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독일보는 내년 한국 기독교 선교 140주년을 기념해 선교사들의 발자취를 돌아보는 글을 게재합니다.
4. 그가 주고받은 편지들과 기록들에서 읽는 순교자 로버트 토마스
로버트 제르메인 토마스는 1866년 9월 6일 평양 대동 강변에서 순교한 한국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이다. 1840년 9월 5일, 웨일즈 라드노(Radnor)주 라야다(Rhayader)에서 부친 로버트 토마스와 모친 메리 로이드(Marry Lloyd)의 아들로 태어났다. 2남3녀 중 둘째 아들이었다. 1839년 라야다교회에 부임한 부친은 토마스가 8살이 되던 해 하노버 회중교회 목사로 이전했다.
1856년 고등학교 졸업 후 은들(Oundle)에 있는 초등학교에서 반 년 가량 교편을 잡았던 토마스는 그해 런던대학교에 입학, 1859년까지 재학했다. 그리고 1857년 9월부터 일 년 간 뉴칼레지(New College)에서 수학했다. 1960년 10월 다시 복교한 토마스는 1863년 5월 신학교육 과정을 다 마치기까지 선교사가 되기 위해 “유럽어를 대부분 익히고, 워타만 박사 아래서 의학을 18개월간 정성들여 배웠고, 그리고 도처에서 설교를 하며 그 재능이 경탄할 만한 정도라는 평가를 받기에” 이르렀다. 선교사로서의 준비 시간의 확보와 휴학 때문에 교수들의 오해와 무례의 혐의와 반목도 불사했다. 1863년 5월 뉴칼레지를 졸업한 토마스는 런던선교회 파송 중국선교사로 임명되어 6월 4일 목사안수를 받았다. 얼마 뒤 캐롤라인 고드페리(Caroline Godfery) 양과 결혼한 그는 7월 21일 중국을 향해 떠나 12월 초 상해에 도착했다.
그러나 중국에 간 토마스는 인간적 불운에 휩싸였다. 상해에 도착한 이듬해 3월, 중국 생활 겨우 4개월 만에 그의 부인이 유산으로 사망했다. 게다가 선임 선교사 무어헤드(Wm. Muirhead)와 여러 이유로 갈등을 겪고 괴로워하던 나머지 급기야 런던선교회를 사임하게 되었다. 1864년 12월 8일부터 통역 연수관으로 취직한 지푸 소재의 중국 황립해상세관은 선교사 토마스의 일시적 피난처였다. 세관에 있으면서도 그는 상해가 아닌 다른 곳으로의 전직만 허락 된다면 언제든지 복직하겠다고 계속해서 밝히고 있었다. 그만큼 상해에서 겪은 그의 인간적 아픔은 컸다.
그는 8월 31일부로 세관을 사임했다. 그리고 오랜 시간 기다린 끝에 1865년 1월 초 런던선교회에서 복직을 허락 받았다. 그 자신도 경솔한 행동으로 후회하고 있었던 그의 사임에 얽힌 여러 가지 정황들과 그의 선임 선교사의 난폭하고 무례한 행동들이 그 어간 어느 정도 밝혀지고 있었다. 토마스의 예의 바름과 돈 문제를 처리하는 데에서 보인 신사다운 품격, 선교에 대한 강렬한 열정과 탁월한 언어 실력과, 성육신적인 선교 자세와, 상층과 하층의 중국인들과 스스럼없이 접촉하거나, 북경에 살던 소수민족이나 몽골과 한국과 러시아 등 중국 변경에도 시야를 돌리는 광활한 선교 신학이 도처 인정받고 증언 되고 있었다.
