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함없는 가장 기본적 원칙인 것입니다.
성도가 신앙생활에서 축복을 받고자 할 때에도 사실 그 방법이라는 것은 지극히 간단명료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해 주고 있는 말씀 역시 바로 그런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해 주셨던 약속은 그로 하여금 '가나안 땅'을 얻고 '큰 민족'을 이루게 해 주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로부터 4백 수십 년이 지나 이제 광야 세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입성을 앞에 두고 있던 시점에 '큰 민족'은 이미 이루어져 있었으며 '큰 땅'의 약속마저 성취되려 하고 있었습니다. 본문 마지막 절에서 모세는 "애굽에 내려간 네 열조가 겨우 칠십 인이었으나 이제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하늘의 별같이 많게 하셨느니라"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깨워 주고 있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런 후에 모세는 과연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그런 축복을 결국 받게 되었으며, 앞으로 그 축복을 계속 누리기 위해서 꼭 기억해야 할 사실이 무엇인지를 그들의 부모 세대가 저질렀던 실패를 거울삼아 가르쳐 주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이제 그 광야 세대의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이별을 앞두고 저 가나안 복지가 요단강 건너편에 보이고 있던 모압 평지에서 그들에게 고별설교를 들려주고 있던 모세로서는 정말이지 마지막으로 꼭 당부하고 싶은 내용이기도 했지만 사실상 이전부터 여러 차례 똑같은 말로 가르쳐 준 사실이기도 했습니다. 오늘 경향의 성경대학, 전도대학, 교사대학의 졸업예배를 드리게 된 이 밤에 이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졸업자 여러분과 경향의 모든 성도들이 진정 이 교회를 중심으로 앞으로 더 큰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 꼭 기억하고 지켜야 할 가장 간단하면서도 필수적인 원칙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에게 여전히 당신의 말씀을 주고 계신다는 자체가 바로 최고의 축복입니다.
1절부터 5절에 기록하기를 "1그 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너는 처음과 같은 두 돌판을 다듬어 가지고 산에 올라 내게로 나아오고 또 나무궤 하나를 만들라 2네가 깨뜨린 처음 판에 쓴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 너는 그것을 그 궤에 넣으라 하시기로 3내가 싯딤나무로 궤를 만들고 처음 것과 같은 돌판 둘을 다듬어 손에 들고 산에 오르매 4여호와께서 그 총회날에 산 위 불 가운데서 너희에게 이르신 십계명을 처음과 같이 그 판에 쓰시고 그것을 내게 주시기로 5내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와서 여호와께서 내게 명하신 대로 그 판을 내가 만든 궤에 넣었더니 지금까지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모세가 회상하고 있는 사실은 과거 출애굽 세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숭배'라는 최악의 죄를 저지르고 난 직후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 우상숭배에 참예했던 자들에 대한 엄중한 징벌이 끝난 후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다시 시내산으로 불러 올리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로 하여금 "처음과 같은 두 돌판을 다듬어" 준비하게 하고 거기에다 "십계명을 처음과 같이 그 판에 쓰셔서" 그에게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모세가 첫 십계명의 두 돌판을 받아 산에서 내려왔을 때에 그는 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 앞에서 뛰노는 장면을 보고서 대노하여 그 돌판들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려 버렸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자격조차 없을 정도로 극악무도한 죄인인 것을 나타낸 행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하나님 편에서 그 모세를 불러 십계명이 새겨진 두 돌판을 다시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하나님의 무한하신 인애와 자비를 보여 주신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그 죽어 마땅한 우상숭배의 죄를 회개하고 용서받고 다시 회복될 수 있는 길은 오직 그 돌판에 기록된 말씀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금송아지 숭배가 왜 죄가 되는지, 우상숭배가 왜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악한 행위인지를 그들이 제대로 깨닫기 위해서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만을 '신앙과 행위의 유일무이한 기준'으로 삼을 때에 가능해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런 말씀을 다시 주셨다는 사실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그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여전히 사랑하고 계신다는 증거인 동시에 그들을 광야에서 다 죽게 하지 않으시고 축복의 땅 가나안에까지 이를 수 있는 길을 아직도 열어 주고 계신다는 증거였던 것이었습니다.
