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13)
바울사도는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괭가리가 된다고 했습니다. 또 예언하는 능, 모든 지식, 모든 믿음, 모든 구제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며 심지어 자신에게 유익도 없다고 했습니다. 성령의 은사를 받은 자는 오직 주위에 사랑을 구현하며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성령의 은사도 완전한 것이 오면 결국 폐해질 것이기에 은사 자체를 사모하고 실현하기보다는 항상 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 셋을 소유하며 실현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셋 다 항상 있어야 함에도 왜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을까요? 언뜻 생각하면 순서는 오히려 그 반대여야 할 것 같지 않습니까? 믿음이 있어야만 또 그 믿음이 성숙되어야만 소망을 키우고 사랑을 실천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믿음 없이는 소망도 생기지 않고 사랑을 실천할 열정과 능력도 따르지 않을 것 아닙니까?
어떤 이는 셋 중에 사랑의 힘이 가장 크기 때문에 제일이 된다고 말합니다. 사람과 사회를 근본적으로 거룩하게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맞습니다. 여성은 약해도 엄마는 강하다는, 아니 세상에서 가장 강하다는, 사실이 그것을 입증하고도 남습니다. 그러나 사랑 자체만 너무 강조하다보면 자칫 불신자들이 실현하는 사랑과 그리 차이가 없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성경도 강조하듯이 기독교의 궁극적 목적이 이타적 사랑을 실현하는 것 아니냐? 그러나 구태여 기독교적 믿음이나 소망이 없는 불신자 중에서도 얼마든지 그런 사랑을 실현하는 자도 있지 않느냐?”는 반박을 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항상 성경 그대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것도 오직 하나님 중심적으로 그래야 합니다. 우선 셋 다 항상 있어야 한다고 말했으니 그대로 인정해야 합니다. 사랑 없는 믿음과 소망도 틀렸지만 믿음과 소망 없는 사랑도 하나님이 원하는 참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사랑을 하되 반드시 하나님이 원하는 사랑을 실현하라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원하는 사랑은 대체 어떤 것입니까? 예수님처럼 당신께서 죽으시고 다른 사람을 살리는 사랑입니까? 그럼 불신자 엄마도 자식을 위해 대신 죽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당신이 죽어서 우리를 대신 살리되, 천국으로 인도하는 새 생명을 주신 사랑을 베푼 것입니다. 그냥 우리를 대신해 죽은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히 믿음, 소망, 사랑 이 셋은 항상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천국에 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믿음과 소망은 이미 그 역할을 다하여 더 이상 존재할 필요가 없을 것 아닙니까? 말하자면 믿음은 천국을 들어가기 위한 전제조건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 때문에 오직 은혜로만 구원을 얻게 되었음을 믿지 못하면 절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또 그렇게 믿었기에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영원한 천국을 소망할 수 있지 않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영원한 것은?”이라는 질문은 사실상 어폐가 있습니다. 영원은 그냥 영원한 것입니다. 가장 영원한 것이 있고 덜 영원한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믿음과 소망은 신자가 천국에 가는 순간 임무수행을 마쳤기에 영원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영원한 것은 오직 하나 사랑뿐입니다. 바꿔 말해 사랑이 가장 힘이 세기에 그 셋 중에 제일이 아닙니다. 사랑만이 영원한 것이기에 자연히 가장 능력이 세고 또 제일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요일4:16,17) 영원하신 하나님 그분이 사랑이시기에 사랑은 영원합니다. 또 신자는 그분의 사랑을 알고 그 안에 거하기에 심판 날에 담대해질 즉, 영원한 천국이 자기를 위해 이미 예비 되어 있음을 확신하는 소망을 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신자들은 그 사랑을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4:9,10) 십자가의 예수님을 모르면 영원한 사랑을 절대로 알 수도 할 수도 없습니다. 다른 말로 예수님이 신자를 천국으로 인도했듯이 신자 또한 다른 사람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전도만 열심히 하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벧전4:7) 예컨대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따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 목적과 결혼으로 가정을 이루게 하신 뜻에 맞게 사랑해야 합니다.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유업으로 받을 자로 알라고 했습니다. 쉽게 말해 신자 부부는 천국까지 함께 갈 것이니까 귀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어려움을 도와주는 것은, 아무리 인간적 의와 교만이 개입되지 않고 순수했다 할지라도, 한시적 사랑입니다. 물론 전혀 의미가 없거나 소중하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인간 세상에선 숭고한 수고와 희생이 될지 몰라도 천국까지 가는 사랑이 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영원하지 못하기에 그만큼 온전한 능력이 나타지 않으며 쉽게 변질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사랑을 하나님 중심적으로, 다른 말로 그분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이 땅이 전부인줄 알기에 그 열매도 이 땅에서 맺고 이 땅으로 떨어집니다. 천국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으로선 오히려 더 안타깝고 불쌍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서로 간에 천국까지 가는 참사랑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죄악이 들어서자 사람들은 천국까지 가는 사랑은 아무 필요 없다고 거부했습니다. 이 땅에서 한시적으로 사랑하려고 노력하면 그만이라고 우기게 되었습니다. 믿음과 소망이 전혀 개입되지 않는 사랑입니다. 겉모습만 동일할 뿐 사랑의 가장 큰 특징, 아니 본질인 영원성은 상실되고 없습니다.
최초 인간이 타락하자 하나님은 생명나무를 천국으로 옮기셨습니다. 천국에 가야만 사랑을 온전히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또 그래야만 이 땅에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천국까지 함께 가려는 소망을 키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낙원에서 쫓아낸 것 자체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온 은혜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이미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크리스마스 시즌, 많은 교회가 서로 선물을 주고받고 그 동안 소홀히 했던 어려운 곳을 찾아가 사랑의 손길을 베풉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쳐선 진정한 크리스마스가 아닙니다. 천국까지 함께 가는 십자가 복음을 가르치고 실현하지 않는 한 아무리 구제를 많이 해도 세상은 기독교가 자기들과 동일한 길을 조금 먼저 가고 있다는 정도로만 여길 것입니다. 엄밀히 말해 자칫 그런 오해만 줄 수 있기에 오히려 그런 행사는 안 하느니 못합니다.
신자는 크리스마스 때에, 아니 본문 말씀대로 항상 예수만 유일한 소망이자 믿음의 대상임을 세상 앞에 밝히 보여야 합니다. 예컨대 신자부부는 정말 천국을 향해 함께 걸어가는 모습을 지난 일 년 내내 실현해 보여야 합니다. 불신자 이웃이 그 모습을 보고 예수에 대해 자꾸 궁금해지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다 성탄절 즈음에는 내년에는 우리도 같이 교회 나가면 안 될까라고 먼저 물어올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또 교회의 성탄절 잔치도 아기 예수로 오셔야만 했던 천국 주인께 그런 열매를 선물로 바치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그러지 못하면 십자가 앞에 다시 회개하고 헌신하는 예배가 되든지 말입니다.
2008/12/19
* 이 글은 미국 남침례교단 소속 박진호 목사(멤피스커비우즈한인교회 담임)가 그의 웹페이지(www.whyjesusonly.com)에 올린 것을 필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입니다. 맨 아래 숫자는 글이 박 목사의 웹페이지에 공개된 날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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