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기독교 변증가이자 작가인 로빈 슈마허의 기고글인 ‘성경에서 가장 불쾌한 이야기’(The most irritating story in the Bible)를 25일(현지시간) 개제했다.
기독교 변증가로 활동하고 있는 슈마허는 작가로도 활동하면서 많은 책을 냈고 미국 내의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매번 성경을 읽을 때마다 "이게 도대체 뭐지?"라는 생각이 들며 고개를 저으면서 멈춰 서게 된다.
회의론자들은 성경이 단지 동화집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곤 한다. 그러나 성경 속 이야기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를 고르라면, 나는 세례 요한의 죽음을 선택할 것이다.
이 이야기는 정의가 승리하고, 영웅이 극적으로 반격에 성공하는 "기분 좋은 이야기"의 정반대를 보여준다. 예를 들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 이야기나, 고난의 끝에 “당신들은 나를 해치려 했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창세기 50:20)라고 선언한 요셉의 이야기가 그렇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경우, 악인이 승리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없다”(마태복음 11:11)라고 말씀하신 인물이 이렇게 끝난다는 건 뭔가 어색하게 느껴진다. 이 이야기를 어떻게 분석해도 여전히 의문만 남는다.
마태복음 14장 1-12절과 마가복음 6장 14-30절은 요한이 헤롯과 헤로디아 때문에 감옥에 갇혔다고 기록한다. 헤롯은 “자기 형제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잡아 가두었다. 요한이 헤롯에게 ‘그 여자를 아내로 두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했기 때문”이다(마태복음 14:3-4).
요한은 “진리는 증오를 낳는다”(Veritas odium parit)라는 라틴어 표현을 몸소 체험했다. 이후 이야기는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악한 왕, 음모를 꾸미는 왕비, 그리고 왕비의 딸이라는 도구가 결합해, 세례 요한의 목을 “쟁반에 담아 달라”(마태복음 14:8)는 끔찍한 요청을 하게 만든다.
결국, 모든 악이 요한에게 덤벼들고 그들은 승리한 것처럼 보인다. 요한은 살해당했고 이야기는 그렇게 끝난다. 범죄를 저지른 자들에게 아무런 심판이 내려지지 않는다.
영국 목사 매튜 헨리는 이 결말에 불만을 느꼈는지 자신의 주석에서 이렇게 썼다. “그렇게 해서 그 음성은 침묵했고, 타오르고 빛나던 등불은 꺼졌다. 신약의 엘리야였던 그 예언자는 강압적이고 음란한 여인의 분노에 희생되었다.”
“음란한 여인”? 보통 점잖은 퓨리턴조차 이 사건에 화가 났던 듯하다.
“아,” 당신은 생각할 것이다.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이 악당들이 결국 이 생애에서 대가를 치렀을 거야.” 글쎄, 당신이 판단해 보라.
역사가 요세푸스는 헤롯과 헤로디아가 로마 황제 칼리굴라에 의해 갈리아로 추방되어 그곳에서 죽었다고 전한다. 또 헤로디아의 딸에 대해서는 얼음판 위를 걷다 물에 빠져 목이 잘렸다는 미확인 이야기도 있다. 이 이야기는 너무나 통쾌하게 들리지만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
결국, 이 땅에서는 악인들이 그들의 죄에 대한 뚜렷한 심판을 받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선행은 대가를 치른다
요한의 사건이 감정적으로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는 그런 식으로 죽은 유일한 하나님의 예언자가 아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보내심을 받은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마태복음 23:37)라고 말씀하시며 이를 언급하셨다. 스데반은 자신을 돌로 치는 자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너희 조상들이 박해하지 아니한 선지자가 누구냐?”(사도행전 7:52).
선지자들을 향한 적대감은 우리를 분노하게 하지만,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로마서 8:7)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요한의 죽음은 끔찍한 불의였지만, 이사야처럼 톱으로 잘려 죽었다고 전해지는 다른 이들에 비하면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헨리는 이렇게 말한다. “복음의 첫 번째 설교자였던 요한의 이러한 특별한 고난은 복음의 신앙고백자들에게 속박과 고통이 따를 것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구약의 첫 번째 성도처럼 신약의 첫 번째 사역자도 순교로 죽었다. 만약 그리스도의 선구자가 이와 같이 대우받았다면, 그의 제자들이 세상으로부터 환영받을 것을 기대하지 말라.”
게다가 이러한 일들은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다.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길을 곧게 하라”(마태복음 3:3)는 자신의 부름을 완수했다.
분노의 이유
그럼에도 요한의 이야기는 여전히 내 속을 뒤집는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에드워드 존 카넬 박사는 우리가 이러한 일에 대해 느끼는 분노를 “사법적 감정”이라고 부르며, 이는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 안에 새겨진 일부라고 말한다. 그는 “양심은 자신을 고발하지만, 사법적 감정은 타인을 고발한다... 모든 격분한 사법적 감정은 하나님의 형상이 훼손되고 있다는 하늘의 경고일 뿐이다”라고 설명한다.
성경은 궁극적으로 이러한 분노가 언젠가는 해소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 생에서가 아닐지라도, 다음 생에서는 반드시 이루어진다.
요한이 경험한 악행 같은 경우는 기다림이 좌절감을 준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순교자들을 위한 심판이 미래에 있을 것이라고 증언한다.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 때문에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더라. 그들이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만 더 쉬라.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요한계시록 6:9–11).
이는 헤롯, 헤로디아, 그리고 그녀의 딸에게 심판이 임할 것임을 의미하며, 이 땅에서 보이지 않을지라도 이루어질 것이다. 에이든 윌슨 토저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심판의 수레바퀴는 천천히 굴러갈 수 있지만, 그 굴레는 매우 정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