6절 이하에 이어지는 말씀은 대제사장 아론을 비롯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바로 그 십계명의 두 돌판이 들어 있는 언약궤를 모시면서 백성들을 축복했던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6절부터 9절에 "6(이스라엘 자손이 브에롯 브네야아간에서 발행하여 모세라에 이르러서는 아론이 거기서 죽고 거기 장사되었고 그 아들 엘르아살이 그를 이어 제사장의 직임을 행하였으며 7또 거기서 발행하여 굿고다에 이르고 굿고다에서 발행하여 욧바다에 이른즉 그 땅에는 시내가 많았었으며 8그 때에 여호와께서 레위 지파를 구별하여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이며 여호와 앞에 서서 그를 섬기며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하셨고 그 일은 오늘날까지 이르느니라 9그러므로 레위는 그 형제 중에 분깃이 없으며 기업이 없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 같이 여호와가 그의 기업이시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첫 대제사장이었던 "아론" 역시 모세와 마찬가지로 가나안 땅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맡았던 "제사장의 직임"은 그 때문에 중단되지 않았으며, 그의 아들 "엘르아살"을 통해 아무 차질 없이 "오늘날까지" 즉 모세가 이 고별설교를 하고 있던 시점까지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런 제사장들과 그들을 가까이 모시고 성막을 섬겼던 "레위인"들의 사역은 바로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이며 여호와 앞에 서서 그를 섬기며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데에 있었습니다.
그 언약궤 안에 들어 있는 것들 세 가지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두말할 것 없이 바로 '십계명의 두 돌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제사장의 사역 역시 근본적으로는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저 언약궤를 보관하고 운반하는 일만 했던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안에 있는 '십계명'을 따라서 여호와를 섬기며 그 '말씀'을 근거로 하여 백성들에게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했던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모세는 지금 가나안 입성을 앞에 두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두 번째 돌판'을 주셨다는 사실 자체가 바로 지금 그들이 누리고 있는 축복의 원인이요 출발점이 되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있었습니다.
구약의 제사장들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교역자들 역시 여러분들에게 전해 줄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은 바로 이 '하나님의 말씀'밖에 없습니다. 목사가 강단에서 성경 말씀으로 설교하고 교역자들이 성도들을 심방하면서도 역시 그 말씀으로 가르치고 권면해 주는 것이야말로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베풀어 주시는 최고의 은혜요 축복인 것입니다.
사람 사이에서도 상대방에게 단단히 화가 나고 다시는 용서할 생각조차 없게 되면 아예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 상대방은 내가 말을 걸어 줄 가치조차 없는 저질 인간이라고 단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조차 해 주지 않으실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다면 그것은 정말 끝장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지만 정말 고맙게도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부인하고 우상 앞에 절하려 하는 자에게도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걸핏하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돌아서려는 자에게도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네가 불의함을 인하여 엎드러졌느니라"고 불러 주십니다. 인생에 지쳐서 낙심하고 신앙생활이 파선 일보직전에 있는 자를 향해서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또 당신의 간곡한 음성을 들려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여러 교회 교육프로그램들을 통하여 계속 성경 말씀을 배우고 익힐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나 같은 죄인에게도 여전히 '두 번째 돌판'을 통하여 말씀해 주고 계시는 가장 큰 축복인 것을 꼭 깨닫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바로 그 축복을 구체적으로 누리게 되는 유일한 길입니다.
10절 이하 16절에 "10내가 처음과 같이 사십 주야를 산에 유하였고 그 때에도 여호와께서 내 말을 들으사 너를 참아 멸하지 아니하시고 11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일어나서 백성 앞서 진행하라 내가 그들에게 주리라고 그 열조에게 맹세한 땅에 그들이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라 하셨느니라 12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13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14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 15여호와께서 오직 네 열조를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 후손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날과 같으니라 16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고 기록했습니다.
두 번째 돌판을 받기 위해 다시 시내산에 올라갔던 모세는 또 "처음과 같이 사십 주야를 산에 유한" 후에 내려왔습니다. 그 곳에서 지내는 동안 그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렸고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참아 멸하지 아니하시기로"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일어나서 백성 앞서 진행하라"고 명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그들에게 주리라고 그 열조에게 맹세한 땅" 즉 가나안 땅을 얻게 해 주시겠다는 다짐까지 다시 해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축복의 결과를 얻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된 조건이 딱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는" 것으로서,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을 잘 믿는 신앙'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처럼 '하나님을 잘 믿는 신앙'이라는 것은 곧 "그 모든 도를 행하고...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는" 것이었는데, 간단히 말해서 '말씀 순종'이었습니다. 그리고 오직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않는 것만이 그처럼 온전히 말씀을 순종하기 위해서 꼭 새겨야 할 요령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이하의 본문에 기록된 말씀은 그런 '말씀 순종'의 대표적이며 실제적인 예를 일러 주는 내용입니다. 17절부터 22절에 "17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의 신이시며 주의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18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시나니 19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음이니라 20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에게 친근히 하고 그 이름으로 맹세하라 21그는 네 찬송이시요 네 하나님이시라 네가 목도한바 이같이 크고 두려운 일을 너를 위하여 행하셨느니라 22애굽에 내려간 네 열조가 겨우 칠십 인이었으나 이제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하늘의 별같이 많게 하셨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말씀 순종'이란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 여호와"만을 "신의 신이시며 주의 주" 다시 말해서 유일하신 참 신으로 믿는 것이며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 즉 절대주권자로 믿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믿고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이야말로 '십계명의 제1계명과 제2계명'이며 절대로 어겨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한 '말씀 순종'인 것입니다.
