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79) 친구 사이

오피니언·칼럼
설교
요15:13-17
이희우 목사

「런던 타임즈」는 ‘친구’라는 말의 정의에 대한 현상 공모를 한 후 우수작 셋을 뽑은 바 있다. 3등은 “기쁨을 더해주고 슬픔을 나누는 사람”이라는 것이었고, 2등은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이라는 정의였다. 그리고 1등은 “온 세상이 다 떠나고, 다 나를 버려도 오히려 내게로 오는 사람, 즉 끝까지 곁에 있는 사람”이라 했다. 끝까지 곁에 있기가 쉬운가? 그런데 성경은 임마누엘(עִמָּנוּאֵל), 하나님께서 끝까지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약속한다. 성경 최고의 약속이다.

스티브 존슨(Steven Johnson) 박사는 “곤경에 처할 때 금방 부를 수 있는 친구가 있는가? 내가 부르면 당장 달려올 사람이 있는가?”하고 물었다. 만일 없다면 그 사람은 친구가 없는 사람이다. 함께 기뻐할 사람,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함께 얘기할 사람, 나를 이해하고 내 얘기를 들어줄 사람, 그런 사람을 우리는 친구라 한다.

그런데 “서로 사랑하라”고 하시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14절) 하셨다. ‘친구 사이’라고 하신 것, 주님은 한 걸음 더 다가서셨다.

하나님의 친구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Experiencing God)의 저자 헨리 블랙가비(Henry T. Blackaby)는 『아브라함, 하나님의 친구』(Created to Be God's Friend : Lessons from the Life of Abraham)라는 책을 썼다. 그가 보기에 하나님과 아브라함은 ‘친구 사이’였다. 그 이유는 아마 하나님께서 천사들과 함께 대접을 받으신 후에 아브라함의 집을 떠나면서 하신 말씀이 결정적이었던 것 같다.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창18:17), 당신의 속마음을 아브라함에게 밝히신 것, 그러면서 아브라함을 향한 계획을 밝히셨는데 먼저는 복의 근원이 된다는 것이었고(창18:18), 다음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심판계획이었다.

그 말씀을 듣고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에 있는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과 딜을 한다. 그 모습을 이사야 선지는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벗’이라고 했다(사41:8). 속마음을 터놓는 ‘친구 사이’라는 거다. 하나님이 속마음을 터놓으신 데는 이유가 있다. 블랙가비의 책에 이런 표현이 나온다. “하나님의 친구가 되는 첫걸음은 그분이 명하시는 곳, 그분이 가시는 곳, 그분이 인도하시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르는 순종이다”. ‘어디든 따르는 순종’, 아브라함이 그런 사람이었기에 하나님은 그를 친구로 여기셨다.

출애굽기에 보면 모세도 하나님께서 친구처럼 대하신다.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출33:11), 모세를 친구처럼 대하신 거다.

친구 사이, 얼마나 좋은 표현인가? 간혹 잘 모르면서도 친구라 부르기도 하지만 ‘친구 사이’는 가까운 사이다. 구약에 80회 나오고, 신약에 20회 나오는 이 ‘친구’라는 단어, 본문 다섯 절에 3번이나 나온다. 단연 본문의 핵심 단어이다. 마태가 5번, 바울이 누가복음 4번, 사도행전 4번, 총 8번 썼고, 요한이 요한복음서 5번, 요한삼서 1번, 총 6번 썼다. 그런데 신구약 합쳐서 총 100번 나오는 이 ‘친구’, 구약에는 아브라함과 모세 외에는 비유나 시적 표현으로만 썼을 뿐이었고, 신약에서도 하나님과의 사이를 친구 사이로 표현한 것은 본문밖에 없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친구’라고 하셨다. 헬라어로 ‘필로이’(φιλοι), 이 단어는 ‘필레오’(φιλεω) 곧 ‘사랑하다’라는 단어에서 유래했다. 한때 넷플릭스 드라마로 전세계 최고의 인기였던 ‘오징어 게임’에서는 친구를 ‘깐부’라고 표현했다. 딱지치기, 구슬치기 등 놀이할 때 같은 편을 먹는 은어다. 구슬을 모두 뺏는 사람이 이기는 구슬치기 게임, 목숨을 건 상황에서 한 할아버지가 주인공에게 하나 남은 자기 구슬을 건네주며 “우린 깐부잖아” 그런다. 아마 영어 ‘캄보’(combo)를 깐부라고 한 것 같은데 예수님은 우리를 ‘깐부’라고 하신다. ‘짝꿍’ ‘동지’, ‘친구 사이’라는 말씀이다. 본문에 ‘친구’라는 단어가 반복해서 등장한다. 13절과 14절은 서로를 존중하는 사이라는 뜻이고, 15절은 ‘우리는 친구 사이’라는 선언이다.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주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표현했다. 예수님은 우리 왕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백성, 우리의 주인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종이라는 거다. 그런데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않겠다”고 하신다. 종이나 백성도 선택되고 보호를 받는다는 점에서는 좋은 표현이지만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종의 특징은 주인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한다는 것,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이라 하면 말 그대로 주종관계가 된다.

