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미국을 대표하는 소설가, 현존하는 최고의 소설가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메릴린 로빈슨의 작가의 에세이가 출간됐다. 이 책은 단순한 에세이 모음집을 넘어서, 현 시대의 지적 빈곤과 영적 공허에 대한 강력한 고발장이자, 동시에 그리스도교 전통의 풍요로운 자원을 현대적 맥락에서 재해석한 야심찬 시도를 담은 책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한편으로는 계몽주의의 후예로서 이성과 과학적 탐구의 가치를 옹호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 같은 계몽주의 프로젝트가 종종 인간 존재의 신비와 초월성을 말살시키는 결과를 낳았음을 예리하게 지적한다. 이러한 긴장은 이 책에 수록된 글 전반에 걸쳐 생산적인 방식으로 작동한다.
저자는 책 속에서 “문화에 대한 비관주의는 언제나 등장했다. 아마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그런 비관주의에 빠질 근거도 있기는 하나, 대체로 비관주의는 이 세계가, 우리 인간이 품고 있는 이상, 가능성을 깎아내린다. 때로 비관주의는 더욱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와서, 심각한 공포를 불러일으키고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끔찍한 해결책에 골몰하는, 집단적인 혼란 상태를 조장한다. 어떤 문화 속에서, 혹은 시대를 살아가며 경각심을 가져야 할 때가 있다면, 그건 비관주의가 힘을 발휘할 때다”고 했다.
이어 “이른바 문화 충돌, 대치가 일어난 결과 '그리스도교인'이라는 말은 '어떤 윤리와 가치를 지향하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기보다는 '인구통계 상 특정 집단'을 가리키는 말이 되어 버렸다. 두 말이 완전히 다르다면 그건 과장이겠지만, 양립하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변화는 옛 그리스도교 세계 전반에 나타나고 있으며 미국이라 해서 예외는 아니다. 지극히 세속적인 사람들이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라는 이름을 내걸고 내전을 벌이고 있다. 이름만 '그리스도교인'인 이들이 자신의 문화와 문명을 수호한다는 명분을 걸어 무슬림과 대립하기도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하지만 이른바 그리스도교 세계가 이슬람 세계보다 더 심각한 위험에 처하게 된다면, 그건 이슬람교 때문이 아니다. 그건 그 세계에 속한 이들이, 자신이 더는 믿지 않는 신념 체계에 기반을 둔 문화와 문명을 수호하려 하기 때문이다. 역사는 부족주의가 얼마나 커다란 유혹인지를 수많은 사례를 통해 알려 준다. '나'와 '너'를 가르는 선을 분명하게 그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일 때, 사람들은 그 선을 중시하고, 그 선이 흐릿해지거나 지워지면 흥분하고, 분노한다. 그런 식으로 인류는 '나', 혹은 '우리'와 다른 누군가를 탄압하고 해쳤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이를 망각하고 미친 짓을 반복한다”고 했다.
끝으로 저자는 “우리는 '이성적'이어야 한다면서, '합리적'이어야 한다면서 우리 경험을 보는 틀을 좁게 만들어 버린다. 물론, 이렇게 좁게 된 틀에서도 신비로운 것이나 영적인 것이 보일 때가 있고, 그때 사람들은 거기에 관심을 쏟곤 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는 우리의 관심을 잘못된 곳으로 돌리는 것이다. 자세히 보면 우리 일상도 특별한 것들, 경이로운 것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우리는 '현실적'이어야 한다면서 이런 것들을 그저 당연히 여기고 지나쳐 버린다. '현실적인 태도'가 오히려 진짜 현실, 우리 눈앞에서 일어나는 놀라운 현상들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