한편 복직 허락을 기다리던 중 그는 스코틀랜드 국립성서공회의 지푸 주재원 알렉산더 윌리엄슨과 연결되었다. 토마스는 일찍이 스코틀랜드 국립성서공회와 연결되고 있었다. 윌리엄슨은 토마스에게 한문 성서를 여러 권 주어서 한국 서해안에서 반포하게 했다. 1865년 9월부터 거의 4개월여에 걸친 이 여행에서 토마스는 한국말도 배우고 지리도 익히고 한국에서의 성서 반포에 대한 확신과 개신교 선교 착수의 열의를 가지고 돌아왔다. 돌아와 있으면서, 한문과 한글을 읽을 줄 아는 한국인들에게 성서를 반포하며 복음을 전한다는 꿈을 자신의 사명으로 확신할 수 있었다. 그 자신이 서해안에 뿌렸던 성서, 그 책을 다시 얻을 수 없겠느냐는 북경을 찾은 어느 조선인 사절 단원의 말은 가톨릭이 이미 선교하고 있고 정교회 국가 러시아도 한국에 대한 관심이 점고 되고 있는 마당에 한국에서 개신교 선교 착수가 시급하다는 그의 사명의식을 불타오르게 했다.
인간적으로 본다면 한국인들은 기독교 진리에 전혀 반대하고 있지 아니합니다. 중국에서는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믿는 인도 불교를 한국에서는 하류층에서 따르는데 그 교세는 미미합니다. 저는 한국에서 우리 기독교의 서적들이 여기저기 열심히 읽히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참 신기하게도 제가 작년 가을 한국 서안에 뿌린 서적들이 평안도의 경치 좋고 인구가 조밀한 도읍 평양에까지 퍼져간 사실입니다. 지난 겨울 여기 북경에까지 왔던 한국 동지사(冬至使) 일행 중 한 사람인 상인 박 씨(Parkka)는 얼마 전 저를 만나 그 서적들 중 하나를 평양에서 구해서 열심히 읽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 외국에 나와 있는 선교사로서, 악평을 하는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든, 이 이교(異敎) 세계의 중심지에서 일본, 한국, 몽골에 프로테스탄트 기독교를 전파한다는 포부는 본국에 계신 여러 신자들이나 국민 전체의 마음에 자극을 주리라고 확신합니다.
그 이듬해 병인양요가 발생했을 때, 한국 개신교 선교 착수라는 토마스의 열정은 험난한 정세와 한국의 쇄국정책과 그로 인한 기독교 박해의 예민한 한국과 한국인들의 정서를 미처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한국 최초의 개신교 순교 며칠 전, 그는 예수교는 인의와 충효를 모두 갖춘, 천하인민들이 다 즐겨 따를 만큼 선량한 종교요, 가톨릭과는 다름을 역설했다.
이제 우리 개신교(야소교)는 하늘의 길로 몸을 삼고 사람의 마음을 간사하고 속됨[속된-필주] 것으로부터 바르게 하며, 인의(仁義)와 충효(忠孝)를 모두 갖춘 종교로서 가히 천하인민들이 모두 즐겨 따를 만큼 선량한 종교요, 천주교와 다르다.
5. 토마스 선교사의 뛰어난 달란트: 언어와 광활한 선교 시야가 토마스를 천부의 사명지 한국으로 이끌다
그가 직접 주고받은 편지들, 기록들에서 만난 로버트 토마스는 특히 두 가지 점에서 필자를 압도해왔다.
첫째, 그의 선교의 특장점인 ‘언어’이다. 둘째, 그의 인간적 면모와 광활한 선교 시야이다. 이 두 가지 달란트가 서로 앞서고 뒤서며 토마스를 그의 천부의 사명지 한국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성경을 주고 떠나간 한국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가 되게 했다.
‘언어’는 토마스 선교의 특장점이자 그의 선교 여정을 전개한 통로였다. ‘언어’에 대한 관심과 열정, 그리고 뛰어난 언어 실력이 그의 선교 여정을 관통하고 있었다. 중국과 중국어, 그를 통한 중국 선교에 대한 관심이 그의 신학교 시절에 있었던 한 때의 방황을 잠재웠다. 상해파송 선교사로 왔을 때에 그는 처음부터 상해지방어와 북경지방어를 함께 공부했다. 수도 북경에서 전도해야 중국 전역을 향해 선교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그의 선배선교사였던 상해위원회의 무어헤드와 갈등을 일으키고 다소 성급했던 선교사 사직까지 가기도 했다.
