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종근 목사의 ‘하위렴 선교사 조선 선교행전’(18)

오피니언·칼럼
기고

영흥학교 교장으로 사역하다

백종근 목사

1903년 유진벨에 의해 시작된 남학교는 원래 소학교 과정으로 출발했으나 1907년이 되면서 중학교 과정이 신설되었다. 과정만 나뉘었지 여전히 한 지붕 밑에서 겨우 3명의 교사가 110명이나 되는 학생을 맡아 가르치고 있었다. 하위렴이 목포에 부임하던 그해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아무튼, 부임 당시(1909) 하위렴이 교실에서 마주한 학생들에게 받았던 인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해 두었다.

"남학생들의 품행과 학업은 양호했다. 가을철에 야외활동이나 봄철의 소풍으로 즐거운 시간을 갖기도 했다. 연중행사 가운데 선교회 활동으로 한 달에 2회 저녁에 만났으며, 그것과는 별도로 두 번의 토론회를 열기도 했다. 성탄 절기에는 12명을 뽑아 여행경비를 주고 두 사람씩 짝을 이루어 시골을 돌며 전도하게 했다. 학생들은 모두가 자신이 뽑히길 원해, 후보를 선출하는 과정은 상당히 흥미로웠다."

그 이듬해에는 학생 수가 135명으로 늘었으나 그들 중 가정 형편이 어려운 63명은 기숙사비를 벌기 위해 일을 해야만 하는 형편이었다. 하위렴 선교사는 실질적으로 그들을 도울 방법을 궁리한 끝에 스테이션 건축 공사장에서 일을 거들게 하고, 학생들에게 급료를 지급하도록 하는 거였다.

"스테이션 조성공사에 잡일을 거드는 보조 인부로 봉사하게 하자, 3개월 동안 평균 참석자가 47명 정도가 되었다. 학생들은 매일 3시간 반씩 일하고 한 달에 3엔씩 받으면서 공사장 주변 정리와 자재 운반과 같은 잡일을 하면서 학비를 벌었다. 그들의 급료는 노동자의 임금을 참작해 그들 임금의 1/3 정도를 지급했다."

그나마 이 일도 날씨가 좋지 않다든지 혹은 감독자가 결근하거나 장비가 부족해서 할 수가 없을 때는 근로 학생들의 절반 정도는 일이 없어 돌아가야만 했다. 하위렴 선교사는 일거리가 없어 돌아가는 학생들을 바라볼 때마다 그들의 학비 마련을 걱정하며 함께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이처럼 가정 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계속할 수 없는 학생들이 점차 늘어나자 하위렴은 군산 영명학교에서 시행했던 것처럼 아예 학교에서 실과를 시범 운영하기도 했는데, 일종의 실기 교육과정으로 학생들에게 목공 기술을 가르쳐 학비로 연결될 수 있게 했다.

그는 학원 선교의 현장에서 실기교육의 절실함을 느낀 하위렴은 연례회의 때마다 실업교육의 관심을 촉구하며 안건으로 올렸으나 논제의 중심이 언제나 '교회 지도자를 양성하는데 실업교육이 과연 필요한가'로 흘러가면서 더 이상의 진전을 볼 수가 없었다. 결국, 기술교육은 학생들의 학비 마련을 위한 과정으로만 그쳤지, 정식 학과목으로 발전되지는 못했다. 그 이후로도 하위렴은 자신의 경험과 사례를 들어 실업교육을 전담해줄 전문인력의 파송을 해외 선교부에 여러 차례 건의했으나 동의를 얻어내지 못했다.

하위렴의 제안 이후에도 다시 레이놀즈가 해외 선교부에 실업교육의 필요성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며 인력과 예산을 청원한 적이 있었으나 해외 선교부에서도 선교에 있어서 교육 사역은 교회 지도자양성에 목적이 있지 교육을 사업화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교육 사역에서 실업교육은 배제한다고 못을 박음으로써 오랫동안 이어왔던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다.

사실 하위렴이 영흥학교 교장으로 사역하는 동안 가장 하위렴을 곤혹스럽게 만든 것은 앞에서 언급한 실업교육의 확대 시행의 여부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기독교 학교에 대한 총독부의 간섭이 점차 심해지고 있는 점이었다. 그들은 매월 학교에서 사용하는 교재와 수업내용은 물론 심지어 학교에서의 모든 일상까지도 보고하게 하는 등 선교사들의 사생활까지 침해하는 일이 다반사였기 때문이었다.

"총독부에서는 최근 들어 부쩍 우리 학교에서 사용하는 책과 사용하지 않는 책은 무엇이며, 부르지 않는 노래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등을 묻는 공문을 보내곤 했다. 심지어 연료사용 경비 내역과 선교사의 사례 액수까지 자세한 보고를 요구해 왔는데, 모든 질문서의 내용이 한자로 쓰여있어서 번역을 따로 해야만 이해할 수가 있었다. ...(중략)... 나를 강제로 자리를 비우게 하고, 임시 휴교 조치를 강행했던 위기가 두 번이나 있었다. 국면이 이렇게 전개되는 상황에서 학교를 성공적으로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선교사의 임석臨席과 단속團束이 필수적이라 생각되어 이번 연례회의에서 적절한 대책이 세워지기를 희망하고 있다."

