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를 위한 주해묵상] 혼돈을 품고 계신 '창조주 하나님'

본문 창세기 1:1-13

1. 오늘의 말씀 : 창 1:1-13

2. 시작 기도

아버지! 새 해 새 날을 주신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당신의 시간 안에서 주관하시는 인간의 시간은 당신이 보시기에 참 좋습니다.
하오나 인간의 시간 안에 머무는 종은 질그릇 같이 연약하며 죄악된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이 내게 걸림돌이 되며 무엇이 내게 짐이 되나이까?
어찌하여 당신 앞에 나아가기까지 이리도 험난한 싸움을 해야 합니까?
이는 내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인한 것입니다.
오, 주여! 오늘도 나를 십자가에 못박아주소서. 정과 욕심을 못박으소서.
당신께로 가는 종을 불쌍히 여기소서.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땅을 품듯 품어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3. 본문 주해

창세기는 성경의 처음 시작이다.
이는 그 자체로 독립된 책이 아니라 모세오경에 포함되어 있고, 오경의 서론역할을 한다.
창세기에서 시작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역사적 묘사는 출애굽기를 거쳐 레위기, 민수기까지 이어진다.
그것은 다시 신명기에서 종합적으로 재정리되며 여호수아에서 완성된다.

통상 여호수아를 포함한 육경(六經)의 근본주제는 다음과 같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그의 후손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번성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 백성을 은혜로 구원하셨고 광야로 인도하셨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대로 그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하셨다'

상기한 육경의 주제는 장차 오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곧 하나님이 행하신 이스라엘의 구원역사는 궁극적으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대로(창 12:3), 모든 민족과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의지를 표상한다.
그러므로 육경(또는 오경)의 서론 격에 해당하는 창세기는 그 자체로 해석될 수 있는 독립적인 책이 아닌 것이다(폰 라드, 창세기 주석).

이 점에서 창세기는 당시 메소포타미아의 창조설화를 반영한 것도 아니고 과학적 우주관을 제시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언약 백성 이스라엘이 출애굽과 시내산 언약에서 만나고 경험했던 하나님이 창조의 신(엘로힘)이요, 언약의 하나님(여호와)임을 선포하는 신앙고백이다.

창세기를 비롯한 오경의 저자는 모세로 통칭한다.
이것은 극단적인 유대전통에서 말하듯 모세가 하나님께 직접 받아 기록했다는 뜻이 아니다.
이 같은 주장은 대표적으로 신명기 34장(모세가 죽은 후에 일어난 일)과 모순된다.
하무라비 법전을 하무라비가 직접 만들지 않았고 한글도 세종대왕이 직접 만들지 않았다.
1611년 번역된 킹 제임스 버전도 영국의 제임스 국왕이 직접 번역하지 않았음은 자명하다.
오경이 모세의 저작이라는 것은 그가 이스라엘의 국부(國父)요 율법의 중재자라는 의미를 가진다.

모세의 활동 시기는 출애굽및 광야의 시대였다.
이 시기가 직접적으로 언표된 곳은 솔로몬 왕이 즉위한지 4년째 되는 해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지 사백팔십 년이요 솔로몬이 이스라엘 왕이 된 지 사 년 시브월 곧 둘째 달에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성전 건축하기를 시작하였더라"(왕상 6:1).
솔로몬이 왕이 된 때가 BC 966년이므로, 출애굽은 그로부터 480년전, 곧 1446년이다.
광야에서 40년을 방황했으므로 이스라엘의 가나안 입성은 BC 1406년으로 추산한다.

물론 모세 시대에서 글이 있었으나 이스라엘 역사와 모세의 설교가 언제 기록되었는지 알 수 없다.
다윗의 시대(BC 1010-970년), 자료들이 문서로 기록되기 시작하였고 본격적으로는 솔로몬 시대 이후에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가 문서로 기록되었다.
한편 모세 오경이 오늘의 형태로 기록된 것은 그보다 훨씬 이후의 일이다.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후 에스라를 위시한 유대 랍비들이 파편화된 경전을 수집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BC400년경 모세오경이 오늘의 형태로 형성되었다.