일시적인 선교회 탈퇴로 다시 복직을 타진하며 본부로부터의 처분을 기다리는 동안 토마스는 한국에 다녀갔다. 스코틀랜드성서공회 윌리엄슨에게서 성경을 받아가지고 한국에서 여러 달을 머물면서 한국인들의 배움에 대한 열망, 중국과 달리 전국에서 통용되는 한국어, 그리고 한국인들의 뛰어난 문자 해독률을 접하고 가슴이 뛰었다. 더욱이 아직 개신교 권에는 알려지지도 않은 이 나라에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로서 자신이 다녀갔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을 때, 한국에 개신교 선교를 여는 이 최초의 선교사가 자신임을 토마스는 직감했다. 그래서 한국어로 성경을 번역하여 반포한다는 천부(天賦)의 사명이 자신에게 있음을 알고 그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한국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던 중 1866년 9월 5일, 제2차 한국선교 여행의 여정에서 그는 순교했다. 한국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 로버트 토마스 목사의 순교였다.
런던선교회 소속의 토마스 목사는 한국인들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중국으로 건너간 한국인들의 도움으로 한국어를 배우고, 60대 초반에 한국으로 보내달라는 청원서를 상부선교회에 보냈다. 런던선교회는 처음에 이를 거절하였으나 후에 그가 한국에 가는 것에 동의하게 되었다. 1866년 그가 막 한국으로 출발하려 할 때 비운의 미국범선 제너럴 셔먼호가 곧 출발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배의 통행권을 신청하고 그들에게 통역관이 되어 준다는 조건으로 무료 여행권을 제공받았다. 그는 그 배의 선원들과 합의하여 여행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한국에 도착한 이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관하여는 전혀 알려지지 않는다. 그 배에 타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 현재 확실하게 입증되었다. 셔먼호에 타고 있던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 한국말을 사용했으며, 그가 서울에 가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정중하게 요청했으나 그의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한국 사람들이 확인해주었다. 이 사람이 토(TO)란 이름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것을 볼 때 이 사람은 틀림없이 토마스 목사였다.
토마스의 한국행은 또한 그의 광활한 선교시야에서 비롯되고 있었다. 토마스는 광활한 선교 시야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그의 인간적 면모와 어우러져 선교사로서 더할 나위 없는 인품과 자질로 그를 빛내고 있었다. 그는 선교 영역을 제한하지 않았다. 상층과 하층의 중국인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고, 세속직의 현장 세관에서도 선교사로 일할 수 있었던 그였다.
그런데 토마스가 중국에 간 때는, 중국 선교 역사에서 볼 때, 해안 선교 시대에서 내지 선교 시대로 접어든 때였다. 1807년 런던선교회 파송 선교사 모리슨이 중국에 들어간 이후 1842년 남경조약을 기점으로 중국에는 해안 선교 시대가 펼쳐졌다. 광주, 복주, 하문, 영파, 해, 이 다섯 연해 도시가 이때 개방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1860년 북경조약을 기점으로 내지 선교 시대에 접어들었다.
토마스가 중국으로 파송된 때는 이즈음이었다. 그리고 그는 중국의 내지, 수도 북경에 있었다. 14년여에 걸친 태평천국의 난이 진압되었지만 그 남은 기세가 만만치 않았던 때였다. 토마스는 제1차 한국전도 여행에서 돌아오다가 반도들에게 점령당한 비자와에서 성경을 나눠주고 설교하면서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일이 있다. 이 반도들은 이 지상에서 태평천국을 구가하며 남경을 중심으로 동진과 북진을 감행하던 태평천국운동의 사람들 또는 그와 연계된 무리들이 아니었을까 추정해본다.
