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의 말씀 : 삿 7:9-18
2. 시작 기도
아버지여! 내 육체는 고단하나 내 영혼은 오직 주를 갈망하나이다.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는 세태에서 소수를 따라 진리를 행하는 것이 시련이옵니다.
신실한 의인이라도 말씀을 업신여기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고 맙니다(삼하 12:9).
오, 주여! 어찌 하루라도 말씀을 떠나 살수 있사오리이까?
곤고한 몸과 마음, 이대로 말씀 앞에 가오니, 보혈로 정케 하사 진리의 영으로 이끄소서.
젖 뗀 아이가 어미 품에 있음같이 내 영혼 고요하고 평온하여 주를 바라나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3. 본문 주해
이스라엘을 치러 온 미디안의 군대는 135,000명이다(8:10).
이들과 맞서 싸울 기드온의 군대는 최후로 300명이 선택되었다.
이는 전쟁에서 승리해도 자신들에게는 어떤 영광도 돌릴 수 없는 미약한 자들이다(7:2).
기드온과 미디안의 군대 비율은 '1:450'로서 엘리야 한 사람과 바알 선지자 450명과의 비율과 같다(왕상 18:22).
기드온의 300용사가 정해진 그 날 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명령하신다(9절).
일어나 내려가서 미디안의 진을 공격하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물리치도록 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만일 내려가는 것이 두려우면 먼저 그의 부하 부라를 데리고 미디안의 진으로 내려가 정탐하라고 하신다(10절).
그들이 미디안의 진 가운데 있는 군사들의 말을 들으면 용기를 얻을 것이다(11절).
기드온이 부라를 데리고 미디안의 진을 친 골짜기로 내려갔다.
미디안과 동맹군들이 골짜기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마치 메뚜기 떼와 같았다.
그들이 가진 낙타도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셀 수 없이 많았다(12절).
기드온과 부라가 적진으로 내려왔을 때 어떤 사람이 친구에게 자기가 꾼 꿈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꿈에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 진영으로 들어와 장막을 쳤는데 그것이 얼마나 세게 쳤는지 장막이 무너져 납작하게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13절).
그러자 친구가 그 꿈을 해몽하기를, 보리떡 한 덩어리는 기드온의 칼이고 그로 인해 하나님이 미디안과 그 모든 진영을 그의 손에 넘겨주신다고 말한다(14절).
기드온이 그 꿈과 해몽을 듣고 하나님께 경배하고 자기 진으로 돌아왔다(15절).
그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일어나라고 하며, 여호와께서 미디안과 그의 진영을 그들에게 넘겨주셨다고 말한다(15절).
그리고 삼백 명을 세 무리로 나누고 각 사람에게 나팔과 빈 항아리를 나누어주었는데, 항아리 속에는 횃불이 들어있었다(16절).
그리고 명하기를 자기만 보고 자기가 하는 대로 따라 행하라고 말한다(17절).
그가 적진의 가장자리에 이르면 그와 그의 주변 사람들이 나팔을 불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모두 나팔을 불고 '여호와를 위하라, 기드온을 위하라'고 외칠 것이다(18절).
기드온의 군사 삼백 명은 나팔과 빈 항아리와 횃불로 무장했다.
반면 미디안과 동맹군은 십삼만 명의 군사에 낙타만 해도 바다의 모래처럼 셀 수 없이 많다.
누가 보아도 이스라엘의 패배는 자명하다.
그러나 이 전쟁은 여호와께서 자신의 방식으로 치르시는 거룩한 전쟁이다.
여호와께서는 전황을 두려워하는 기드온에게 미디안의 진을 정탐하라고 한다.
그와 그의 부하가 적진에 들어갔고 거기서 두 군사로부터 꿈과 그 해몽을 듣는다.
구약성경에서 꿈은 요셉이나 바로의 꿈처럼 종종 하나님의 계시의 방식이다.
미디안의 군사가 꾼 꿈 역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승리하게 하신다는 계시이다.
계시의 주체는 하나님이시고 기드온은 그로 인해 양털시험이 이어 다시 한 번 전쟁의 승리 확신한다.
