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NCCK 회장의 지적에 드는 괴리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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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정기총회에서 회장에 선임된 조성암(암브로시오스 조그라포스) 대주교가 최근 서울 마포구 한국 정교회 성 니콜라스 대성당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기자들에게 한 말이 화제다. “한국에는 가족 간 유대, 사람들 사이의 정, 챙겨주는 문화, 흥과 노래, 춤 등 아름다운 전통이 많은데 왜 미국 스타일을 따라가는지 안타깝다”라고 했다.

그리스 출신으로 26년간 한국에서 사목으로 사역해 온 그는 “얼마 전 한 결혼식에 갔다가 하객들이 예식을 지켜보지 않고 축의금 낸 후 곧장 식사하러 가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가 한국에 부임했던 초기 결혼식 풍경은 그러지 않았다. 예전에는 결혼식장 가면 다 함께 인사를 나누고, 하객도 풍성했는데 지금은 형식적으로 의례를 치른다”라고 아쉬워했다.

조 대주교의 이런 언급은 한국 사회에 사랑과 소통이 부재한 현실을 우회적으로 꼬집은 것으로 보인다. 최근의 결혼식 문화를 예로 들어 가족 간 유대, 사람들 사이의 정이 사라지는 세태를 비유적으로 지적한 것이다.

그런데 한국적인 전통과 아름다운 정서가 점차 옅어지는 것을 미국 스타일을 모방하는 것에 연결한 건 선뜻 동의가 안 된다. 한국이 미국의 결혼식을 문화를 닮아간다는 것인지 미국 결혼식에는 정과 소통이 안 담겨있다는 것인지 의미가 명확하지 않아서다.

조 대주교가 지적한 최근 한국 결혼식 세태는 일면 공감이 가는 부분이 있다. 결혼식은 젊은 남녀가 부부로 맺어지는 날을 마음 깊이 축하하는 자리인데 그 중요한 의식을 생략한 채 부조금만 내고 피로연장으로 직행하는 모습은 결혼식의 의미를 반감시키는 요인이다. 이런 풍경이 외국인의 눈에 더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 결혼예식은 사랑하는 남녀가 부부가 됨을 알리는 의미도 있지만 두 사람을 성인이 되기까지 키워온 양가 부모, 즉 집안 간의 대사로 여긴다는 게 서양의 결혼 문화와 다른 점일 것이다. 그런 다양한 관계 안에서 부조를 통해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독특한 문화로 정착하게 된 것이다.

사실 조 대주교가 예로 들은 결혼식 풍경은 많은 부분이 생략돼 있다. 하객들이 축의금을 낸 뒤 피로연장으로 직행하는 걸 정이 없고 형식적이라고 했는데 모든 결혼예식이 이에 해당하지는 않는다. 요즘은 원탁에 하객들이 둘러앉아 예식을 참관하고 모든 예식 순서가 끝난 후에 음식이 제공되는 결혼식도 흔하다.

부조만 하고 피로연장으로 직행하는 최근의 결혼식 문화에 대해 부정적인 말들이 많지만 이를 꼭 부정적으로만 볼 일은 아니다. 예식 홀이 좁아서 모든 하객을 한꺼번에 수용할 수 없는 경우도 허다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신랑 신부 또는 양가 부모에게 축하 인사를 전하고 자리를 뜨는 게 예식 진행에 도움이 된다. 그런 현실에서 어려운 걸음을 해준 하객에게 음식 대접을 하는 건 우리만의 정(情)일 것이다.

그는 또 학생들 사이에도 ‘사랑’이 부족해 보인다고 지적했다. 국내 한 대학에서 학생들을 접하면서 느낀 점에 대해 “우리에게 지금 부족하고,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은 바로 사랑”이라고 했다. 과거에는 학생들이 쉬는 시간이면 서로 대화하고 함께 어울리는 것이 자연스러웠지만, 최근에는 스마트폰이나 태블릿PC에 몰입하느라 바로 곁에 있는 친구들과 대면 소통을 잘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조 대주교의 이런 언급은 그 자체에 의미를 부여했다기보다는 우리 사회의 사랑과 소통의 부재를 거론한 것으로 해석된다. 지난 26년간 한국에서 정교회 사제로 사역하며 느낀 점, 특히 한국인들만의 장점이 사라져가는 것에 아쉬움을 토로한 표현일 것이다.

조 대주교는 지난 2016년 11월 한국 정교회 대주교로는 처음으로 NCCK 회장에 선임됐다가 8년 만에 다시 회장에 선임됐다. 예장 통합, 기감 등 주요 교단의 총회장도 일생에 한번 하기도 어려운 자리를 두 번이나 맡게 된 것이다.

그런 NCCK 회장이 한국인의 정 문화에 대한 소회를 밝힌 건 다소 의외다. 창립 100주년을 앞둔 NCCK 수장이라는 막중한 책임을 지는 위치에서 이보다 훨씬 중요한 과제가 훨씬 많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물론 그는 같은 날 배포한 회견문에서 “기후 위기로 인한 고통은 심한 양극화와 자본에 의한 불평등과 차별 속에서 가장 약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더 가중되고 있다”며 탄소배출을 최소화와 기후정의 실현을 위해 행동을 강조했다. 그렇지만 지난 18일 총회에서 채택된 ‘NCCK 100주년 사회선언문’ 등 NCCK 향후 과제에 대해 이렇다 할 방향 제시가 없었던 점은 못내 아쉽다.

NCCK는 이 선언문에서 ‘일한 만큼의 몫을 가져가고 인간다운 삶이 가능한 정의로운 사회’, ‘다양한 이념과 가치가 경쟁하며 소통하는 정치 민주화’, ‘생명 존중과 인간 존엄을 보장하는 디지털 문명’,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대한 체계와 사회적 신뢰 회복’ 등을 추구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한국교회는 동성애와 포괄적 차별금지법과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데 NCCK가 설정한 정의로운 사회, 정치 민주화, 국민의 생명과 안전 등의 명제는 다소 괴리감이 느껴질 수밖에 없다. 한국교회의 역사적 산물인 NCCK가 한국교회와의 동질감에서 자꾸 멀어지는 건 복음적 시각에서 바람직하다 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