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국립극단의 '보이체크'

전시·공연

이 연극은 세상을 잿빛으로 그려낸다. 간혹 극중 고적대의 등장이나 떠들썩한 파티 장면에서 훤한 조명이 무대를 밝히는 경우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무대가 드러내는 컬러는 무거운 회색. 위압적이다.

무대는 미니멀하다.아무 장식 없이 뼈대만 갖춘 지하철의 승강장 공간 같다. 첨단 알루미늄 소재로 만들어진 것 처럼 현대적이고 깔끔하나 분위기는 차갑다. 그 안에 있으면 짓눌리고 질식할 것만 같은 공간의 느낌이다. 잿빛 세상이다.

서울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무대 위에 올려진 국립극단의 &#39;보이체크&#39;(게오르그 뷔히너 원작)는 국립극단이 초청한 폴란드 연출가 타데우시 브라데츠키(Bradecki)의 작품이다. 무대디자인 역시 폴란드의 야그나 야니츠카(Janicka)가 맡았다. 그만큼 국내에서 여러 번 만들어진 &#39;보이체크&#39;를 볼 때와는 느낌이 색다르다.

여러 특징 중 하나는 의상의 종류나 색깔을 통해 등장인물들의 사회적 지위나 특성이 확연히 드러나도록 했다는 점이다. 극중 보이체크를 괴롭히면서도 도덕 설교를 하는 소장은 흰색의 옷을 입고 있다. 푼돈을 주며 보이체크를 생체실험의 대상으로 삼는 의사의 의상은 검은색이다. 둘 다 모두 블랙타이(Black Tie)급 예복. 사회의 지배계층을 상징하는 옷이다. 보이체크를 비롯한 보통의 등장인물들은 회색의 노동자복 차림이다. 가난과 고립 속에서 분출하는 욕망을 억제하지 못하는 보이체크의 아내 마리와 그녀를 유혹한 고적대장만이 원색의 옷을 입고 있다.&nbsp;&nbsp;&nbsp;

또 하나 두드러지는 것은 &#39;지금&#39;과 &#39;여기&#39;의 당대성이 강조되었다는 점이다. 무대는 이 작품의 희곡이 만들어진 19세기나 처음 무대화가 이뤄진 20세기 초의 분위기라기보다는 지금 또는 미래의 어느 시점을 그리는 것 같다. 등장인물들의 의상, 지하철 공간 같은 텅 빈 무대, 작품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철제테이블, 단거리 이동용 리프트 같은 소품들은 당대성의 느낌을 강화하는 것들이다.

무대나 소품이 외적으로 당대성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주인공인 보이체크의 대사나 연기는 내적인 면에서 &#39;지금, 여기&#39;의 동시대적 메시지를 전달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작품 속의 보이체크가 눈에 띌 정도로 지적이고 저항성을 가진 인물로 묘사되었다는 것이다. 원작에서의 보이체크는 군대 졸병으로 이발병이며 잡역병이다. 워낙 가난해 제대로 배우지도 못했고, 결혼비용 때문에 결혼식도 못 올린 채 아기를 가졌으며, 그것 때문에 부도덕하다며 손가락질을 받는 하층민이다. 돈에 궁한 그는 온갖 천한 일을 하고, 실험대상이 되어 완두콩만 섭취하면서 오로지 아내와 아이를 위해 푼돈을 벌며 살아간다. 가끔 말 속에 성경구절을 인용하지만 자기 소리를 내는 인물은 아니다.

서상원 배우는 그러나 극의 초반부터 자주 지적인 대사와 함께 자기 소리를 내는 보이체크를 연기한다. 소장을 향해 도덕에 대해 얘기할 때도 저항적인 목소리로 자신의 주장을 편다. 훈계라도 하는 듯한 느낌이다.

◇ 연극 &#39;보이체크&#39; = 국립극단(예술감독 손진책) 제작. 19세기 독일 작가 게오르그 뷔히너가 실제 있었던 살인사건을 소재로 해서 쓰다 24세 때인 1837년 질병으로 사망할 때 미완성 상태로 남긴 작품. 그의 사후 전문가들에 의해 희곡이 마무리됐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고통스럽게 생존해 가는 이름 없는 수많은 인간들에 대한 작가의 관심과 애정을 담은 작품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가난하고, 배우지 못했고, 그래서 항상 생존의 위협을 받으면서, 범죄자가 될 수밖에 없는 하층계급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다. &#39;보이체크&#39;는 그간 국내외에서 연극, 오페라, 무용, 마임극 등 다양한 장르의 수많은 공연예술작품으로 제작됐다.

만든 사람들은 ▲연출 타데우시 브라데츠키 ▲번역 및 드라마터그 최병준 ▲디자인 야그니 야니츠카 ▲윤색 김민정 ▲조명 김창기 ▲제작감독 신용수 ▲의상협력 윤수정 ▲음악감독 피정훈 ▲분장 최은주 ▲조연출 신용한 ▲프로듀서 손신형ㆍ성용희.

출연진은 이호재(의사)ㆍ정상철(소장)ㆍ서상원(보이체크)ㆍ서주희(마리)ㆍ박완규(고적대장)ㆍ장성익(호객꾼)ㆍ이윤재(안드레스)ㆍ박성연(호객꾼)ㆍ장정학(막스)ㆍ박건우(한스)ㆍ이윤덕(토마스).최주영과 이진희(안나).
공연은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8월23일부터 9월10일까지. 공연문의는 국립극단 ☎02-3279-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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