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 국가 미국의 대통령 선거 결과가 주는 의미를 되새김
11월 늦가을이 깊어 간다. 남의 나라 대통령 선거에 왜 우리가 신경 쓰느냐고 짐짓 무심한 듯 말하는 교인들이나 한국인도 많지만, 미국 대선 결과는 한국 엄마들의 된장찌개 반찬 준비에도 영향을 끼치는 일이기 때문이다. 결과는 트럼프 후보자의 압도적 승리로 끝났다. 우리 한국인들, 특히 한국 기독교인들은 트럼프 후보자가 미국 47대 대통령으로서 압도적이라 할 만큼 표 차를 내면서 당선된 사실 앞에서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좀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첫째, 도널드 트럼프(78) 개인 정치가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서, 미국 성인 유권자 60% 이상이 트럼프가 주장한 ‘미국 우선주의’와 ‘외국 이민자 유입 반대와 미국 국가 패권주의’를 선호했다는 사실이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미국이라는 나라의 오늘날 실상 곧 기독교 신앙을 기초로 삼았던 건국 조상들의 자유, 평등, 박애 등 숭고한 비전을 버렸다는 것, 그리고 지극히 세속적이고 속물적인 인간의 자기중심적 이기심이 그 중심에 있다는 것이 적나라하게 표출된 것이다. 돈, 권력, 금융자산 주식, 군비 산업, 패권주의, 일등경쟁이 삶의 가치가 된다. 그런 가치 지향성이 ‘더 강하고 건강한 미국 만들기’라는 이념제시로서 포장된 것이다.
둘째, 트럼프의 재선이 한반도의 정치 현실에 주는 상당한 충격과 상황변화의 계기를 준다는 사실에 있다. 우선, 트럼프는 대통령 선거 운동 중 공개적으로 주한 미군 주둔비에 대하여, 한국 정부가 지불하고 있는 약 1조 5,000억의 10배 가량을 더 받아내겠다고 공언하였다. 그 문제는 한국민에게 “미군의 한국 땅 주둔이 순전히 대한민국 방위만을 위해서 주둔하는 것이냐?” 의문을 제기하게 될 것이다.
미군 주둔이 북한의 남한에 대한 핵 공격 위협과 공산주의를 막는 방어기제로 존재하는 안전핀 역할을 한다는 것은 부정하지 못하는 현실이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하면, 더 큰 일차적 목적은 중국과 러시아라는 대륙 세력의 위협에 대비하여 미국 안전에 최전선 방위목적이 있음을 냉정하게 인식해야 한다. 평택 기지가 최전선 제1차 방파막 기지요, 일본 오키나와 미군기지가 둘째 방파막이요, 하와이 진주만 해군 함정대가 셋째 방파막이다. 주한 미군 주둔비를 배 더 내라고 강압할 사안만이 아니라, 미국의 국익을 위해 한국 땅에 미군을 주둔시키는 장소사용료도 같은 비중으로 감안해야 한다는 말이다. 한국 기독교인들은 미국을 너무나 짝사랑하고만 있어서 진실을 보지 못한다.
셋째, 미국의 민주당만이 아니라 세계 일반의 지식인들이 트럼프를 도덕적으로, 인간 품성 면에서 문제가 많은 인물로 평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인들은 트럼프를 택했다. 미국 민주당은 자신들의 패인의 원인을 “진보적 지식인들의 우월감, 정치도덕적 교만, 정말 바닥 사람들의 고통을 모르는 엘리트의식”이었다고 반성한다. 오늘날 한국의 비판적 진보 진영과 민주당을 비롯한 정치 세력들이 미국 민주당의 자성의 소리에 깊이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공허한 ‘가치 외교’를 표방하고 한미일 군사동맹 강화에만 치중해온 윤 정권은, 트럼프가 지배할 미국과의 관계에서 새로운 발상법 전환이 요청된다. 트럼프가 북한의 김정은과 직접 대면하여 두 차례 이상 대화를 가졌었고(2018-2019), 서로 친밀감을 과시하면서 자기 나라 국익을 위해서라면 지금까지의 미국과 북한과의 관계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할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매우 역설 같지만, 전쟁위험의 뇌관이 제거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북한 곧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하나의 일반적 국가로서 인정하고 여러 가지 ‘국제적 제약’을 풀어주고, 조선공화국의 정권 보장과 주권을 인정하겠다는 트럼프의 제안이 있다면, 김정은 정권은 핵 완전 포기 정책을 제외하고 모든 것을 내걸고 호응할 것이다.
한국과 미국, 한국 기독교와 미국 기독교 관계에서 실상과 허상
오늘 칼럼에서 한미관계의 정치종교적 측면을 다시 생각하는 일은 좌우 진영논리를 떠나 평범한 시민으로서 씨알의 자리에서 냉철하게 성찰해볼 필요가 있음은 물론 권리와 책임의 문제이기도 함을 확신한다.
근 150년간 이어져 온 한미 특수관계는 장점도 있지만, 오늘 21세기 미국이라는 세속국가의 실상을 보지 못하고 환상, 짝사랑, 친미와 숭미 일변도의 사고구조가 고착되어 있는 형국이다. 그러한 ‘영향사적 의식과 대미 관계’가 이번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으로 재당선됨으로써 발생하는 중요한 국제질서의 후폭풍 속에서 한국 기독교인들은 미국을 바로 읽기에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과거 역사에서 받은 우의와 도움을 무시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특히 “정치란 과거는 과거이고, 오직 집단적 이기심과 돈과 무력이 말하는 살아있는 동물 같은 것”이다. 정치란 가장 숭고한 인류의 이상을 꿈꾸며 실현해보려는 호모사피엔스의 독특한 사회현상이지만 동시에 정치란 오직 약육강식적 힘만이 최고가치로서 작동하는 냉정한 현실인 것이다.
