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은 그리스어로 ‘εὐαγγέλιον’이라 하는데, 이는 εὐ(쉬운, 즐거운, 기쁜)와, 소식을 뜻하는 ‘αγγέλιον’의 합성어다. 아무튼, 영어로는 “Gospel”이라 하는데, “good news”로서 한국말로는 “복음”이라 한다. 복음의 내용을 간추리면, “(1)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통해 인간을 구원시키고자 하는 계시를 나타내셨다, (2) 구약 예언의 말씀대로 예수가 그리스도로서 성육신하여 이땅에 오셨다, (3) 이 세상에서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4) 부활하시고, (5) 승천하시고, (6) 심판주로 다시 오신다”가 골자다. 즉, 이 6가지가 복음의 중심 내용이 되는 것이다. 기독교복음 신앙의 정통성을 인증하는 내용이다.
좋은 설교나 신학적 이론이란 1번부터 6번째까지 일관된 흐름, 즉 내용적으로 연속성이 있어야 한다. 설교 중, 6항목 다 한꺼번에 주제나 제목으로 정할 수 없다. 그래서, 하나의 항목을 주제로 설교를 전개하게 되는데, 설교할 때나 신학을 할 때, 위의 내용 중 한 항목을 주제로 설정하여 한다고 하면 나머지 다섯가지 항목도 상호 연관하여 말하거나 선포되어져야 한다. 설교를 할 때는 이 내용 중 어느 한 가지 만이라도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 어느 한 부분이라도 들어 가지 않으면 인간 사설이 되고, 종교론이 되고 만다. 나아가 사이비 이단이 되는 것이다.
이단이란, 한국말로 통상 “말씀 내용의 끝이 다르다” 하는데, 이 말은 전체 부정은 말 할 것도 없고, 어느 항목이라도 성경이 말하는 복음의 내용을 다르게 해석한다. 예를 들면, 초기 복음이 형성될 때, 영과 지식을 강조하던 영지주의자들이 그랬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어떻게 타락의 상징인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실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다만 영으로만 왔다”라는 주장을 했는데, 이는 1세기 즈음 그리스 로마 포함, 근동일대 큰 영향력으로 나타났다. 또, 사도행전 17:18절을 보면, 바울 자신이 스토아 학파와 에피큐러스 학파들과 논쟁하기도 한 내용이 나온다. 그러다가 이들은 당시 기독교 변증가로서의 말씀을 선포하던 사도 바울로부터 복음에 대한 경계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누가 철학과 헛됨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골로새서 2:8). 영지주의만을 대상으로 한 바울의 말은 아니지만, 결국, 영지주의는 정통에서 벗어나다 사이비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3세기, 아다나시우스와 아리우스(Arius, 3세기 후반~4세기 초) 간의 신학 논쟁이 있었다. 아다나시우스는 예수의 정체성에 대해 말 할 때,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신성(Divine Nature)과 인성(Human nature)을 가졌고 태초부터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했는데, 아리우스는 “예수는 창조되었다, 신성은 없고, 인성만 가져, 죄를 지을 수도 있는 성품을 가졌다”라고 말했다. 결국, 아리우스는 381년 열렸던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이단으로 몰려 추방당했다.
기독교 역사에서 이런 정통파로부터 벗어난 주장을 하다 이단으로 몰린 예는 상당히 많다. 기독교 역사에서 이단으로 몰려 정죄받은 자, 또는 그룹을 보면, 한결같이 정통복음으로부터 벗어나 신비스럽거나 부정적 주장을 하였다. 이들의 특징은:
- 창조론을 부정하고 오히려, 진화론이나 유신진화론(Theory of Theistic Evolution)을 주장하였다.
- 예수의 그리스도론(기독론) 부정, 예수의 정체성인 신성을 부인한다든지, 반대로 인성을 부정.
- 성경의 초월성 부정(하나님의 능력을 부정).
- 성경을 인본주의로, 문자적으로, 또는 자의로 해석.
- 예수 대신 자신을 구원할 자로 선전.
- 근거없는 종말론 강조.
- 성도들을 협박하거나 위험을 조장한다.
여기서 이단들 못지 않게 기독교 정통 교리를 무시하거나 파괴하는 그룹들이 있는데, 자유주의 신학자들이다. 이들의 특징은:
- 신학정신보다 인간중심으로 성경을 해석한다.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보다 인간위주의 입장에서 성경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때, 인간은 1인자로, 하나님은 제2, 또는 3자로 취급한다.
- 영보다는 육(신)에 더 치중한다.
- 성경을 윤리 도덕적 입장에서 이해하려 한다.
- 성경의 말씀이나 내용을 항상 역사나 과학으로 증명하려는 습성이 있다.
- 진리해석에 있어서 다양성, 또는 상대성을 주장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도 구원에 이를 수 있다”와 같은 것이다. 타종교도 인정하여 대화하려 한다. 이런 경우, 이것은 신학이 아니라, 종교학이라 할 수 있다.
이단들은 말할 필요도 없고, 이러한 자유주의자들의 신학의 모순을 보며, 칼 바르트는 “하나님 말씀의 신학(Theology of God’s Word)”을 통해 신정통주의 신학(Neo-orthodox Theology) 회복을 강조하였다. 보수신앙, 보수 신학자들은 바르트마저 자유주의 신학자로 치부하려는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그런 사고를 가진 사람들은 너무 닫혀진 눈으로 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한다고 볼 수 있다.
이성주의 철학, 해체주의, 학문의 자유, 과학주의, 다양성, 상대성, 유신진화론, 무신론 같은 것들이 상호 어지럽게 뒤 섞여 있는 후기현대주의 사조속에 복음의 정통성은 실체가 아닌 그 실체의 그림자 역할론으로 밀려나 있다.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이 복음의 전통성 지키기에 게을리하고, 오히려 교회와 기독론 주변에 있는 시대적 상황에 신학적으로 대응하는 능력부족은 물론, 교회의 기업적 목회, 크기, 성장, 안정 같은 것에 관심을 두다보니 그렇게 된 것 같다. 지금이라도 무속주의, 사이비이단, 자유주의의 무분별한 신학적 해석 방법론 등을 척결을 하지 않으면 복음의 정통성 회복은 더 어려워질 뿐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라디아서 1:8)
#양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