바로 그런 순종이 있는 자는 자기가 믿는 하나님께서는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시는" 분이신 줄을 알고 자신 역시 "나그네를 사랑하라"는 명령에 절로 순종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말씀을 따라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바른 신앙을 지키는 성도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 또한 자동적으로 지키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말씀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에게 친근히 하고 그 이름으로 맹세하는" 성도에게 하나님께서는 "크고 두려운 일을 (그를) 위하여 행해" 주시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지금 모세의 설교를 듣고 있는 광야 세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루어진 현실로서 과거에 "겨우 칠십 인"이었던 그들의 열조에 비해 이제는 "하늘의 별같이 많게" 된 축복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지금 우리 경향교회 역시 모압 평지에 서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비슷한 상황에 있습니다. 40년 전 을지로의 작은 창고에서 몇 십 명의 성도들이 모여 시작되었던 우리 교회는 여의도 시절에 3천 명의 목표가 달성되었고 이 강서 시대를 맞이하면서 3만 명의 목표 역시 벌써 성취되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이런 축복을 받을 수 있게 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단 한 가지, 바로 교회 설립 때부터 우리 경향교회는 오직 '성경 중심'으로 세워졌으며 우리 경향의 성도들은 오로지 '말씀 순종'이라는 이 한 가지 길만 함께 달려왔기 때문입니다.
경향의 성도들은 그저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이기를 힘썼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십일조와 헌물을 바쳤으며' 주님께서 분부하신 대로 '전도와 선교가 인생 최대최고의 사명인 줄 알고 가든지 보내든지 충성을 다하면서' 지금까지 왔습니다. 다른 교회에서는 해야 하는 줄은 잘 알면서도 실제로는 잘 하지 않는 일, 혹은 아예 할 엄두조차 못 내는 일까지 우리 경향교회 성도들은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처럼 일사불란하게 초지일관으로 충성할 수 있었겠습니까? 거기에는 아무 다른 요령이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대로 순종해야 한다.'는 이 한 가지만을 모든 경향인들이 함께 따라왔기 때문이었을 뿐입니다. 마치 '명령이 내리면 즉각적이고도 절대적인 복종만 있을 뿐'인 병사들처럼, 경향의 성도들은 오로지 '성경중심'의 원칙만을 붙잡고 지금까지 이 교회를 통해 하나님을 섬겨왔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경향 가족이 전 세계적으로 '30만의 큰 민족'을 이루게 될 비전 역시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오직 '말씀 순종'만으로써 성취될 수 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날도 바로 '우리의 행복을 위하여 여호와께서 명하시는 명령과 규례'를 지켜 그대로 순종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우리 경향인들이 '목도한 바'보다 훨씬 더 '크고 두려운 일'까지 행해 주실 축복의 미래를 꼭 함께 맞이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바다의 모래보다, 하늘의 별보다 더 많은 후손'을 약속해 주셨을 때에 사실 아브라함조차 그 약속을 믿기가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상식으로서는 도저히 기대할 수 없는 너무나 큰 복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친히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그 약속에 대한 믿음을 지킬 수 있도록 계속 '말씀'해 주셨으며 끝내 그 약속대로 이루어지는 축복의 시대가 오게 해 주셨습니다.
그런 엄청난 축복에 비해서 그것을 누릴 수 있는 길은 너무 간단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말씀을 들려주신다는 사실이 바로 축복의 출발이며 근원임을 깨닫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기만 하면 아무리 믿기 어려울 정도로 엄청난 축복이라 해도 반드시 성취되고야 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너무 간단한 까닭에 실제로는 그것을 간과하기도 쉽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 간단한 축복의 원리를 두고서도 그토록 자주 실족했던 것처럼, 오늘날도 많은 교인들이 그저 '성경 중심'으로 살고 '말씀 순종'으로 충성하기만 하면 엄청난 복을 받을 수 있다는 이 간단하면서도 틀림없는 사실을 믿지 못하고 따르지 않고 그 결과 누리지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 경향의 성도들이 성경대학과 대학원, 전도대학과 교사대학을 통하여 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 열심히 배우고 익히며 졸업한 후에 바로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은 여러분 개인뿐 아니라 우리 경향교회 전체에 있어서도 너무나 중차대한 일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간단히 말해서, '성경 중심의 교회 교육'만이 각 성도 개인과 교회 전체가 참된 복, 더 큰 복을 받을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랑하시는 백성에게 여전히 들려주고 계시는 이 축복의 말씀이 강단의 설교와 교회 교육프로그램을 통하여 전해질 때에, 바로 그 말씀을 밝히 깨닫고 온전히 순종함으로써 이 경향의 조국 전도와 세계 선교를 통하여 우리 경향인을 '하늘의 별같이 많게' 해 주시는 놀라운 축복에 꼭 참예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