기니 말이다.
영생의 공동체가 답보상태에 있다. 하여 유혹은 거세다.
어떤 이들은 익숙하고 편안한 신앙생활, 다수가 따르며 적당히 믿는 자리로 돌아간다.
말씀 앞에 죄악을 드러내도 아침마다 징계를 받고 종일 재앙을 받는 것이 부질없어 보인다.
영생의 삶을 떠나게 하는 유혹에는 정당성이 부여되고 합리성이 가미된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협착하며 찾는 이가 심히 적다.
이 새벽, 어제 나눔 중에 있었던 어느 집사님의 고백이 내 영혼을 깨운다.
언제든지 하나님이 거기로부터 구원해내신 이전의 신앙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음을 애통해하는 고백이었다.
그의 고백은 다름 아닌 나의 고백이다.
다시 야곱의 우물로 돌아가려는 나를 십자가에 못박는다.
영생의 사귐을 떠나지 않는다. 주가 주신 기쁨 외에 기뻐할 것이 무엇인가!
복과 영생 예수니, 더 원할 것은 없다!
5. 묵상 기도
아버지여...
이 비참한 종을 불쌍히 여기소서.
엄중한 심판을 통해 야곱의 우물에서 건져내시고 영생에 이르게 하셨나이다.
하오나 눈에 보이는 증거가 취약하니 다시 그리로 돌아가려 하나이다.
주께서 구원해내신 바로 그리로 돌아가고자 하는 자가 누구이옵니까?
개가 토했던 것을 다시 먹으며 돼지가 더러운 구덩이로 다시 눕는 자가 되나이다.
오, 아버지...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려는 자를 불쌍히 여기소서.
아들의 죽음으로 주신 영원한 생명을 멸시하는 자가 될까 두렵습니다.
안개와 같은 인생, 바람같이 다시 돌아오지 못할 인생이 아니옵니까?
무엇이 미련이 있어 쟁기를 잡고 다시 뒤를 돌아보나이까?
주여, 나를 치심은 내 영혼을 깨우시기 위함이옵니다.
아버지...
육체에 속한 모든 신앙생활을 해로 여기나이다.
영생의 사귐에 비하면 배설물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날마다 아들의 죽음 안에 거하게 하소서.
한계상황의 절정에서 경험하는 부활의 능력을 알게 하소서.
나를 사로잡아 만물 위로 이끄소서. 이를 위해 기꺼이 주의 고난에 참여하나이다.
주여, 영생의 사귐에서 떠나지 않게 하소서. 영생의 가족들을 지켜주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