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회사역
하위렴 선교사가 부임하기 전 목포지부의 유진 벨과 오웬Clement. C. Owen, 변요한John F. Preston 등의 선교사들과 조사 변창연의 헌신적인 노력에 힘입어, 이미 여러 지역에 교회들이 세워져 있었기 때문에 일단 하위렴 선교사는 교회들을 순회하며 돌보는 일에 몰두해야만 했다. 부임하던 그해(1909년)만 하더라도 자신의 시찰 구역에서만 자그마치 447명을 학습 교인으로 받고, 242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앞서 언급한 대로 대리회(代理會; Sub-Presbytery) 체제를 유지하던 독노회가 7개 지역 노회로 개편되자, 이에 따라 회집된 전라노회에서는 회무 처리와 함께 선교사들의 활동 지역을 재편하고 사역을 재조정했다. 이때 하위렴 선교사에게는 해남, 강진, 장흥, 영암 4개 군이 맡겨졌으나 그 당시 그는 목포지부 사역을 전체적으로 총괄하고 있었기 때문에 순회 사역에만 전념할 수 없어 순회지역의 절반을 동사목사인 윤식명과 나누어 맡았다.
"처음부터 순회 사역에만 전념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순회지역의 절반을 동사목사인 윤식명에게 맡겼다. (중략) 순회 여행이 가능하게 된 것은 5월 말이 되어서였다. 순회지역의 교회에서 방문해 달라는 많은 요청에 일일이 부응할 수 없다는 것이 가장 안타까운 점이었다. 이 지역의 교회들은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는 곳이 많아 조직이 잘 되어있지 않았고, 지도 감독을 필요로 하는 곳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런데도 내가 받은 보고들은 대개 고무적인 내용이었다. (중략) 내가 방문했던 한 곳에서는 32명의 학습 교인 가운데 17명이 세례 문답에 통과되어 세례를 받았고, 학습 문답에는 67명이 지원했으나 그중 40명만이 통과되었다."
지역교회들로부터 밀려드는 순회 요청에 무리한 강행군을 하다 도중에 과로로 쓰러진 적도 있었다. 외딴 초가집의 빈방에 누워 물 한 모금조차 마실 수 없을 정도로 온종일 신열身熱에 시달리면서도 마땅한 통신수단이 없었던 때라 어디에도 연락을 취할 수가 없었다. 이런 절박한 상황 중에도 예정된 순회 일정에 차질이 없도록 자기를 대신해 조사를 보내 예배를 인도하게 했다.
"순회 중 방문했던 두 번째 장소에서 몸이 아파 온종일 오두막에 틀어박혀 지냈는데 나는 돌아갈 힘이 있을 때 속히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야말로 최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타깝게도 아파서 순회를 계속할 수 없었던 교회들은 조사와 권서인들의 신실한 인도로 대신해야만 했다."
외진 폐가에 홀로 누워 밤을 지새우는 동안, 동료 선교사 오웬이 순회 중 폐렴으로 쓰러졌던 일을 불현듯 떠올리며 두려움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핍박과 굶주림과 추위로 시달린 사도 바울의 선교 여정을 생각하며 스스로 위안을 삼기도 했다.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후 11:27-28)
비록 삼 년 남짓한 목포 선교였지만 순회 구역의 각 교회 당회장의 권리를 위임받아 순회하면서 점점 외연外延을 넓혀 가기 시작했다. 1911년에만 하더라도 강진과 장흥을 21일 동안 288Km를 여행했는데 48Km는 배로 다녔고, 48Km는 말을 탔으며 나머지 192Km는 걸어서 다녔다. 그는 순회 일정 중에 갑작스럽게 닥친 한파로 추위에 떨기도 했으며, 생각지도 못했던 돌발적인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언젠가는 순회하다가 타고 가던 말이 갑자기 뛰어오르는 바람에 말에서 떨어져 나둥그러지고 말았다. 너무도 갑자기 당한 일이라 땅바닥에 팽개쳐진 채 잠시 정신을 잃었지만, 크게 다친 데는 없었다. 일어나 짐을 챙기고 주위를 둘러보며 안심은 했으나 머리를 땅에 찧던 순간을 생각하면 도저히 다시 올라탈 용기가 나지 않아 고삐만 붙들고 다음 순회지까지 25마일이 넘는 여정을 걸어서 가기도 했다. 또 하나 잊을 수 없이 고통스러웠던 경험 중의 하나는 바람막이가 전혀 없는 배를 타고, 거의 얼어버릴 것 같은 추위에 살을 에는 듯한 바람을 가르며 4시간이나 떨었던 적도 있었다."