‘하나님의 백성’ 다음으로 많이 쓰는 표현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다. 매우 긴밀한 관계를 뜻한다. 이스라엘은 종종 하나님의 아들로 불렸다. 요한복음 1장에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했다. 세상에 부모와 자식 관계만큼 긴밀한 것이 어디 있나? 그렇지만 여전히 보호받는 자와 보호자 관계다. 목숨까지도 내어놓을 수 있지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수평적 관계는 아니다.

성경은 우리를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로 표현하기도 했다. 부부관계, 정말 긴밀한 관계 아닌가? 물론 너무 긴밀해서 문제가 될 때도 있다. 바라는 것도 많고 주어야 할 것도 많다. 또 잘못하면 애증관계로 얽히고 지나친 책임감 때문에 힘들어지기도 한다. 너무 배타적이라 관계가 깨어질 수도 있다. 그래서 부부관계는 서로 좀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친구 관계는 개인의 독자성을 유지하면서도 마음을 온전히 터놓을 수 있기에 관계의 꽃이라 할 수 있다. 서로 기꺼이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참 편한 사이, 서로의 짐을 나눌 수 있을 정도로 긴밀하다. 그래서 요즘은 아내를 집사람이 아니라 친구로 소개하기도 한다.

해외토픽이었는데 미국 인디애나주 어느 시골 학교에 열다섯 살 된 한 학생이 있었다. 뇌종양으로 병원에 입원해서 방사선 치료를 받았다. 머리카락이 다 빠지고 말았다. 어느 날 선생님에게 내일 그 아이가 학교에 등교한다는 연락이 왔다. 선생님은 종례시간에 “내일이면 친구가 온다. 그런데 친구의 머리가 다 빠졌기 때문에 너희들이 잘 위로해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선생님이 나간 다음 급우들이 “어떻게 친구를 위로할 것인가?” 토의를 했는데 한 친구의 제안으로 전부가 다 머리를 깎기로 했다. 다음 날 아침 그 반 학생들이 전부 머리를 깎고 등교했다. 선생님은 어떻게 그 아이가 상처받지 않게 하나를 밤새 생각하다가 결론을 얻지 못한 채 출근했다가 깜짝 놀랐다. 선생님은 울었다. 그리고 뇌종양으로 치료를 받고 등교한 아이도 친구들이 너무 고마워서 울고, 아이들도 친구의 등교를 기뻐하며 울어 모두가 다같이 울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머리를 깎아주신 정도가 아니다. 죄인의 친구라 불리움을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실 정도도 아니다. 아예 우리를 위하여 죄 없는 죄인이 되셨다. 그리고 우리의 죄짐을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찬송가 369장). 친구 되신 거다.

주님의 선택으로 시작된 우정

우정은 선택으로 시작되는데 예수께서 우리를 선택해 주셨다(16절). 대단한 가문이나 궁궐에서 태어나지 않고, 비천한 목수의 아들로 짐승의 여물통을 침대 삼아 태어나신 분, 가장 낮고 비천하게 태어났기 때문에 비천한 사람들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그들의 친구가 되기에 충분하신 분, 목숨처럼 사랑했던 제자들로부터 배신당하는 쓰라림을 겪었기 때문에 사랑하고 믿었던 사람의 배신으로 눈물짓고 있는 사람들의 아픔을 아시고 그들의 친구가 되기에 충분하시다. 죄 없이 가장 가혹하고 흉칙한 형벌인 십자가의 형벌을 당하셨기 때문에 억울하게 모함당하는 사람의 고통과 아픔을 아시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시며, 죄인처럼 형벌을 받으셨기 때문에 죄 짓고 죄의식과 두려움에 빠져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아시고 그들을 돕는 친구가 되기에 충분하신 분이다.

그 예수님의 선택이다. 서양 속담처럼 전해지는 명언 가운데 세르반테스(Cervantes)가 처음 한 말로 추정되는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기 원하다면 친구를 보라”는 말이 있는데 예수님이 우리의 친구! 그렇다면 우리는 신분이 바뀐 사람, 최고 축복을 받은 사람이다.

위기상담 전문가 정태기 교수께서 쓴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라는 책에 보면, 정 교수님도 한 때 심각한 신앙의 위기를 당한 때가 있었다며 그때 소록도에 갔던 경험을 고백한다. 알 수 없는 분노 때문에 기도가 나오지 않아 고민하다가 어느 날 무작정 소록도로 갔는데 마침 수요일, 예배당에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예배가 끝나고 통성기도를 하는데, 목사님은 거기서도 기도가 되지 않았다. 그래도 기도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데 뒤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기도 소리가 목사님의 귀를 파고들었다. 가슴을 후벼 파는 소리였다. “하나님, 주신 은혜가 어찌 이리도 큽니까? 주님, 어찌하면 제가 이 은혜를 갚을 수 있습니까? 만 분의 일이라도...”

