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독일 철학자 헤겔은 변증법(Dialectics) 구도를 만들어 냈다. 우리가 익히 잘 아는 정(Thesis), 반(Anti-thesis), 합(Synthesis)을 말한다. 정은 존재해 있는 기존 현상을 말하고, 반은 이에 대항, 또는 부정하는 입장, 즉, 갈등의 현상을 말하고, 합은 결국 그 갈등이 폭발하여 어떤 새로운 국면의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 합은 또 다른 정(Thesis)으로 고착화되고, 여기에서 또 다른 갈등이 발생하여 상호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태가 계속되어져 가는 것을 말한다. 역사는 이런 구도 속에서 흘러간다는 것이 헤겔의 변증법이다.
이러한 논리에서 조심스럽게 이해해야 할 것은 정은 꼭 선, 또는 선하다는 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고, 반 역시 반이라 하여 악한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님을 잘 알아야 한다. 정은 어떤 상황, 현상을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공산주의나 독재정치 같은 악한 정치현상이 정일 수도 있고, 반으로서 대항하는 갈등을 나쁜 것이나 악한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는 것과 같은 의미다. 내용이 선하든 악하든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닌 상황 반전으로서의 현상적인 것을 말하는 논리가 정반합이다.
오늘의 주제는 소신과 배신으로서 그것을 정반합 논리에 적용하여 이해하거나 평가, 또는 판단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인간 역사는 헤겔의 변증법에 기초한 것 같이 소신이 있으면 배신이 존재하는 그런 모습으로 진행되어져 오고 있다. 소신이 지루하거나, 부당 또는 부적당 하면, 이에 대항하여 그런 국면을 뒤집어 엎는 반의 역사가 지금까지 계속되어 오고 있다.
역사에는 이런 소신과 배신의 갈등을 만들어 낸 굴직한 예가 많다. 우선 로마의 줄리어스 씨저와 부루투스가 대표적인 한 예가 될 수 있다. 씨저는 로마제국에서 국부같은 존재였다. 공화정을 이끌며, 공화국을 제국으로 승격 변모시킨 인물이었다. 많은 로마 시민들이 씨저를 영웅으로 이해하였다. 그런 씨저가 로마를 제국화 하면서 공화정 통치제도에서 황제 1인 독재체제로 만들어 갔다. 기존 공화정에서 1인 통치의 제국주의 황제로 통치구조를 전환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그룹들 중 브루투스가 반기를 들어 씨저를 살해 한 것이다. 다수 민주주의 구조인 공화정을 1인 독재 황제국가로 만드느냐는 것으로 암살한 것이다. 이때 그 둘의 마지막 대사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평소 씨저의 관심을 받고 활동하던 브루투스가 아버지 같은 존재였던 씨저를 살해 할 때의 말은 욕망과 명분의 차이가 얼마나 큰 것이었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익스피어 희극에서 나온 말이다:
씨저 “브루투스, 너마저?”
브루투스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만, 그 보다 로마를 더 사랑한다.”
쉐익스피어가 그 사건을 극대화 하기 위해 최고의 수사를 동원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아마도 그렇게 말했을 것이라는 것은 당시 상황으로 보면 있을 수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공화정의 정에서 제국의 황제가 되려 하여 이에 반기를 든 브루투스의 적개심 발로의 반, 그를 살해하여 그 이후 합의 결과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소신에 대한 배신의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아직도 다양하다. 기존질서 순응자들은 브루투스를 배신자로서 나쁘게 보는 반면, 공화 의회정치의 가치를 높이는 사람들은 독재정치를 미워하여 브루투스의 공화정을 지키려 했던 것에 대한 소신을 긍정적으로 보는 입장이다. 어쨌든 이 사건은 당시 소신과 배신이 뒤 얽힌 경천동지할 만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소신과 배신은 눈감고도 알 수 있는 내용으로 가룟 유다의 배신을 들 수 있다. 가룟 유다의 배신은 그야말로 악 그 자체다. 명분도 없고, 공공의 실리도 없는 인간 스스로의 배신의 발로 뿐이기 때문이다. 스승 예수로부터 유대 독립의 대망을 기대했었으나 예수께서 그런 인간 지상적 꿈을 나타내지 않자 실망하여 스스로 배신의 길을 택한 것이다. 자신의 목적 달성이 물거품이 될 수 있는 것에 대한 반기인 것이다. 이는 결국, 스승의 뜻을 위해 따랐던 것이 아닌, 자신을 위해 예수를 따랐던 것임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할 수 있다.