그는 후에 이때의 순회 여정을 회고하며 '만약 이러한 일들을 고통스럽다고만 여겼다면 전도자로서 자신의 특권이 복음 증거에 있다는 것을 망각하는 것이었을 것'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웃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일일이 지역교회를 순회하며 예배를 인도하고 성례를 베풀었으며, 직분자를 세워 교회를 이끌도록 했다. 한편 순회 여정을 함께하며 자신을 도왔던 조사들은 물론 어려운 상황에서도 교회를 세워가는 평신도 지도자들의 수고에 대해서도 감사를 빠뜨리지 않았다.
"12개 교회를 방문해서 그들을 점검했다. 주일학교를 조직하고, 제직 임명과 문답 그리고 성례와 치리를 시행했다. 문답 지원자 174명 가운데 100명을 학습 교인으로 받았으나 15명은 거절되었으며 이미 전에 문답을 받았던 26명은 학습 교인으로 받고, 33명에게는 세례를 베풀었다. 순회 일정 동안 우리와 함께했던 조사 김 씨와 최 씨의 뜨거운 열심과 신실한 수고에 대한 마땅한 대가를 잊어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교회를 이끌어온 리더들의 사랑과 헌신에 대해서도 감사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한편 선교 초기 시절에는 조사로 활동하던 권서인들의 역할도 컸는데 그들은 주일에는 교회에서 교인들을 돌보다가 주중에는 쪽 복음과 전도지를 들고 전도하면서 성경책을 팔기도 했다. 그들은 전도하는 도중에도 상대방이 성경에 관해 묻기라도 하면 자세히 답변을 해주기도 하고, 어려움이 있다거나 고통을 호소하는 자를 만나면 그들을 붙들고 기도를 해주기도 했다.
당시 조선의 어느 지역도 사정은 마찬가지였겠지만, 하위렴 선교사의 순회지역의 농민들 역시도 가난한 소작농이 대다수였다. 한 해 동안 땀을 흘리며 등이 휘도록 일 년 내내 농사를 지어도 추수가 끝나면 높은 소작료를 지주에게 떼이면서도 세금은 그들 몫으로 돌아왔다. 게다가 빌려 쓴 비료대금은 물론 심지어 수리 조합에 내는 수세까지 차주借主에게 갚고 나면, 겨울을 나기도 전에 이미 쌀독은 바닥나기 일쑤여서 이듬해 봄까지는 겨우 죽으로 연명하거나 굶주려야만 했다.
옆에서 보는 것조차도 힘이 들 정도로 궁벽한 삶을 사는 가난한 교인들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얼마 되지 않는 양식까지도 건축헌금으로 바쳐가며 서너 평 정도밖에 되지 않는 예배 처소라도 세우고자 하는 교인들을 만날 때면 그 순수한 믿음과 헌신이 눈물겹기까지 했다.
"전혀 수입이 없는 가난한 부녀자들은 매달 한 홉 정도의 쌀을 주머니에 담아 들고 나왔다. 이런 주머니 쌀을 모아 팔아 교회 건축기금으로 모았다."
이처럼 빈궁한 사람들이 위로를 찾아 교회로 모였다. 그들은 교회 벽에 붙여놓은 '나는 너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라'(요 14:2)라는 그 성구의 의미도 잘 모르면서 '처소를 예비하러'라는 말만으로도 위로를 받는 듯했다.
지역을 순회하며 각계각층의 다양한 교인들을 만나다 보면 종종 믿음을 가진 자들로 인해 형용할 수 없는 기쁨으로 뿌듯할 때도 있었지만, 반면에 교회에 다니면서도 전혀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자나, 믿는다고 하면서도 죄의 유혹에 빠져 넘어진 자들을 만날 때면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교인은 문답하는 도중에 자신의 죄를 언급하는 내용이 나오기라도 하면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당한 고난을 들을 때면 큰소리로 흐느껴 우는 사람도 있었다.
대개는 남정네들보다는 오히려 부녀자들이 복음을 더 귀하게 여기고 감사함으로 받는 진지함을 보였다. 말씀을 듣고 상처받은 자아가 치유되고 회복되면서 부녀자들은 노소를 불문하고 글을 배우고자 하는 열심을 내기도 했다. 자식이 없는 과부, 구박받는 부인네들, 집에서 쫓겨난 여자아이들에게는 성경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한편 하위렴 선교사가 집을 떠나 예정에 없던 순회로 일정이 길어질 때면, 편지를 써서 만삭인 아내와 돌이 지난 딸 셀리나의 안부를 묻기도 하고, 지역교회의 크고 작은 사정을 알리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에드먼즈는 남편이 보내온 지역교회의 소식을 정리해 다시 KMF(Korean Mission Field)에 기고하기도 했다.
"1월 11일 하위렴 선교사의 부인이 목포에서 남편으로부터 받은 편지를 인용해 다음과 같은 기사를 보내왔다."
"월요일 4개 교회에서 110명을 문답했고 20명의 세례와 68명을 학습 교인으로 받았으며 한 사람을 교인명부에서 삭제하기도 했다. 이번 순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 내에서 행해지던 변법을 치리하고 나머지 교인들에게는 격려해준 점이었다."
