겟세마네 동산에서 간절히 기도하시는 예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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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예수 논구 시리즈

VI. 인간의 언약성과 실패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뜻

김영한 박사

겟세마네 동산에서 진액이 마르도록 기도하신 후 예수는 체포당하셨고, 그의 제자들은 모두 흩어져 도망쳤다. 외면적으로는 동산에서의 간절한 기도의 응답은 무산되는 것 같이 보인다. 예수는 실패한 것 같다. 그러나 외견상으로는 그의 복음 사역의 실패로 보이는 예수의 체포는 내면적으로는 그의 아들을 십자가에 달리게 허용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 나사렛 예수는 성령이 주시는 예지적(豫知的) 통찰로서 베드로가 자기를 부인할 것을 사전에 아셨다. 복음서 저자 요한은 예수의 예언을 다음같이 기록하고 있다: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요 13:37-8). 하나님은 세상적인 성공을 통해서 일하지 아니하신다. 하나님은 예수 제자들의 배신과 실패를 수용하시고 그것을 통하여 그분의 지고한 뜻을 이루신다. 고난의 종이신 인간 예수의 실패는 보이지 않는 신성 예수의 승리요, 성부 하나님의 승리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그의 아들의 좌절과 실패를 통하여 승리하신다. 하나님은 아들의 죽음에 이르는 실패를 통하여 세상을 대속하신다.

하나님은 외견상으로 드러나는 그의 부재와 무간섭 가운데서 전혀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진정하신 섭리와 그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신다. 제자들의 흩어짐, 특히 베드로의 경우 세 번이나 스승 부인(否認)은 나중에 실패를 딛고 일어나 예수의 증인이 되고 순교적 전도자가 되는 데 기여한다. 나사렛 예수는 이 사실에 대하여 예언하신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 21:18). 이 예언이 베드로의 순교적 죽음이라는 것에 대하여 요한은 다음 같이 해석하고 있다: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요 21:19a). 이러한 요한의 해석은 제자들에게 고별사를 하는 가운데 예수께서 베드로의 신앙적 맹세에 대하여 베드로의 미래를 예언하심에 대한 해석이기도 하다: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요 13:36).

세상의 죄를 구속하시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은 가장 무기력하고 무능하고 미련한 방법을 택하셨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세상 사람으로부터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 진정 살아계시냐?”라는 조롱을 당하시기까지 하신다. 하나님은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약한 방법, 미련한 방법을 택하신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방법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그 시대에 저주와 수치의 상징인 십자가 형(刑)을 받아 죽으셨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무능과 실패와 수치와 좌절이라는 사건 속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드러내신다.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의 눈 앞에 자신의 하나님 되심을 숨기신다. 그분은 홀로 존귀하시고 높으시므로 인간의 인정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오히려 인간들이 외면하고 배척하는 방식을 사용하여 그분의 주권과 섭리를 드러내시기를 기뻐하신다.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의 공의와 사랑을 드러내신 하나님의 독특한 방식이다. 인류의 구원은 하나님 부재(不在, absence)의 방식으로 숨을 거둔 예수의 십자가 상(上)의 절규 가운데서 이루어진 것이다. (계속)

김영한(기독교학술원장, 샬롬나비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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