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78) 서로 사랑하라

오피니언·칼럼
설교
요15:9-12
이희우 목사

요한복음에는 ‘안다’라는 단어가 ‘믿는다’라는 단어와 동의어로 쓰였다는 것을 여러 번 강조했다. 예를 들어 11장 25절의 “나를 믿는 자는”이라는 표현에서 ‘믿는다’는 것과 요한복음 10:27의 “양들은 나를 알고”라는 표현에서 ‘안다’는 단어가 동의어라는 것이다. 그런데 15장에는 핵심 단어 중 하나가 ‘거하라’(abide in)이다. 좀 더 발전된 관계를 표현한 것으로 보면 될 것 같다.

예수님의 7 “1 am...” sayings 중 하나인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라는 말씀에 이어서 하신 말씀이 ‘거한다’는 말씀이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7절), ‘거한다’는 표현은 ‘붙어 있는 것’과 같다고 했다. 예수께서 한 몸, 하나를 강조하신 거다.

그런데 본문은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라는 말로 시작된다. ‘거하는 것’을 ‘사랑 안에’라고 표현한 것이다. 9절 앞부분을 보면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라고 했고, 12절에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했다. 당신이 제자들을 사랑하는 사랑은 아버지께서 당신을 사랑하셨던 사랑과 같다면서 주신 명령이다. 흔히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 하는데 우리는 ‘서로 사랑하라’(love one another)라는 새계명(New Commandment)을 깊이 새겨야 한다.

사랑이 힘이다

‘사랑’은 요한복음의 핵심 단어 중 단연 으뜸이다. 요한복음서에 36번 나오는데 이는 요한1서를 제외한 나머지 신약성경에서 쓰인 횟수의 두 배에 해당하는 분량이다. 성육신(成肉身)도, 십자가(十字架)도 다 사랑 때문이며, 선포하고 가르치고 고쳐주신 3대 사역도 다 사랑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사랑은 요한복음의 핵심이다.

사랑을 국어사전에서는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또는 그런 일”이라고 했다. 하지만 성경은 사랑을 믿음이나 지식보다 더 강렬한 것으로 말한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13),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이신득의(以信得義)를 강조한 사도 바울이 믿음보다 사랑이 제일이라 했다. 편지의 수신자인 고린도교회가 4개의 파벌로 나눠진 형편을 고려해야 할 말씀이기는 하지만 사랑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다.

‘믿는다’, ‘안다’라고 하는 것과 ‘사랑한다’라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믿는다’ ‘안다’ 그럴 때는 어떤 대상이나 정보가 떠오르고, 객관화되어 여전히 밖에 있는 그 무엇이 떠오르지만 사랑한다고 할 때는 떠오르는 게 달라진다. 더 내밀한 것, 더 긴밀해지는 거다. 요즘은 좀 광범위하게 사용하지만 사랑은 부부나 연인 관계에서 사용하는 단어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한 당신의 사랑이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신 것과 같은 사랑이라며 그 수준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다. 성육신하신 수준의 사랑, 십자가를 대신 지는 수준의 사랑이다. 이 사랑을 ‘힘’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사도 요한은 13장에서 이 사랑을 ‘끝까지 책임지는 사랑’(endless Love, everlasting love)이라 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당신과 성부 하나님의 관계를 사랑의 관계라 하신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9절),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10절). 사랑이 삼위일체(Τριάδος)를 연결하는 끈이다. 이 사랑의 신비를 직접 몸으로 체득했던 요한은 요한1서에서 급기야 ‘호 데오스 아가페 에스틴’(ὁ θεὸς ἀγάπη ἐστίν), 유명한 말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사랑’(God is love)이라고 불렀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4:8),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4:16).

하나님의 사랑, 어떤 사랑인가? 외국에 나가 공부하던 아프리카 한 부족의 추장 아들이 귀국했다. 부족민들의 관심은 ‘돌아온 추장 아들이 어느 처녀와 결혼할 것인가’였다. 이 부족의 결혼 풍속은 암소를 끌고 가 좋아하는 처녀의 집에 주고 청혼하는 것이었다. 대개는 암소 한 마리를 주는데 정말 훌륭한 최고의 신부감에게는 세 마리를 준다. 이제껏 이 부족이 생겨난 이후로 세 마리를 받은 처녀는 딱 두 사람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추장 아들이 드디어 청혼하기 위해 암소를 몰고 나섰는데 온 동네가 발칵 뒤집혔다. 자그마치 아홉 마리를 몰고 나섰기 때문이다. 부족 사람들은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처녀이기에 암소 아홉 마리나 끌고 갈까 그게 궁금해서 다 뒤를 좇았다. 그런데 막상 그 처녀를 보고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집도 허름하고 가난한데다가 처녀는 말라깽이였고, 키도 너무 커서 볼품없고, 병약한 외모에 마음까지 심약해서 늘 고개를 숙이고 걷는 여자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추장 아들이 미쳤다고 수군댔다. 하지만 추장 아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홉 마리를 바치고 그 처녀와 결혼한다.

