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26:39)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의 극심한 고통을 절감했기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데 세 번이나 지체(?) 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참 위로가 됩니다. 그것도 베드로에게 닭 울기 전에 당신을 세 번이나 부인할 것이라는 견책성 예언을 하신 직후이니까 말입니다. 언뜻 그 비겁했던 베드로나 우리의 위대한 주님이나 오십 보 백 보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베드로가 기껏 하녀의 추궁에도 저주하며 스승을 부인한 일이나, 예수님이 두려움에 질려 세 번이나 기도한 일에서 우리 중 대부분은 정작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놓칩니다. 그들은 죽음을, 그것도 인간이 고안한 처형방안 중에 가장 고통스럽고도 비참한 십자가에 달려질 일을 바로 눈앞에 두었다는 사실입니다.
노예 반란을 그린 스팔타카스라는 오래된 영화의 마지막에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로마 사령관이 반란군 대장과 그 심복에게 칼을 쥐어주고는 서로 싸우도록 명하고 이기는 자는 십자가 처형에 처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격렬하게 싸웁니다. 서로를 너무 아끼는 마음에 십자가의 고통은 차라리 자기가 당하고 상대는 자기 칼에 찔려죽게 하는 것이 오히려 상대를 위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십자가가 얼마나 처참하고 고통스러운지 실감했습니다. 아마 스승을 부인할지 십자가에 죽을지 누구에게 물어봐도 천 번을 부인해도 십자가는 가지 않겠다고 답할 것입니다. 칼로 단번에 숨이 끊어지는 것과 전혀 다릅니다. 베드로는 그래도 세 번만 부인하고는 심히 회개하며 통곡했습니다. 예수님이기에 세 번밖에 주저하지 않았고 설령 천 번을 기도해도 십자가로 결단했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 당시에 살았다면 천 번을 기도해도 십자가는 피했을 것입니다. 거기다 지금껏 십자가는커녕 목숨을 걸만한 하나님의 큰 명령을 접한 적도 없습니다. 학생이라면 교실 청소는 누구나 해야 하듯 신자에게 교회봉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의 다른 계명들은 다 제쳐두고 가장 필수적이고 주님의 일이라고까지 말할 수 없는 교회봉사도 세 번 아니라 천 번이나 주저하는 것이 우리의 솔직한 실체입니다. 예수님과 베드로를 우리의 너무나 게으르고 주저하는 순종에 대한 변명으로 삼는다는 것은 도무지 격에 맞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 명령에 순종하고 싶은 소원은 있습니다. 당장(?) 해결해야 할 현실적 문제들 때문에 그 실행은 더뎌서 마음 한 구석에 주님께 송구스런 마음을 항상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 뜻대로 순종한다는 것이 말이 쉽지 참 힘듭니다. 그 이유가 개인별로 나름 있겠지만, 거의 모든 신자에게 공통적으로 해당되는데도 미처 잘 모르는 이유가 하나 있습니다.
순종해야 하는 내용에 신경을 쓰다 보면 제대로 순종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언제 어느 정도까지 해야 하는지 순종에 대한 디테일을 너무 따집니다. 그러다보면 필연적으로 자신의 처지, 여유, 헌신, 믿음과 비교가 되고 결론도 아무래도 분에 넘친다고 내려집니다. 십일조만 해도 수입의 10%를 바치고 나면 그 나머지로 도저히 먹고 살 자신이 없어지니까 못하거나 마냥 주저하게 되지 않습니까?
이는 참으로 모순입니다. 순종이란 항상 힘에 부대낄 때에만 적용되는 말입니다. 누구라도 쉽게 할 수 있는 쉬운 일에는 순종이라는 말을 아예 사용하지 않습니다. 주일예배 참석은 비교적 쉽게 할 수 있기에 순종했다고 거의 아무도 생각지 않습니다. 반면에 십일조나 선교활동 등에는 순종이라는 꼬리표가 반드시 붙지 않습니까? 또 반사적으로 아예 힘에 부대끼는 일이기에 순종하지 않아도 마치 내 쪽의 큰 잘못이 아닌 양 여기기 일쑤입니다.