창세기의 내용은 대부분 족장의 역사이다(창 12-50장).
그 직전 '1-11장'은 소위 원시역사로 불리며 이스라엘의 구원사의 서론으로 볼 수 있다.
즉 이스라엘의 구원과 인류구원에로 이어지는 전 인류의 구원사를 위하여 아브라함이 부름받게 된 배경을 다루고 있다.
창세기의 창조 신앙은 결국 아브라함의 소명과 이스라엘의 언약을 필연적으로 내다보고 있다.
곧 '1-11장'의 창조, 타락, 원시 구원사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통해 만민이 구원을 받은 '내력'을 다루고 있다.

이 점에서 창세기의 핵심 키워드(언어)는 '내력'(account)이다(창 2:4; 5:1).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본에서는 창세기를 '제너시스'(헬, 내력 또는 기원)으로 번역하였다.
영어성경은 이를 반영하여 창세기를 '제너시스'(genesis)로 표기하였다.

창세기의 바른 이해와 묵상, 해석은 이스라엘의 구원이 지향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기초한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가져온 언약에 참여하는 이들에 의해 해석된다.
그것은 하나님이 누구이신가, 그가 무엇을 하셨는가, 그 하나님이 오늘 현재 내게 어떤 의미와 현실이 되는가를 묻는 것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만물 위, 영원의 하나님이 인간의 시간, 만물 안으로 들어오셨다.
그가 만물, 곧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이로써 창조주 하나님과 만물(피조물)은 완전히 구분된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의 시작이시며 창조주와 피조물은 절대적 차원의 차이로 실재한다.

창조된 것이 창조주로 신격화되지 못하며 창조주가 피조물로 물상화되지 못한다.
곧 어떤 경우에도 창조주 하나님을 피조물처럼 형상화해서 안되는 것이다.
현대의 뉴에이지 사상은 보이지 않는 만물을 신적인 것으로 고양한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세속적인 것을 신성화하는 위험을 야기시킨다.

기독교는 창조주와 피조물, 존재이신 하나님과 존재물인 피조물을 철저히 구분한다.
이것은 진정한 이원론으로 이것을 부정하는 것이 근본적인 죄가 된다(리처드 마우, 왜곡된 진리).
우상숭배는 창조주 하나님께만 속하는 궁극성을 어떤 피조물이 가지고 있는 것처럼 취급하는데 있다.
풀의 꽃처럼 마르고 떨어지는 존재물을 영원한 것처럼 생각하여 집착하는 것, 그러면서 창조주 하나님을 망실하는 것이 우상숭배인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창조주는 창조주이시다.
피조물은 피조물이다. 존재물은 존재물일 뿐이다.
너무도 명백한 주장이나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인간은 이것을 똑바로 인식하지 못한다.
이것이 인간을 불행으로 사망으로 몰고 가는 '근본적인 혼동'이다.

하나님의 창조는 '무'로부터의 창조이다.
'창조하다'의 히브리어 '바라'는 오직 신적인 행동에 쓰이는 단어이다.
인간은 결코 무에서 유를 만드는 창조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만물을 새롭게 하는 창조의 역사에 동참하지 못한다.
만일 그런 일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위로부터 주어지는 은혜이다(고후 5:17).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땅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깊음 위에 있다(2절).
하나님이 창조하신 땅은 아직 혼돈과 공허와 흑암에 직면해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이 수면에서 운행하고 계신다(2절).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혼돈을 상징하는 '물'로 둘러싸여 있다.
'운행하다'는 히브리어는 날짐승이 알을 품고 있는 뜻이다.
하나님의 창조의 영이 암탉이 알을 품고 있듯이 혼돈의 물을 품고 계신다.
그 어느 것도, 설령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땅이라도 하나님의 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행위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땅에 역사한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다(3절).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으며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셨다(4절).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다(5절).
이 빛은 제 4일째 창조된 광명체(해, 달, 별)와 구별된다.
하나님은 빛과 어둠으로 우주의 질서를 세우신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사 45:7).