그 지역에서 활동하던 한 의사의 증언인데 자기는 귀국 일정상 돌아와야만 했기 때문에 결혼식은 보지 못했지만 이 부족을 재방문한 의사는 오랜 만에 추장의 아내를 보고 깜짝 놀랐단다. 너무 아름답고, 우아하고, 너무 친절하고, 영어도 너무 유창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완벽한(perfect) 여자였다.

그래서 추장에게 물었다. “저 여자는 누군가요?” 그러자 그 추장은 “저 사람이 그때 그 심약했던 바로 그 처녀입니다.” 그러면서 추장은 “사실 제 아내는 한 마리의 암소면 충분히 혼인 승낙을 얻을 수 있었는데 청혼의 순간에 몇 마리의 암소를 받았느냐가 평생 자기 가치를 결정할 수도 있기에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홉 마리를 주었지요. 저는 제 아내가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한 두 마리 암소 값에 한정하고 평생을 사는 것을 원치 않았어요. 아내는 무척 놀랐지만 그 후 자신의 가치를 아홉 마리에 걸맞게 하려고 부단히 노력했던 것 같아요. 저는 아내에게 공부를 하거나 외모를 꾸미는 것을 권장하지 않았고 다만 있는 그대로의 당신을 사랑한다고 이야기해주었는데 아내가 저렇게 아름다워졌어요.”

사랑의 힘이다. 이게 주님의 사랑이고, 우리가 해야 할 사랑이다. 기억하라. 사랑이 힘이다. 13세기 아프가니스탄의 신비적 영성가 루미(Rumi)는 “하늘이 사랑에 빠지지 않았다면 저렇게 청명하지 않을 것이다. 태양이 사랑에 빠지지 않았다면 그 어떤 빛도 내지 않을 것이다. 강물이 사랑에 빠지지 않았다면 강물은 소리도 내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을 것이다. 산과 땅이 사랑에 빠지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자라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사랑에 힘이 있다는 말이다.

사랑하면 듣는다

‘대책 없는 자’ 시리즈라는 게 있었다. 이런 사람은 구제 불능, 구제할 대책이 없다는 거였다. 어떤 사람인가? 몽고반점을 중국 음식점이라고 우기는 사람, 대책 없다. L.A와 Los Angeles가 다르다고 우기는 사람. 또 으악새가 새 이름이라고 우기는 사람. 대책 없다. 으악새는 방언, 억새다. 그러니 으악새는 풀 이름이지 새 이름이 아닌데도 새 이름이라고 바득바득 우기면 대책이 없다. 또 한 때 컴퓨터 바이러스가 몸에도 전염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구제 불능, 대책이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사랑받고 살면서 사랑을 모르고 사는 사람도 마찬가지, 구제 불능이다. 그분이 나를 사랑할 리가 없다고 우기고, 간혹 자기 자신을 돌아보며 뉘우칠 때는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며 이 세상에는 사랑이 없다고 우기기까지 한다. 대책이 없는 사람이다.

성경이 뭘 말하는지 확실히 알아야 한다. 포도나무 비유로 열매 맺는 제자공동체가 되라고 또 사랑의 공동체가 되라고 말씀하시던 예수님이 갑자기 생뚱맞게 기도의 교훈을 말씀하고, 계명 순종의 말씀을 하신다. 7절,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이 말씀은 기도에 대한 교훈이 아니다. 믿음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된다는 확신을 주기 위한 말씀도 아니다. 이 말씀도 사랑의 양상을 설명하기 위한 말씀으로 봐야 한다. 무슨 말인가?

