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짜르트가 36세에 단명한 천재 음악가였다면 하이든은 당시로서는 장수한 편인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하이든은 모짜르트 뿐아니라 베토벤에게도 음악을 가르친 고전음악계의 멘토였던 것이다.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음악세계는 그들이 유랑벽이 있다는 것에서 공통점을 찾을수 있다. 그들의 음악은 잠시도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무수한 유럽의 도시들을 유랑 방문함으로써 얻어진 결과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모짜르트가 아버지뻘되는 하이든과 나눈 우정은 모차르트의 인생 속에서 무척 예외적인 요인 중 하나였다. 하이든은 거의 평생을 에스테르하지 공(公)의 악장으로 매여 있었던 구시대적 인물이었고, 모차르트는 그가 간 길이 대부분 프리랜서 예술가였기 때문이다.
하이든은 모짜르트가 칼발트가 말한대로 방약무도(傍若無人)할 만큼 자유로운 영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혜안으로 그의 천재성을 이해했던 것이다. 모짜르트가 남긴 스물세편의 현악 사중주에 하이든에게 헌정한 '하이든 사중주' 전6곡은 고전주의 소나타 양식의 완성을 보여주는 걸작으로 하이든은 이 곡을 들은 뒤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드'에게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고 한다. "성실한 인간으로 신 앞에서 맹세코 말하지만 당신의 자식은 제가 직접, 또는 평판으로만 알고 있는 작곡가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입니다. 훌륭한 감각과 매우 뛰어난 작곡 기술을 갖고 있습니다." 천재가 천재를 알아본 것이다.
이들 두 사람은 죽음조차도 천재성과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하이든의 경우는 1809년에 그가 세상을 떠나자 유족들은 장례식을 간소하게 치루고 그의 유언대로 유해를 교회묘가 아닌 가문의 묘에 안장시킨다. 그런데 얼마후 그의 무덤이 파헤쳐져 그의 머리가 온데간데 없어지게 된다. 하이든의 천재적인 뇌구조를 조사하고 싶었던 어떤 귀족이 가져간 것이었다. 더욱 기상천외한 일은 하이든의 머리가 100년 동안이나 여러사람들에게 비싼 값에 팔려 가기를 계속하였다는 것이다. 1954년에 이르러서야 그의 유해는 오스트리아에 돌아오게된다. 그의 유해가 반환되는 미사에 오스트리아 대통령 및 정치인들이 대거 참석해 대 음악가의 안식을 간절히 바라며 이제서야 머리를 찾은것에 대해 하이든 후손들에게 정식으로 사죄했다하니 천재는 죽어 영면하기도 어렵다는 고소(苦笑)를 금치 못한다.
모짜르트의 경우는 그가 프리메이슨단원이었던 까닭에(오늘날의 프리메이슨의 성격과는 조금 다르다) 이 단체의 예식에 따라 두건이 딸린 검은 수의복에 쌓여져 여러명의 사자들과 함께 장례가 치러졌다. 그가 무일푼으로 세상을 떠난 행려병자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평전을 쓴 '필립 플로레스'는 말하기를 "신은 우리에게 그를 보내주었다가 다시 데려갔다. 우리는 그를 감당할 자격이 없었지만, 그는 우리를 다른 세계로 데려간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