실행해야 할 내용을 보고 순종 여부를 결정하면 누구라도 온전히 순종하기 힘듭니다. 또 그렇게 한다고 해서 무조건 순종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역으로 따져 명령을 내리는 자를 싫어하면서도 그 내용이 마음에 들어 따른다고 순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예컨대 세상과 사단이 속삭이고 유혹하는 것은 대체로 달콤하고 화려하기에 마음에 쏙 들어 그대로 따랐다고 순종이라고 말할 수 없지 않습니까? 시키는 그대로 따르는 것 가운데는 맹종, 굴종, 복종은 물론 죄악도 있는 것입니다.
순종이란 명령을 내리는 상대에 따라 정해지는 것입니다. 정신이 나갔거나 술 취하지 않은 부모가 아닌 이상 그 시키는 일은 기꺼이 따르지 않습니까? 사장이 명령하는데 거절할 바보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애인이 시키면 목숨 걸고 절벽에 달린 꽃을 따주는 일도 서슴지 않습니다. 그 친구 말이라면 콩이 아니라 팥으로 메주를 쓴다 해도 믿고 따른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하물며 하나님이 시킨 일이라면 과연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도 순종해야 할 내용은 도무지 두렵고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땀에 피가 섞여 나올 정도로 그 잔을 피해보려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다 내린 결론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이 시킨 일이기에 따른다는 것입니다. 나의 일이라면 내가 결정할 수 있지만 그분의 일이니까 그분이 정하신 것이고 또 그 뒤의 모든 것도 그분이 책임져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명령을 내린 분이 어떤 분인지 잘 알고 온전히 믿으니까 순종키로 한 것입니다.
간혹 우리는 전적으로 내키지 않아도, 때로는 솔직히 하기 싫은 일이라도 하나님의 명령이니까 어쩔 수 없이 따릅니다. 또 혹여 싫거나 주저하는 마음까지는 없어도 완전히 납득이나 동의하지 않은 채 순종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절대 잘못된 순종이라고 매도할 수 없습니다. 아니 아주 좋은 순종입니다. 명령의 내용이 마음에 안 들어도 진정으로 하나님 그분만 믿고 따랐다면 말입니다.
신자라면 하나님의 계명이나 인도는 그대로 따라야 합니다. 그분을 알고 믿기에 그 내용은 문제 삼을 이유나 필요가 하등 없습니다. 십일조든 교회 봉사든 선교든 그분이 시킨 일이라면 비록 힘들더라도 단단히 결단하고 의지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일단 순종, 아니 무조건 순종해야 합니다. 혹시 하나님이 순종하지 않으면 안 되게끔 몰아가도, 그래서 억지로 끌려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도 순종해야 합니다. 바로 그것도 주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순종만 하면 단지 순종했다는 행위를 보고 별도의 보너스를 양껏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미처 몰라도 그 시킨 일들 가운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권능과 영광이 숨겨져 있습니다. 일단 순종하면 그 일이 진척되고 결말지어지는 상황 가운데 반드시 신자가 성장하고 또 유익이 되는 일이 생깁니다. 억지로라도 순종하길 너무 잘했다는 실감이 정말 듭니다. 왜 주저하고 거역하려는 생각까지 했는지 회개하게 됩니다. 조금이라도 지체한 것 자체가 저절로 후회하게 될 정도로 그분의 은혜를 절감할 수 있으며 그분만의 영광을 반드시 목도하게 됩니다. 불신자에게 그분을 온전히 증거하는 기회까지 됩니다.
순종해야 할 내용을 따지지 마십시오. 그럼 십중팔구는 주저 내지 거역하게 됩니다. 현재의 형편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 아니라면, 또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일이 아니라면 구태여 순종하라고 명하지도 않습니다. 나에게 그 명령을 내리는 그분을 바라보십시오. 사장과 부모가 시키는 일이라면 자다가도 일어나 뛰쳐나가면서 하나님의 일은 왜 그리 주저하십니까? 부모를 부모로, 사장을 사장으로 여기지 않으면 그리 하지 않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여기지 않는 것은 아닙니까? 순종은 우리가 실제로 또 솔직하게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믿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시금석입니다.
2012/7/6
* 이 글은 미국 남침례교단 소속 박진호 목사(멤피스커비우즈한인교회 담임)가 그의 웹페이지(www.whyjesusonly.com)에 올린 것을 필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입니다. 맨 아래 숫자는 글이 박 목사의 웹페이지에 공개된 날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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