하위렴은 순회하는 동안 문답을 하고 성례를 베풀며 교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도 했지만, 교회공동체의 규범을 위반해 용납할 수 없는 자들이 있다고 판단되면 치리를 통해 당사자들을 교인명부에서 단호하게 삭명削名해 교회를 바르게 세워가는 일에 권징의 필요함을 보여주기도 했다.
한편 에드먼즈는 '오직 믿음'으로만 교회 건축을 이뤄낸 교인들의 이야기도 기고했는데 7평 정도의 아주 비좁고 보잘것없는 예배 처소에서 모이던 교인들이 힘을 모아 70평짜리 건물을 마련한 놀라운 사례를 들면서 2,000날을 연보했다는 형제를 언급하기도 했다. 어림잡아도 3년의 세월을 교회 건축에 헌신하며 1,000냥이나 되는 돈을 헌금했다는 이야기도 썼다.
"마지막 방문한 교회는 원래 7평 남짓한 지붕이 아주 나즈막하고 작은 교회였는데, 교인들이 힘을 모아 70평짜리 건물을 세우고 한쪽 면은 회칠하고 나서 창문과 문을 달았다. 그 후 내가 그 교회를 방문했을 때 한 형제가 나와 며칠 전에 강풍으로 날아가 버린 교회 지붕을 보수하고 있었다. 그 형제는 교회를 건축할 때 2,000날을 연보하고 1,000냥이 넘게 헌금했다."
이 당시 1,000냥의 가치가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일본 엔(Yen)화가 쓰이던 시절에도 일부 지역에서는 여전히 구한말의 화폐인 양(兩/Yang)이 통용되고 있었다는 것도 흥미롭다.
에드먼즈는 기고문 말미에 자신이 하위렴으로부터 전해 들은 대로, 믿지 않는 가정에서 믿는 자녀들이 어떻게 핍박받고 있는가를 전하면서 불신 부모들의 무지한 인식을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내가 위의 글을 쓰고 난 이후에 16살 되는 아가씨가 문답을 받았는데 그녀는 자기 아버지가 자신이 교회에 나간다는 이유로 그녀를 회초리로 때려 집 밖으로 쫓아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해 하위렴 선교사가 순회 사역을 하며 세례를 베푼 총인원이 12개 교회에서 86명에 이르렀을 뿐 아니라 해남에 교회를 개척하기도 했는데, 이때 설립한 교회가 해남군 읍내교회로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史記)는 그 설립과정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1910년 해남군 읍내교회가 성립하다. 먼저 선교사 하위렴이 조사 김영진을 파송하여 이 마을에 전도한 결과 김채윤 등 몇 사람이 믿고 남문외교회에 내왕하더니, 신자가 늘면서 대정 마을에 예배당을 세웠는데 그 후 이 마을에 이전하니라. 선교사 맹현리와 조사 마서규, 김달성, 최병호, 원덕찬, 조병선 등이 상속 시무하니라."
그 후 해남읍 교회는 해남의 모교회로서 지역 전도에 앞장을 서, 많은 포자 교회 분립을 통해 성장을 거듭했으며 해남의 그룬트비라 불리는 이준묵 목사와 전 한신대 총장 오영석 목사와 같은 인물들을 배출하기도 했다.
백종근 목사는
한국에서 공과대학과 대학원을 마치고 산업연구원(KIET)에 책임연구원으로 근무하다 미국에 유학 후 다시 신학으로 바꿔 오스틴 장로교 신학교(Austin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에서 M.Div 과정을 마치고 미국장로교(PCUSA)에서 목사가 되었다. 오레곤(Portland, Oregon)에서 줄곧 목회 후 은퇴해 지금은 피닉스 아리조나(Phoenix, Arizona)에 거주하고 있다. 지난 펜데믹 기간 남장로교 초기 선교역사에 매몰해 『하나님 나라에서 개벽을 보다』와 『예수와 함께 조선을 걷다』 두 권의 저서를 냈으며 그 가운데 하위렴 선교사의 선교 일대기를 기록한 『예수와 함께 조선을 걷다』는 출간된 지 일 년도 되지 않아 스탠포드 대학과 프린스턴 대학에 이어 시카고 대학 도서관 Koean Collection에 선정되어 소장되기도 했다.
백종근 목사는 하위렴 선교사 기념사업회를 설립해 초기 남장로교 조선 선교역사를 발굴하고 공유하는 일에 전념하고 있으며 미국과 한국에서 설교와 세미나를 인도하고 있다. 최근에도 남장로교 선교사 부위렴(William F. Bull)의 선교행적을 정리해 집필하는 한편 디아스포라 선교역사 연구회를 결성해 미주 한인 교회 역사를 찾아 복원하는 일에 빠져 있기도 하다.
#백종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