따라서 토마스가 있을 당시 북경은 중국의 수도로서 중국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변경이었다. 이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그렇다. 첫째, 중국 선교에서 북경은 변경이었다. 이제 막 내지 선교를 꿈꾸던 때요, 그렇게 보았을 때 중화의 유교 국가 청 왕조의 수도인 북경은 가장 뚫고 들어가기 어려운 먼 곳이었다. 둘째, 북경은 중국의 수도이기 때문에 타국, 타민족과 가장 먼저 만나는 변경이었다. 여기서 변경이라 함은 외부와 접촉할 때에 가장 앞선 곳, 프런티어 곧 전선이라는 뜻이다.
북경은 언제나 흥미로운 곳입니다. 지금은 더욱 그런데 중국의 새해가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몽골 사람이나 한국 사람들이 밀려들어오고 있습니다.
상해로 파송된 그가 처음부터 줄곧 북경에 가고자 한 것도 그곳이 중국과 세계가 만나는 곳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토마스는 중심이 곧 바깥으로 나가는 최전선임을 통찰하고 있었다. 그래서 중국의 중심 북경에서 그는 결국 한국으로 향하게 되었다. 한국이 그의 필생(畢生)의, 천부의 사명지였던 것이다.
6. 언더우드와 토마스: 성경으로 연결되다
한국 최초의 상주 목사선교사 언더우드는 1884년 이후 한국 개신교 선교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이전에 초기 개신교의 노력을 언급하면서 거기 토마스를 언급하고 있다. “우리는 귀즐라프, 로스, 그 외의 다른 사람들이 행한 사역과 토마스 목사가 기울인 노력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스코틀랜드 국립성서공회 파견원 자격으로 성경을 가득 싣고 와서 성경을 나누어주려다 순교한 토마스 목사, 그의 순교 이후 20년이 채 안 된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 아침 한국 개신교 최초의 상주 목사선교사 언더우드가 한국 땅을 밟았다. 그때 언더우드는 일본에서 한국인 크리스천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을 품에 안고 있었다. 선교사가 선교하러 가면서 그 나라 말로 이미 번역된 성경을 가지고 들어가는 세계 선교사상 유례없는 일이 그렇게 전개되었던 것이다.
성경, 그것은 순교자 토마스와 선교사 언더우드를 잇는 연결고리가 되고 있었다. 더욱 엄밀하게는 한국인의 성경 사랑, 그것이 이 두 선교사가 각각 다른 때에 한국의 문을 두드릴 때 그들의 가슴 속을 꼭 같은 감동으로 휘몰아치고 있었다. 토마스는 자신이 제1차 한국 선교여행 당시 서해안에서 반포한 성경이 평양까지 흘러들어간 사실에 놀라서 한국 개신교 선교 착수의 불타는 사명감으로 다시 한국을 찾았었다. 언더우드는 말할 수 없는 벅찬 가슴으로 이수정 번역의 한글 쪽복음을 들고 한국에 왔는데, 그는 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찬양할 수밖에 없었다. 서상륜이 이미 만주에서 번역한 누가복음을 한국 여기 저기 뿌리고 다녔다는 사실을 발견했던 것이다. 이 누가복음은 요한복음과 함께 이수정의 마가복음보다 3년이나 앞선 1882년에 만주에서 번역되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이 한글 성경 번역에, 토마스의 경우와 같이, 중국 만주에서 활동하던 스코틀랜드 선교사들의 도움이 거기 있었다.
무슨 목적으로 이 모든 노력이 기울어진 것입니까. 결국 책 중의 책인 우리의 성경을 널리 퍼트리기 위해서 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성경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드높여야 합니다.
나는 런던선교회의 이사들께서 성서의 교리를 전하기 위해 아무 인간적 과오와 혼합되지 아니한 심정으로 이 미지(味知)의 나라를 향해 가는 우리들의 발걸음을 이해하여 주리라고 믿으며 먼 길 한국을 향해 떠나갑니다. 경애하는 티드만 박사님!
“성경을 널리 퍼트리기 위해” “성서의 교리를 전하기 위해” 한국을 찾아와 순교한 개신교 선교사 로버트 토마스, 그의 꽃다운 순교의 피 위에 오늘 성경을 그 심장부에 둔 한국교회가 의연하게 서 있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라.” <끝>
류금주 박사(한국교회사학연구원장, 청교도신학원 교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