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시인 로렌스 비니언은 ‘치유자들’(The Healers)이라는 시에서 의무병들을 용사 중의 용사라고 노래했다. 총탄이 빗발치고 참호가 무너지는 극도의 혼란 속에서도 부상병 치료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서양의학을 공부한 우리나라 최초의 군의관은 1899년 7월 도쿄지케이 의원 의학교를 졸업한 김익남이었다. 대한제국 의학교(교장 지석영)의 교관으로 제1회 졸업생 19명을 배출하였고 1904년 대한제국 군대 군의장으로 복무했다. 그 후 유병필, 김교준, 홍석후 등 졸업생들이 육군 부위로 임명되어 1907년 7월 군대가 해산될 때까지 복무했다.
6.25 전쟁 때는 부족한 인력으로 55만 명의 입원 용사를 치료하며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나누었다. 1948년 5월 창설된 제1육군병원은 군 의료기관의 모태이다. 1948년 8월 육군 군의학교가 창설되었다. 6.25 직전 군 의료시설은 육군병원 5개소, 육군요양원 1개소에 장교 250명, 위생병 1,401명이었다. 1953년 휴전 당시 육군병원은 16개소, 이동외과병원은 11개소로 늘어났다. 그 외 징발된 수많은 민간 병원이 있다.
6.25 전쟁 시 간호장교는 664명으로 6.25 전쟁 여군사는 정리했다. 이중 광복군에 이어 민간 간호사로 참전하여 현지 임관한 오금손 대위와 6.25에 이어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고 화랑무공훈장을 수훈한 김필달 대령이 있다.
우리나라와 유엔 참전국은 혈맹의 관계라고 말한다. 함께 피를 나눈 사이라는 뜻이다. 대한 적십자사에 의하면 6.25 때 국군 부상자의 수혈용 혈액이 대부분 미국에서 공수된 것이었고 국군의 큰 수술은 거의 다 미군 야전병원에서 이루어졌다.
스웨덴은 부산에서, 덴마크는 부산항과 인천항에서 병원선을 통하여, 노르웨이는 일선에서 봉사했다. 이들 3국은 메디컬센타(국립중앙의료원)를 세워서 운영하다가 1968년 우리 정부에 인계하고 떠났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미군은 헬리콥터 후송과 이동외과병원을 통해 수술했다. 6개 이동병원은 60병상으로, 의사 14명, 간호사 12명, 장교 3명, 기타 93명 등 120명이었고, 장비 지원 의료기술을 우리에게 조건 없이 지원했다.
류제한 박사는 1929년 미국에서 의료선교사로 파송되어 평남 순안병원 제5대 병원장으로 있으면서 경성요양병원(삼육서울병원)을 세우고 부속 간호양성소를 개설했다. 6.25 때 맥아더 사령부에서 수송선을 배정받아 환자들과 교인들을 싣고 제주도 성산으로 이동해서 진료를 계속했다. 그의 부인도 서울 중랑구 상봉동에서 사회사업 성락원을 설립하여 전쟁고아들을 보살폈다.
파주시 통일공원에 가면 한국전 순직 종군기자 추념비가 있다. 6.25 당시 전장을 취재, 보도하다가 순직한 국내외 기자 18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한국 1명, 미국 10명, 영국 4명, 프랑스 2명, 필리핀 1명 등이다.
유일한 한국인 기자 한규호 서울신문 기자는 전쟁 초기 상황을 취재하여 송고했다. 임진강 방면 80km 전 전선에 북한군 2개 사단, 2개 여단이 총공격을 해오고 있으며, 일부 국군 복장과 견장으로 위장하고 있다고 정보를 알려주었다. 한 기자는 서울에서 인민군에게 피살되었다.
국방부가 기자를 처음 전선에 보낸 것은 1949년 9월이었고, 20명을 보냈다. 그리고 6.25 때 첫 기자로 보낸 한규호 기자, 국군 평양 입성을 전한 이혜복 기자, 국경지대 초산까지 올라간 이필면 기자 등 43명의 종군기자가 있었다.
국방부는 2015년 6월 종군기자 143명과 참전 언론인 35명의 이름을 기록한 6.25 참전 언론인 명패를 제작했다. 그 외 국방부 정훈소속 문총구국대로 공중인, 구상, 박두진, 박목월, 유치환, 조지훈 등이 활약했다. 서울 현충원 충혼당에는 6.25 종군기자 11분과 대전 현충원에 6분이 안장되어 있다.
외국 종군기자도 6.25의 실상을 전 세계에 알리며 자유 세계인에게 경각심으로 단결케 하였다. 마거리트 히긴스 기자는 뉴욕 헤럴드 트리뷴 특파원으로 인천상륙작전을 취재하여 ‘불타는 해안’이라는 기사를 썼고, 1951년 퓰리처상을 수상한 최초의 여성이 되었다.
데이비드 더글라스 던컨은 라이프지 사진기자로 장진호 전투와 흥남 철수를 기록한 귀중한 사진을 남겼다. 1951년 사진첩 ‘이것이 전쟁이다’를 통해 6.25의 참상을 가장 사실적으로 보여주었다.
매년 11월 11일 11시를 기해서 부산의 재한 유엔 기념공원에 묻힌 유엔군 전사자를 향해 묵념하는 ‘턴 투워드 부산’이라는 현충의식이 있다. 2,300명의 유엔공원에 잠들어 있는 전사자들의 이름을 부르며 1분간의 묵념으로 ‘당신의 희생을 잊지 않고 기억한다’는 의식이다. 2007년 캐나다의 6.25 참전용사 빈스 커트니 씨의 제안으로 시작되었다.
종군기자 중에는 영국의 윈스턴 처칠 수상의 아들 랜돌프 처칠과 필리핀의 베니그노 아키노 2세(코라손 아키노 전 대통령의 부군)도 있다. 다음은 백마고지 참전용사의 회고 글이다. ‘한밤중에 이게 무슨 귀신이 우는 소리냐! 꽹과리 치고 나팔 불고 불나비 떼처럼 기어오르는 적의 무리와 우리는 싸우고 또 싸웠다. 구슬픈 중공군의 피리 소리는 온 몸에 소름이 돋으며 기분을 나쁘게 한다.’ 생생한 전투 현장의 소리를 종군기자, 문총구국대원들이 우리에게 전해 준 것이다.
이범희 목사(6.25역사기억연대 부대표, 6.25역사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