기도소리를 듣다가 도대체 무슨 은혜를 얼마나 받았기에 저런 기도를 할 수 있나 싶어 뒤를 돌아본 정 목사님은 충격을 받았다. 60이 넘은 듯한 흉측하기 이를 데 없는 늙은 노인, 한센병이 심해 얼굴의 형태를 거의 알아볼 수 없었다. 머리카락이 한 올도 없고, 떨어져 나가 움푹 패인 코, 짓무르다 못해 위아래가 붙어버린 눈... 그 눈으로 노인은 하염없이 눈물을 쏟으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다. 손목뿐인 손바닥으로 박수를 치며 목이 터져라 외친다.

순간 정 목사님도 자신의 가슴 속 뜨거운 것이 울컥 치솟아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곧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 피처럼 붉은 통곡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통곡기도는 두 시간이나 이어졌다. 그리고 기도 후 “뭐가 그렇게 고마우세요? 무슨 은혜가 그렇게 크세요?” 물었더니 노인은 “내가 문둥병에 걸리자 세상도, 피붙이들도 다 나를 버렸어. 물론 친구들도 다 떠났지. 그런데 말이야, 이 소록도까지 나를 따라온 분이 계셨어. 그리고 그 분이 소망과 기쁨을 주셨지” “아, 할머니신가요?” “아니,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셨어!”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도 친구 되시는 예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 아무리 비참한 곳에 떨어져도, 거기서도 주님은 우리와 함께하신다. 그리고 사랑을 다 쏟으신다. 믿는 수준에만 머무르라는 선택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믿는 수준에만 머문다면 친구는 아닌 것, 우리는 그 수준을 넘어야 한다. 주님은 ‘친구 사이’ 되자고, 친구 먹자고 우릴 선택하셨다. 선택의 이유는 사랑이다(13절).

이 선택에 합당한 반응을 해야 한다. 그 반응은 1주일에 한 번 교회에 오는 것이 아니다. 매일 아침의 큐티 정도도 아니다. 삶의 모든 경험을 나누는 것, 하나님과 친구 사이가 되어야 한다. 모든 일을 하나님과 함께하고 코람데오(Coram Deo), 그분의 임재를 의식해야 한다. 하나님과 시간 보내기가 기쁨 되기 바란다. 말씀 묵상이 우정을 나누는 방법이다. 한 문제를 반복적으로 생각하면 그것을 ‘걱정’이라고 부르지만 말씀을 반복해서 생각하면 그것은 ‘묵상’이다. 우리가 걱정하는 방법을 알기에 묵상하는 방법도 이미 알고 있다. 우리의 관심을 걱정거리에서 성경구절로 돌리면 된다. 기억하자. 주님이 우리를 선택해 주셨다.

목표는 열매 맺기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16절).

예수님의 12제자 선택의 이유도, 그들을 친구로 선택하신 이유도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함”이다. 생각해보라. 친구의 성공을 질투하거나 방해한다면 그가 친구인가? 진짜 ‘친구 사이’라면 친구가 좋은 것을 얻도록 기도하고 힘쓰는 것, 친구를 행복하게 하는 거다. 그런데 주님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 선택했다고 하신다. 최상의 열매를 얻도록 주님은 축복하고 도와주시고, 기도라는 좋은 방편도 알려주시고, 삶에서 성공할 수 있는 노하우도 가르쳐주신다.

그리고 친구를 위하여 가장 소중한 것도 희생하신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13절), 예수님은 친구인 우리를 위해 기꺼이 목숨까지 내어놓으셨다. 그런데 놀라운 건 힘든 분위기가 아니라는 것, 예수님은 오히려 기뻐하신다. 그 이유는 자기 목숨을 내어놓을 때 친구에게 새 생명이 주어지고, 그 친구들을 천국의 아버지 집으로 인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씨알의 소리’로 유명한 신천 함석헌 선생은 ‘친구’라는 시에서 여섯 개의 질문을 던졌다. ① “만 리 길 나서는 길/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 만한 사람/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② “온 세상 다 나를 버려/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라고 믿어지는/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③ “탔던 배 꺼지는 순간/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④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 두거라’ 일러 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⑤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지고 있는가?” ⑥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그런데 그 정도가 아니다. 우리를 친구로 선택해주신 예수님은 목숨까지 내어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 짜리’, 신분뿐만 아니라 가치가 달라졌다. 그분의 말씀이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우정을 키우며 행복을 누리며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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