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믿는 사람치고 영원을 사모하지 않는 이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그 영원 세계에 지금 당장 들어가고 싶어하는 이들은 극히 드물다는 점이다. 어차피 천국은 떼놓은 당상이니까 이 땅에서 좀 더 오래 살면서 많은 것 누리다가 가려는 생각 때문이리라.
이미 삼층천(천국)을 보고 온 바울은 천국에서 사는 편이 더 낫지만, 사명 때문에 이 땅에 거하는 편을 선택한다고 한 바 있다.
영국 헨리 8세 시대의 법률가이자 정치가이며, 인문주의자이자 《유토피아》의 저자로 잘 알려진 토마스 모어(Thomas More)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의 일이다. 자식들과 함께 그의 아내가 감옥에 찾아와 왕에게 항복하라고 그를 졸랐다.
“우리는 아직도 오랫동안 함께 살 수 있어요. 그런데 왜 당신은 꽃 같은 나이에 당신과 우리 가족에게 가장 비극적인 불행을 가져오려 하십니까?”
이 말을 들은 모어는 이렇게 되물었다. “당신은 내가 앞으로 얼마나 더 오래 살 수 있으리라 생각하오?” “최소한 20년은 더 사실 거예요.” 그러자 그는 소리쳤다. “이 땅에서의 20년밖에 안 되는 삶을 위하여, 내가 영원한 삶을 포기하고 고통에 나를 내어 준다면 그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오! 영혼을 잃는 것보다는 그 밖의 다른 모든 것을 잃는 편이 오히려 더 좋은 일이오.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소?”
그렇다. 영원을 보고 사는 사람들의 생각은 이처럼 다를 수밖에 없다. 엡 2:5-6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여기서 “앉히시니”는 “made us sit together”(KJV), 즉 “앉히셨으니”라는 뜻이다. ‘부정과거’(aorist)는 ‘과거 어떤 시점에 동작과 행위가 이미 마쳐진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함께 죽었던 우리가 주님의 부활과 함께 살아나서 그분과 함께 이미 하늘에 앉은 상태가 되게 해주셨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걸 사실로 믿고 그 가치관에 따라 살다가 간 사람이었다.
그렇다. 하나님은 현재 자신이 감지하는 ‘감정’(feeling)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 위해 해놓으신 ‘약속’(promise)만을 굳게 신뢰하고 살아가는 사람을 찾고 계신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들은 10명의 정탐꾼처럼 40일간 탐지하며 확인했던 가나안족들을 보며 기가 죽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가나안 땅을 자신들에게 선물로 주신 하나님의 약속만을 굳게 믿고선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외쳤던 리더들이었다.
소년 다윗 역시 마찬가지의 사람이었다. 그는 사울왕조차도 대적하지 못한 채 벌벌 떨게 했던 불세출의 영웅 골리앗을 보지 않았다. 하나님이 오래 전에 주셨으나 아직은 받지 못한 선물인 가드 사람 골리앗을 보고 대적해서 승리했다.
신앙생활에서 승리의 비결은 딴 데 있지 않다. 자신이 리얼하게 감지하고 있는 현재의 감정을 믿고 나가느냐, 아니면 아직 성취되진 않았으나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것이기에 이미 받아 누리고 있는 것처럼 신뢰하며 나아가서 정복하느냐에 달려 있음을 기억하자. 육안으로 보이는 세계보다 더 확실하고 엄청나게 크고 풍부한 세계가 있음을 기억하고 살자.
성경의 바울처럼 토마스 모어처럼, 비록 이 땅에 발을 디디고 살아가지만 이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아 있는 존재들임을 늘 자각하고 살자. 미개한 나라가 아닌 수준 높은 국가 시민들의 사고와 말과 행동은 차별화되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들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만일 천국 시민이 맞다면, 그에 맞는 생각을 하고 말을 하고 행동을 해야 한다. 오늘 하루 우리 모두의 삶이 천국에 주소를 둔 자다운 모습이 되었으면 좋겠다.
#신성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