전라노회 창립에 참여하다(1911)

1911년 대리회(代理會; Sub-Presbytery)를 노회로 개편한다는 독노회의 결정에 따라 독노회 산하 7개 대리회를 7개 지역 노회로 개편 조직했다. 이로써 조선 장로교는 선교 한세대 만에 노회 정치체제의 성공적인 안착을 이루며 뿌리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전라대리회 역시 1911년 10월 15일 전주 서문밖교회에서 회집을 하고, 전라노회로 개편하면서 임원을 선출하고 노회 시대를 열었다. 당시 전라노회 창립 당시 회원구성을 보면, 목사회원이 배유지, 이눌서, 류서백, 부위렴, 강운림, 최의덕, 마로덕, 고라복, 타마자, 하위렴, 이기풍, 김필수, 윤식명 등 13명이었으며, 장로회원으로는 양성률, 최흥서, 서영선, 신경운, 이승두, 최국현, 조덕삼, 이원필, 류기택, 최학삼, 이자익, 위위렴W. A. Venable, 오인묵, 김응규(유고로 불참) 등 14명으로서 총대는 모두 27명이었다.

임시회장인 김필수 목사의 사회로 노회를 이끌어갈 임원과 각부 위원을 선출했다. 이때 하위렴은 이눌서 선교사, 류기택 장로와 함께 규칙위원을 맡아 노회 조직의 틀을 함께 세웠으며 창립 당시 전라노회의 조직도는 다음과 같다.

회 장 : 김필수 목사
부회장 : 배유지(Eugine Bell) 목사
서 기 : 이승두 장로
회 계 : 최국현 장로, 최의덕(Lewis B. Tate) 목사

정사(定事)위원-배유지(Eugine Bell), 이기풍, 최흥서
헌의(獻議)위원-서영선, 부위렴(William F. Bull), 이승두
재정(財政)위원-이자익, 고라복(Robert T. Coit), 강운림(William M. Clark)
규칙(規則)위원-하위렴(William B. Harrison), 이눌서(William D. Reynolds), 류기택
학무(學務)위원-김필수, 류서백(John S. Nisbet), 위위렴(W. A. Venable)
정치(政治)위원-윤식명, 최의덕(Lewis B. Tate), 최학삼
검사(檢査)위원-未擇

전라노회의 창립(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하위렴 선교사)

남장로교 내한 선교부에서는 조선예수교장로회의 7개 노회 가운데 전라노회의 지역 범위가 일단 자신들의 선교구역과 일치하고 있는 점에 만족감을 표시했으며 1914년 8월 총회로부터 제주 선교를 전라노회가 주관하는 것으로 허락을 받았다.

사경회(査經會) 강사로 참여하다

앞에서 언급했듯 각 지역 선교지부에서 해마다 열리는 중사경회(Station Bible Class) 행사에는 다른 지역 선교지부의 선교사들을 강사로 불러 개최하는 관례에 따라 1910년 2월 1일 군산에서 개최된 사경회에 하위렴 선교사가 강사로 초청되었다. 그는 설교학과 소요리 문답 등 2과목을 가르쳤는데 참석자는 260명 정도 되었다.

하위렴이 군산에서 사역할 당시(1906) 처음 개최되었던 중사경회에 60여 명이 참석한 것에 비하면 놀라운 발전이었다. 이듬해 1911년 2월에는 목포지부가 주관하는 남녀 사경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순천 선교지부 개설을 위한 타당성 조사

1910년 남장로교 내한 선교부에서는 호남 남동부지역에 또 다른 지부 설치를 계획하고, 광주와 목포지부에 속한 선교사들에게 타당성 여부를 조사하게 했다. 목포지부에서는 하위렴이 위원에 지명되었다. 소속 위원회의 대다수 위원은 광주에서 출발했으나 하위렴은 목포에서 혼자서 말을 타고 1,280Km의 순회 일정을 마치고 광주로 가서 위원들을 만났다.

위원들과 함께 순천지역을 돌아보고 순천이 지부 설치에 적절한 조건을 갖춘 장소라는데 동감했으나 선교부의 예산과 인력이 아직 미치지 못하는 현재 상황으로 비추어 볼 때, 가까운 시일 내에 스테이션을 여는 것은 불확실해 보인다고 하위렴은 판단했다. 왜냐하면, 목포지부에 대한 선교사 충원요청에도 해외 선교부의 반응이 늦어 안타까워했던 터라, 하위렴은 개인적으로는 순천지부의 개설에 회의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백종근 목사는

한국에서 공과대학과 대학원을 마치고 산업연구원(KIET)에 책임연구원으로 근무하다 미국에 유학 후 다시 신학으로 바꿔 오스틴 장로교 신학교(Austin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에서 M.Div 과정을 마치고 미국장로교(PCUSA)에서 목사가 되었다. 오레곤(Portland, Oregon)에서 줄곧 목회 후 은퇴해 지금은 피닉스 아리조나(Phoenix, Arizona)에 거주하고 있다. 지난 펜데믹 기간 남장로교 초기 선교역사에 매몰해 『하나님 나라에서 개벽을 보다』와 『예수와 함께 조선을 걷다』 두 권의 저서를 냈으며 그 가운데 하위렴 선교사의 선교 일대기를 기록한 『예수와 함께 조선을 걷다』는 출간된 지 일 년도 되지 않아 스탠포드 대학과 프린스턴 대학에 이어 시카고 대학 도서관 Koean Collection에 선정되어 소장되기도 했다.

백종근 목사는 하위렴 선교사 기념사업회를 설립해 초기 남장로교 조선 선교역사를 발굴하고 공유하는 일에 전념하고 있으며 미국과 한국에서 설교와 세미나를 인도하고 있다. 최근에도 남장로교 선교사 부위렴(William F. Bull)의 선교행적을 정리해 집필하는 한편 디아스포라 선교역사 연구회를 결성해 미주 한인 교회 역사를 찾아 복원하는 일에 빠져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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