첫째, 미국은 ‘한미수호통상조약’ 체결(1882) 이후부터 오늘까지 중국, 러시아(구소련), 일본의 영향보다 압도적으로 한국 현대사와 한국민에게 정치, 경제, 종교, 교육제도, 군사병력, 정치이념 등에서 가장 큰 영향을 준 국가였다. 기독교 선교 측면만 보면, 한국의 19세기 초기 선교사들이 파송, 헌신, 복음 전파에서 독일과 영국 등 유럽 나라, 캐나다, 호주 등 여러 나라가 있었지만 선교사 파송의 숫자와 그 영웅적 희생정신의 발휘에 미국 선교사들의 노력과 업적이 압도적이었다. 언더우드, 아펜젤러, 피어선, 모펫, 호남 나병환자들의 어머니 서서평 등이 대표적 상징 인물로서 각인되었다.
그런데 유념할 것은, 미국 선교사들이 전해준 복음의 색깔은 정통적인 유럽 개신교 유형과는 색상이 다른 소위 말하는 “경건주의적, 오직 성경만의, 개인 영혼 구원의 복음주의 신앙 유형이었다”는 점이다. 첨엔 신선하고 순수한 복음적 열정으로 자기희생적 사랑의 종교로서 교회, 학교, 병원, 고아원 설립에 헌신했다. 그러나 1920년대부터 미국형 개신교는 서구 계몽주의 시대 이후 등장한 진화론, 성경 비판 연구, 구약 예언자 정신의 세속적 정치표현인 사회주의의 대두를 배척하고 반대하는 입장을 취함으로써 점점 세계사의 주류 형성의 ‘누룩으로서 역할’을 잃고 교리적 기독교, 종파적 종단, 근본주의적 독단적 배타성을 지니게 되었다.
겉으로는 미국과 유럽 사회가 기독교 국가인 듯 전통 형식을 갖추지만, 갈릴리 순수복음은 국가권력, 자본 권력, 무신론적 자연과학 지식 권력에 무릎 꿇고 예속당하며 “참 남편 아닌 다섯 명의 기둥서방 같은 자와의 전략적 동거생활”(요 4:18)이 이루어져 나갔다. 그것의 결정판 모습이 이번 미국 대선정국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고, 대체로 미국 보수기독교들은 환영 일색이다. 기독교의 속화(俗化)가 완결된 것이다. 교회 예배 강대상 옆에 국가상징인 성조기가 세워지는 것을 당연시한다.
둘째, 기독교 복음을 전해준 초기 선교사들의 헌신과 업적이라는 색안경을 벗고서, 순수한 정치적 군사적 시각에서 한미관계 150년을 냉정하게 뒤돌아보면, 처음부터 미국 정치가들은 중국, 러시아, 일본의 정치가들처럼 당시 조선이라는 한반도를 그들 국가의 이익을 위한 변방의 희생제물로 삼으려 했다는 것이 인정하기는 싫으나 진실이라는 것이다. 미국의 장관 태프트와 일본 총리 가쓰라 사이에 맺은 소위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이 그 증거다. 핵심 내용은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 조선 식민 지배를 일본이 먹고, 필리핀 지배는 미국이 차지한다는 비밀 협약이다. 초기 한국에 온 미국의 젊은 선교사들은 정치엔 관심 없었고 복음 전파에만 관심을 가졌던 이유도 있겠지만, ‘정교분리 정책’이라는 그럴듯한 교리 뒤에 숨어서 3.1 독립운동 거사에 선교사들의 80% 이상은 비협조적이었고 침묵함으로써 식민지 약소국가의 침탈에 한몫한 것이다.
일제로부터 해방 직후, 유엔 결의를 통해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정부는 대한민국이라는 인정, 한국 동란시 미국의 파병, 전쟁 참화로부터 구제의 손길 등 미국 정부와 특히 선한 미국 민간인들의 도움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거듭 말하거니와, 그러한 미국의 선한 얼굴과 손길은 세속적 정치국가로서 미국의 탐욕과 자국민 중심주의를 극복하기엔 역부족인 일부 “빛의 자녀들의 선행”이었다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현실적 세속국가로서 미국의 일방주의와 동맹국 한국을 얕잡아보는 감추어진 얼굴을 동시에 직시해야 피차 건강한 국가 관계로서 재정립된다는 말이다.
‘한국전쟁 휴전협정’(1953) 협상테이블에 북한군 대표, 중국 대표 등은 참석했는데 200만 명 이상 생명을 바쳐 싸운 한국 대표를 배제 시킨 연합군의 실질 대표가 미국이라는 점을 기억하면 주권 국가 한국 국민으로서 수치스러움과 자존심 상함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다. 한국은 작은 나라이지만, 미국의 속국도 아니고 변방에 위치한 장기판의 한 개 ’졸‘이 아니다. 국군 전시작전권도 되찾아 와야 하고, 미군 감축이나 철수 겁박에 움츠러들지 말고, 주둔비용을 요청하고 받아내는 결기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세계질서가 변하고 있다.
트럼프가 집권하기 시작하는 미국의 민낯을 직시하면서 한국 기독교는 창조적 전환의 새로운 신앙 길을 개척해가야 한다. 크고 강한 것이 좋다는 ‘거인 숭배 기독교’에서 “작은 것도 아름답다”는 기독교에로, 다윗과 솔로몬의 종교에서 사무엘과 이사야의 종교에로, 십자군의 복음에서 십자가의 복음에로, 금관의 예수에서 가시관의 예수에로 전환해야 한다. 트럼프 정권이 어떻게 세계를 재편성하더라도 “생명, 정의, 평화를 향한 하나님 나라 전진”을 바꿀 수는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