로마에는 1,000년의 역사를 이루어 가면서 수많은 소신과 배신의 사건이 많았다. 대부분 권력을 잡기 위한 것 때문이었다. 함께 정치인으로서, 또는 군인으로서 국가를 위해 활동하던 중 자신의 권력 탐욕 때문에 조그마한 의견 차이와 그에 의한 갈등을 이유로 상대를 암살 같은 살상으로 없앴던 비극의 사건들이 황제들 사이에 몇 차례 있었다. 또, 고대 중국도 제후들끼리 힘을 합하여 국가를 건설하였는데, 이 또한 자신이 권력을 잡기 위해 함께 협력하여 세웠던 왕, 황제를 죽이기도 한 사건들이 많았다. 이 시기를 ‘춘추전국시대’(Spring and Autumn Warring States Period)라 하는 것 잘 알 것이다. 공자의 유교경전도 이런 인간적, 정치적, 도덕적 무질서를 극복하기 위해 정치나 사회질서 정립을 하기 위한 차원에서 나오게 된 것이다.
소신은 좋은 선한 소신이어야 한다. 소신은 어떤 사안의 본질이나 상황에 대한 자신의 정신적 가치에 대한 확신을 말하는 것인데, 소신이 소신 되기 위해서는 도덕적이어야 하고, 의롭거나, 정당성을 가져 대중의 공감대를 형성하여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반(Anti-thesis)의 상황이 발생한다. 상대적으로 Anti-thesis 역시, 정당성, 타당성, 도덕성, 합리성을 바탕으로 하여 그 역할이 수행되어져야 한다. 그래야 그 반이 인정 받을 수 있다. 이러한 도덕적 가치 없이 반을 행하면, 무력, 폭동, 내란, 인권무시, 탄압, 도발자의 입장이 되고 만다. 이념적 문제인 공산주의, 독재정치에 대한 반이면 정당성은 반에 있다. 그런데 민주적 법적 통치,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반이면, 그 반은 폭동, 내란이 된다.
소신에 대한 좋은 모범은 미국 39대 대통령 지미 카터에서 볼 수 있다. 그는 그의 재임 끝 무렵 “신념 지키기(Keeping Faith)” 책을 썼다.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인권정책”을 최대 정치적 목표로, 그리고 재임기간 중 “거짓말을 일체 하지 않겠다”는 말로 시작했다. 결국, 그는 재선에 실패하여 그리 훌륭한 대통령으로 인정받지 못하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선의를 가장한 거짓말, 악의적 비난, 권모술수가 활개치는 정치판에서 도덕이나 정직성 하나로 정치하려니 될리가 만무였다. 하지만, 그의 소신은 정치 초반이나 끝에서도 미국의 빈민층에 대한 관심, 그들도 미국 시민이고, 함께 살아가야 할 국민이라는 것에 대한 신념이었다. 대통령 퇴임 후 무주택자들이 집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해비타트운동에 참여해 목수로 노동을 하기도 했다. 중동에 평화가 있어야 한다는 소신 때문에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평화협정을 이끈 것과, 빈민들을 위한 노력 때문에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소신은 이런 선한 목적을 가진 것이어야 한다. 자신의 권력행사나 이익만을 위한 것은 소신이 아닌 탐욕에 불과하다. 그리고, 대다수 인정하는 선에 대한 배신은 악일 뿐이다. 악에 대한 반은 정의로운 것이라 할 수 있다.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가룟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마태복음 27:3)
#양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