꿈의 내용은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의 장막을 쳐부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해석은 이스라엘 군대가 미디안의 군대를 쳐서 물리친다는 것이다.
여기서 보리떡 한 덩어리는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성경본문은 그 크기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으나 강조점은 극히 미약한 것(삼백용사)으로 메뚜기 떼와 같이 거대한 무리를 이긴다는 것이다.
특히 알곡 형태를 지닌 보리는 농경과 정착 상태, 또는 이스라엘이 그에 상응하는 상태에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반면 보리떡 한 덩어리가 쳐서 무너뜨리는 미디안의 장막(천막)은 유목생활에 대한 전형적인 증거이다.
곧 보리는 정착민을, 장막은 유목민을 상징하는 표상이다.
따라서 보리와 장막의 대조는 가인(유목민)과 아벨(정착민), 에서(유목민)와 야곱(정착민)의 대조를 반복하며 그들의 경우처럼 정착민(아벨, 야곱)의 궁극적 승리를 언표한다(창 4장, 27장).
정착민 이스라엘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형성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예표한다.
그와 대조되는 유목민은 그리스도 밖의 세상 사람들, 나그네와 같이 유리방황하는 모든 인생들을 표상한다(창 4:12; 안식 없는 방랑자).
인간에서 궁극적인 정착지는 어디인가?
그곳은 인간이 거기에서 왔고 거기로 돌아가는 곳, 영원이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영원을 알지 못하며 솔로몬의 고백처럼 다만 사모할 뿐이다(전 3:11).
오직 한 분 그곳에서 오시고 그곳으로 가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아신다.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거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요 8:16).
예수 그리스도는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셔서 그를 믿는 자를 영원으로 이끄신다.
그는 죽으시고 장사되시고 부활하신 후 그가 오신 곳, 영원의 아버지께로 가셨다(요 14:6).
그리고 진리의 영, 성령을 아버지께로부터 받아 믿는 자에게 주신다.
그 성령은 영원을 망실한 채 고아처럼 살던 우리를 영원의 아버지 품으로 이끄신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 14:18).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
아담 안에서 죄인 된 실존은 가인의 후손으로 살아간다.
유리하며 방황하는 유목민의 실존으로 안식 없이 살아간다.
그가 안식을 얻기 위해 정착한 땅은 '놋'(Nod)으로, 그 이름은 '방랑자'이다(창 4:16).
인간이 갈망하고 또 갈망하는 정착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들어가는 하늘의 장막, 영원인 것이다.
땅에 있는 장막 집은 언젠가 무너진다(고후 5:1).
그러나 영생을 얻은 자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있다(고후 5:1).
땅에 있는 장막에 머물 때 우리는 짐 진 것 같이 탄식한다.
그러나 우리의 탄식은 그 짐을 벗고자 함이 아니라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다.
영생의 삶이 땅의 장막을 삼키며 그 짐을 넉넉히 감당한다(고후 5:4).
보리떡 한 덩어리가 거대한 미디안의 장막을 쳐서 무너뜨리듯이 말이다.
4. 나의 묵상
나는 50여 평생을 안식 없는 방랑자로 살았다.
영적인 유목민이 되어 유리방황하며 안식할 곳을 찾았다.
힘겨운 학창시절을 지내고 안식을 얻고자 은행에 들어갔다.
첫발을 내디뎠을 때에는 환희가 밀려왔으나 이내 안식을 잃고 말았다.
더 나은 인생을 얻고자 주경야독하며 공부에 전념하였다.
은행 일에 있어서도 동료들보다 두드러진 성과를 내며 득세하였다.
그러나 유리방황하는 유목민의 삶은 여전하였다.
더 나는 지위를 얻기 위해 당시 최상의 인기를 구가하던 증권회사로 전직하였다.
처음 한 달 역시 짜릿하였다. 상승된 신분, 갑절의 보수로 흥분하였다.
그러나 1년도 채 안되며 죄악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었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신앙생활에 열심을 내게 되었다.