사랑하면 사랑하는 자의 말을 듣는다. 그래서 7절 말씀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기도는 기쁨이고 사랑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기쁨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기도한다. 마치 상대방의 기분을 봐가며 나의 소원을 아뢰는 것과 같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기도,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기도라면 응답이 될 수밖에 없지 않겠나? 마더 테레사(Teresa)는 기도를 “하나님과 우리가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듣는 것”이라 했다. 그런데 진짜 사랑하면 간구하지 않아도 나의 필요를 알고, 내 마음을 읽고 공급해주는 것, 그래서 하나님은 내가 간구하지 않은 것까지도 주신다. 예수께서 베다니에서 죽어 나흘이나 되어 이미 부패한 나사로를 살리시던 기적 장면을 보면 무덤의 돌문을 옮겨놓았을 때 이렇게 기도하셨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요11:41-42) 사랑하면 서로의 말을 듣는다. 의심하지 않는다. 그래서 15장 7절은 사랑이 기도응답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소설 『침묵』의 작가 엔도 슈사쿠(遠藤周作)는 큰 수술을 받았을 때 마취에서 깨어나 보니 너무 고통이 심해 진통제를 놓아달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의사가 그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너무 아파서 몇 차례 더 크게 소리를 질렀더니 얼마나 안쓰러웠던지 간호사가 다가와서 따스하게 손을 잡아주었는데 신기하게도 그 순간에 아픔이 누그러지고 고통이 사라지더라고 했다. 사랑이 최고의 치료제다. 들어준 사랑, 잡아준 사랑이 고통을 사라지게 했다.

성경은 행동하는 사랑을 강조한다(10절). 표현하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라는 말이 있다. 행동이 동반된 사랑이라야 진짜 사랑,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반드시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기억하라. 행함 없는 믿음이 죽은 믿음이듯 행함이 없는 사랑은 죽은 사랑이다. 아침에 출근할 때 “사랑해”하고 출근하면 교통사고가 준단다. 사랑을 느끼며 살면 평균 5년은 더 산단다. 미워하고 사랑하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한 사람은 질병에 걸릴 확률이 훨씬 더 높지만 사랑하며 사는 사람은 암 같은 중병에 걸리지 않을 확률이 79% 더 높아진단다.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 그래야 추위도 이기고 어려움도 이긴다. 노인들 중에 자살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이유는 외롭기 때문이다. 사랑 부족이 문제다.

C. E. Breck은 찬송 293장에서 “주의 사랑 비칠 때에 기쁨 오네/ 근심 걱정 물러가고 기쁨 오네. 기도하게 하시며 희미한 것 물리쳐/ 주의 사랑 비-칠 때 기쁨 오네. 그 큰 사랑 내 맘속에/ 충만하게 비칠 때에 찬송하네. 그 큰 사랑 내 맘속에/ 화평함과 기쁨 주네 그 큰 사랑”이라 찬송했다. 사랑받으면 외로움이 사라진다. 힘이 난다. 감사가 솟구친다. 사랑하면 들린다. 사랑한다고 외치시는 주님의 음성도 들리고, 곁에서 고백하는 지체의 소리도 들려야 한다.

사랑은 기쁨이다

어느 젊은 집사 부부가 부부싸움을 했다. 저녁 먹을 시간인데 부인이 화가 나서 밥도 안 짓고 건너방으로 가서 문을 잠가 버렸다. 저녁도 못 얻어먹은 남편과 아이들이 문 앞에 가서 문 좀 열라고 두드렸으나 아무 반응이 없다. 그때 남편은 문뜩 아내가 교회에서 제자훈련을 받으면서 성경 구절을 암송하던 것에 착안하여 문 앞에 대고 성경 구절을 낭독했다.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잠시 후 방 안에서 답신 성경 말씀이 흘러나왔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결국 문은 열렸고, 부부는 웃음을 터뜨리고 밥을 지어 먹었다.

그렇다. 남편은 아내를 향해 “나는 당신 없인 못 살아”라고 고백하고, 아내는 남편을 향해 사랑의 문을 활짝 열어야 한다. 사랑은 기쁨이다. 예수님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11절)고 하시며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12절)고 하셨다. 예수님이 주신 유일한 계명이다. ‘서로 사랑하라’,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그때가 가장 행복하다.

기쁨은 우리 영혼이 만족한 상태에 있을 때 안팎으로 표출되는 감정, 언제 기쁜가? 서로 사랑할 때 아닌가?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기 직전에 이 말씀을 하시지만 기쁨으로 충만하시다. 소유로 인한 기쁨 충만이 아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제자들을 향한 사랑, 인류를 향한 사랑 때문이다. 기쁨으로 충만하신 주님은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당신이 누리고 있는 이 행복 노하우를 제자들도 누리길 원하셨다.

나훈아 씨는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겠다”고 사랑을 ‘painful joy’로 노래했지만 예수님께 사랑은 기쁨이다. 세상적으로 보면 헤어짐이고 실패고 죽음이 맞다. 하지만 사랑이 실현되는 것, 영성가 루미가 “쓴 것을 달콤하게, 구리를 황금으로, 쓰레기를 와인으로, 모든 고통을 명약으로 만들어준다”고 한 바로 그 사랑이 예수님이 가진 기쁨의 정체였다. 서로 사랑함으로 주님처럼 기쁨을 크게 누리며 살아야 한다.

인천신기중앙교회 담임 이희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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