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한 1:14)
요한이 ‘말씀’이라는 명칭을 인간 그리스도에게 명백하게 붙이고 있으므로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셨을 때 그분은 이전에 존재하시던 것을 멈추신 것이 아니며 육신이 되신 하나님의 영원한 본질에서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한마디로 말해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셨는데 여전히 시간적인 시작이 없는 영원한 말씀으로 그렇게 되신 것이다.
“미래의 뜻하지 아니한 현상이 어떠한 것이든 간에 예수를 능가(凌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의 종교는 끊임없이 거듭하여 젊어질 것이며, 그의 전기(傳記)는 한없는 눈물을 자아내게 할 것이다. 그리고 예수의 고뇌는 모든 양심들을 감동시킬 것이다.”
르낭(Joseph Ernest Renan, 1823-92)의 <예수의 생애>(La Vie Jesus, 1863) 중 끝 부분이다. 다음 말이 이어진다. “모든 시대는 ‘사람의 아들’ 가운데 예수만큼 위대한 존재가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해 나갈 것이다.”
<예수의 생애>가 출판되자 가톨릭 교회는 즉시 금서(禁書)로 조치하였다. 그리고 이 책이 출판된 지 3개월이 되기 전에, 르낭을 가리켜 악마, 가룟 유다, 위선자라고 비난하는 팜플렛이 320여 종 출판되었다. 예수의 신성(神性)만 강조하여 말하지 않고,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의 아들’ 예수를 묘사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르낭의 <예수의 생애>는 꾸준히 읽히고 있지만, 르낭을 비방한 팜플렛은 구경조차 할 수 없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사람의 아들’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말한 것이 어느 면에서 잘못된 것인가? 그 현상이 생긴 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고 한 성경 말씀을 믿지 않고, 도그마[교의(敎義)]를 믿었기 때문이다.
가톨릭교회는 갈릴레오가 당시 교회가 신봉(信奉)하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天動說)을 따르지 아니하고, 지동설(地動說)을 주장하였다 하는 죄목(罪目)으로 갈릴레오를 정죄(定罪)하였다. 이와 같은 현상은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고 도그마를 맹신(盲信)하는 데서 발생한다.
“무릇 종교사를 쓰기 위하여는 첫째로 그 종교를 믿는 것이 필요하며, 둘째로 자기가 믿는 종교를 맹목적으로 믿지 않는 태도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절대적인 신앙은 순수한 역사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르낭이 <예수의 생애>를 쓰게 된 목적을 말한 한 부분이다. 우주여행을 하는 21세기 현재에도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부정하고, ‘사람의 아들’이 아닌 요술쟁이 예수를 믿는 삶들이 있다. 그들은 자기들의 광신(狂信)을 “독실한 믿음”이라고 생각하며,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는” 일을 선교(宣敎)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런 뜻에서 예수를 믿는다. 그렇다면 세계 역사에서의 예수의 위치는 어떠한가? 그리고 나사렛예수의 어린 시절은 어떠했을 것인가? 아무튼 예수는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던 위대한 한 인간이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요한의 주장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인격의 통일성을 분명하게 추론할 수 있다. 지금 인간이신 그분은 과거에 언제나 하나님으로 계셨던 분이 아닌 다른 어떤 분으로 이해될 수가 없다. 사람이 되셨다고 언급된 분은 바로 그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김희보 목사는
예장 통합총회 용천노회 은퇴 목사로, 중앙대 국문과와 장신대 신학대학원(M.div.)을 졸업하고, 샌프란시스코 신학교에서 목회학박사(D.Min.)와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월간 「기독교사상」 편집주간, 한국기독공보 편집국장, 서울장신대 명예학장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문학과 기독교(현대사상사)」, 「그림으로 보는 세계사(3권)」, 「지(知)의 세계사(리좀사)」, 「세계사 다이제스트100」 등이 있다.
#김희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