여러 가지 은사를 받고 체험을 하고 열정이 생기면서 신대원을 들어갔다.
열심이 특심이라 그곳에서도 주목을 받으며 장래가 촉망되는 목회자가 되었다.
전도사 시절을 지나고 교회를 개척하고 많은 사역들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영혼의 방황은 그치지 않았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 할수록 깊은 층의 목마름은 더해졌다.
아, 나는 여전히 유리방황하는 유목민이었던 것이다.
평생 악이 가득하여 미친 마음을 품다가 멸망을 향해 가는 인생!!(전 9:3).
영원한 처소 영원에 무지하다면 누가 그 일을 피할 수 있으랴!
그가 설령 유명한 목사가 되어 대형교회를 세우더라도 말이다.
어제도 어느 대형교회의 고발사건이 뉴스에 나왔다.
수년 동안 거대한 성전(?)을 지으면서 건축헌금도 모자라 성도들의 집을 담보로 수십억을 빌렸다고 한다.
어느 성도는 인터뷰에서 '목사님이 석 달만 쓰자'고 해서 집을 담보로 내어주었다는 것이다.
피해를 본 성도들이 교회를 상대로 고발을 한 것이다.
빚더미의 교회에도 불구하고 목사는 30억 원을 은퇴금으로 요구하고 해외선교를 계속하고 있다고 하였다.
신약시대 어찌 건물을 성전이라고 왜곡하며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무고한 성도들을 무자비하게 갈취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는 감히 설교시간에 교회를 고발한 성도들을 도둑으로 취급을 하며 명단을 발표하겠다는등 후안무치의 행동을 하고 있다.
교회마저도 맘몬 신에 놀아나 미쳐 돌아가는 현실 앞에서 먹먹할 뿐이다.
나 또한 한 때 저런 목사, 저런 교회를 꿈꾸지 않았던가?
그것으로 인해 유목민의 방랑을 그치고 싶어 하지 않았던가?
배운 대로 행한다고 나 역시 그렇게 배웠고 그것이 목회 성공인줄 알았다.
영원히 멸망당할 길로 가던 내게 자비를 베푸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죽음과 무덤으로 이끄셔서 아골 골짜기를 영생의 문으로 삼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오늘도 영생의 진리를 따르며 영생의 삶을 사는 이들은 소수이다.
그러나 그들은 영생의 삶으로 유리방황하는 유목민의 삶을 넉넉히 이긴다.
영원하지 않은 것에 자기 영혼을 팔아넘기지 아니하며 영원한 것을 위해 살아간다.
영원한 그 나라를 주시기 위해 영원하지 않는 것을 가져가신 하나님을 도리어 찬양한다.
5. 묵상 기도
아버지여...
평생을 유리방황하며 살았습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안개 속에 있었습니다.
결국 땅의 장막을 영원한 것으로 알고 거기서 안정과 부를 누리고자 하였나이다.
한때는 득세하였으니 취할수록 목이 말랐습니다.
오, 아버지...
평생 악이 가득하여 미친 마음을 품다가 멸망을 향해 가는 자...
당신이 베푸신 자비와 긍휼이 실로 무궁하나이다.
어찌하여 내게 이런 은혜를 베푸셨나이까?
결코 알 수 없는 당신의 섭리, 당신의 사랑에 눈물만이 흐르나이다.
아버지...
이 땅을 돌아보소서. 미혹당하는 당신의 종들과 백성들을 돌아보소서.
공의로운 심판은 교회와 지도자들의 악을 만방에 드러내고 있나이다.
당신은 저들이 죄악가운데 멸망당하지 않기를 원하시나이다.
죽을 자가 죽는 것도 기뻐하지 아니하시는데 어찌 저들이 죽는 것을 기뻐하시겠나이까?
오, 주여 저들의 눈에 비늘을 벗기소서.
저들을 저들의 무덤으로 이끄사, 아들의 무덤을 표적으로 주소서.
심판을 받아들이게 하시고 영생의 문으로 이끄소서.
종을 불쌍히 여김같이 저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우리를 버리지 마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