하나님은 물을 위와 아래로 나누시고 그 중간을 궁창(하늘, sky)이라 부르셨다(6-8절).
아래의 물을 한 곳으로 모으고 바다라 부르시고 나머지 뭍을 땅이라고 부르셨다(9-10절).
땅이 풀과 씨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를 각기 종류대로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으셨다(11-12절).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셋째 날이 되었다(13절).

4. 나의 묵상

새해 첫날, 언약 안에서 창세기를 묵상하니 심령이 뜨거워진다.
이스라엘이 언약 안에서 창조의 신앙을 고백했듯이 나 또한 언약 안에서 창조 신앙을 고백한다.
아들을 통해 생명을 주시고 성실하심으로 찾아오신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이시다.

그는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땅이 혼돈과 공허와 흑암 중에 있어도 그 분의 품에 있다.
나의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은 무에서 만물을 만들어내신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다(골 1:16).
만물의 주인이 나의 아버지요, 그 분 안에 만물이 예속된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가?
나는 여전히 땅에 거하며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세력에 시달린다.
아침 일찍 말씀 앞에 나왔으나 내가 헤아릴 수 없고 근거를 알수 없는 혼돈, 공허, 흑암이 나를 사로잡아간다.
몸도 피곤하고 영혼도 곤비한 채, 한해를 맞이한다.
나를 방치하니 불안은 고조되고 두려움을 커지며 내 영혼은 흑암에 빠져든다.

만물이 나를 위협한다. 피조물이 나를 사로잡아간다.
쏟아지는 뉴스를 대하며 만물 안에 갇힌 인간의 결핍, 고통을 직면한다.
나는 어느새 그들과 함께 하며 비진리의 외침에 귀 기울인다.
세속적인 것이 신적인 것이 되려는 세상에서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욥이 저 티끌과 재가운데에서 창조의 신비를 보았다.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초월의 지혜와 능력이다.
그 지혜와 능력이 십자가에 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에게 있다.
그를 떠나서, 그의 십자가에서 내려와서 감당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올 한해,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기다리고 있다.
오직 초월의 하나님, 창조의 하나님, 그 안에서만 감당한다.
넉넉히 감당한다. 그 무엇도 끊을 수 없는 사랑으로 말이다.

아들 안에 있는 아버지 사랑...
그 사랑이 내게 부어지니 내 안에 말할 수 없는 평강이 임한다.
온전한 사랑이 내게 임하니 모든 두려움이 사라진다.
혼돈과 공허, 흑암에 처했을지라도 아버지 품에 거하는 것을 확정한다.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신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이시다.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신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이시다.
내 인생 가운데에서 모든 것을 행하시는 아버지께 엎드린다.
모든 상황 가운데에서 내게 자비를 베푸소서! 긍휼을 베푸소서!

5. 묵상 기도

아버지...
혼돈과 공허, 흑암이 내게 밀려옵니다.
하오나 이것 또한 당신의 품 안에 거함을 믿나이다.
만물에 속한 그 무엇이 당신의 품에서 벗어날 수 있나이까!
아들을 통해서 언약을 세우시고 그 언약 안에 머무나이다.
하여, 나의 아버지는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아버지입니다.

아버지여...
나로 당신의 품에 있게 하소서.
피조물, 존재물, 만물보다 이것을 허락하신 당신의 품을 사모합니다.
빛도 지으시고 어둠도 창조하신 이가 평안도 환난도 창조하시나이다.
내 안에서 행하소서! 모든 상황에서 당신의 뜻을 이루소서.
당신이 지으신 만물에 지배당하지 않게 하시고, 그것을 지으신 당신께 복종하게 하소서.
내게 당하는 상황보다 그 상황을 주신 당신을 보게 하소서.

아버지여...
이 땅이 혼돈과 공허와 흑암 가운데 있나이다.
하오나 당신이 사랑하사 지으신 세상입니다.
당신이 여전히 품에 안고 계시는 세상입니다.
올 한 해 어찌 살지, 세상을 향해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게 하소서.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창조의 역사가 이 땅에 임하게 하소서.
빛을 발하소서! 내 안에 있는 생명을 밝히소서.
저들을 당신의 품으로 인도하는 한 해 되게 하소서.
주께서 허락하시면 이 일을 행하겠나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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