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 밝은 밤에 감람산에라도 올라가셨을까? 아니면 기드론 계곡을 따라 펼쳐진 포도밭을 연상하셨을까? 예수님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라고 선언하셨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7 “I am,,,” sayings 중 마지막 선언이다. “생명의 떡”(6:35), “세상의 빛”(8:12), “양의 문”(10:7), “선한 목자”(10:11), “부활, 생명”(11:25), “길, 진리, 생명”(14:6)에 이어 “나는 포도나무”라는 선언, 어쩌면 당시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게 들렸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포도나무는 이스라엘, 하나님은 포도원을 만드신 분’이라는 표현이 더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이사야 선지자의 ‘포도원의 노래’에 보면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사5:1), ‘하나님의 포도원’이라 했다. 그리고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사5:2), ‘극상품 포도나무’는 이스라엘, 가장 귀한 포도나무라는 말씀이다. 민수기에 보면 에스겔 골짜기의 포도는 포도송이가 달린 가지를 두 사람이 양어깨에 메고 가야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민13:23). 대단하다. 지금도 성지에 가보면 가장 친숙한 농작물이 보리, 올리브와 더불어 포도, 포도는 농작물 가운데 가장 값진 것을 의미한다. 시편 80편에서는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나이다”(8절), 그만큼 가치가 있었기에 하나님의 축복이나 삶의 풍요를 언급할 때 이스라엘은 곧잘 포도나무에 비유되었다.
예수님은 자신을 포도나무라 하신다. 유실수, 포도나무는 목재용도 관상용도 아니다. 이 비유에서 강조되는 것은 ‘열매 맺는 것’, 유실수는 열매가 생명이다. 열매가 있어야 가치가 있다. 혹시 ‘너도밤나무’를 아나? 울릉도 나라분지에 가면 많이 있는데 사람들은 이 밤나무를 보고 ‘너도 밤나무냐?’라고 한다. 왜냐하면 밤나무이기는 한데 탐스럽게 열려도 쓴맛으로 인해 먹지 못하는 밤이기 때문이다. 탐스럽게 열리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좋은 열매라야 한다. 예수님은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8절)고 하셨다. “잎이 무성하면”이나 “뿌리가 깊고 오래 견디면”이나 “줄기가 견고하고 굵으면”이 아니다. 열매를 맺어야 제자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붙어있어야 한다
가지의 행복을 생각해본 적 있나? 가지는 필요한 물과 양분을 나무가 충분히 공급해주고, 거친 비바람도 나무가 든든히 버텨준다. 열매의 풍성함도 걱정할 필요 없다. 그건 모두 다 나무의 역할, 가지는 붙어있기만 하면 된다. 이런 조크 알지 않나?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고, 나는 놈 위에 붙어있는 놈 있다”. 같은 원리다. 예수님은 “내 안에 거하라”(4절), “나에게 잘 붙어있으라”고 하신다. 성도와 예수님은 한 몸이란 말씀이다. 임시적이고 일시적인 것이 아니다. 지속적으로 하나됨을 강조한 단호하고도 명쾌한 명령이다. ‘예수 안에 거하는 것’, 성도가 열매를 맺는 유일한 방법이다.
만남에 두 종류가 있다. 그저 차 한 잔 나누는 미팅 정도의 만남이 있다. 이런 만남은 여러 번 반복해도 서로의 삶에 큰 자국을 남길 수는 없다. 반면에 횟수와 상관없이 서로에게 잊을 수 없는 감동과 흔적을 남기는 만남이 있다. 이런 만남을 신학적으로 ‘엔카운터’(encounter)라 한다. 변화를 가져오는 만남, 인생의 방향을 바꾸고, 삶의 내용을 바꾸는 만남이다.
기억하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김춘수 님의 ‘꽃’이라는 시다. 서로의 이름을 불러준다. 서로에게 진심으로 다가선다. 그래서 서로의 마음에 꽃이 되고 의미가 된다.
불러도 대답 없는 이름이 되면 안 된다. 소월의 ‘초혼’에 보면 “산산이 부서지는 이름이여!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다는 안타까움을 노래했다. 성경에도 이런 안타까움이 나온다.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도다”(마11:16), 피리를 불어도 반응이 없다.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급기야 예수님이 탄식하신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게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마23:37).
우리는 주님과 떼려야 뗄 수 없는 필연적 관계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오라. 가까이 와서 내 안으로 들어오라. 나도 너희 안에 들어가겠다” 이게 열매 맺는 비결이다.
당장 열매가 없다고 초조해하지 말라. 열매 맺은 제자 중 대표적인 사람이 바울이다. 그런데 바울도 주님이 원하시는 수준의 열매를 맺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 회심한 후 아라비아로 들어가 3년동안 기도와 말씀 묵상 훈련을 했다. 그리고 다시 고향 다소에서 십수 년간 주님과의 영적 사귐을 갖는다. 이른바 ‘바울의 침묵기(沈默期)’였다. 구약 말씀에 정통한 사람,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 크게 은혜받고 변화된 사람, 바울도 큰 나무일수록 뿌리가 착근하는데 시간이 걸리듯 ‘이식기’(移植期)가 필요했다는 말이다. 그의 영혼의 뿌리가 예수님께 착근되기까지 말씀 연구와 깊은 기도의 훈련이 있어야 했던 것이다. 이렇게 예수 안에 거하는 것을 훈련하고 체험한 바울, 그의 신학의 뿌리는 “그리스도 안에(in Christ)”였다. 바울이 많은 열매를 거두게 된 것은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을 살고,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삶으로 실천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5절)고 하셨다. 능력의 근원이 예수님이시라는 말씀이다.
옛 소련공산당 이야기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다. 공산당 인민위원이 집단농장을 시찰하는데 일이 잘 돌아가는지, 불평은 없는지를 물어보았다. 농부는 “작황은 점점 개선되고 있고, 불평은 전혀 없다”고 했다. 인민위원은 구체적으로 “감자 수확은 잘 되는가?” 다시 물었다. 농부는 “감자를 수확해 쌓으면 하나님의 발끝까지 이를 것”이라고 했다. 인민위원이 흐뭇해하면서 “그런데 여기 소련에 하나님은 없다”고 말하자 농부는 “그렇다면 감자도 없다”고 하였단다. 하나님 없이는 감자도 없다. 하나님께 붙어있어야 감자도 있는 것이다.
본문에 ‘내 안에 거하면’이라는 표현이 11번이나 반복된다. 계속 붙어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많은 사람들이 외로움, 상실감, 우울증에 시달리는데 이는 영혼이 그만큼 메말랐다는 증거인 동시에 부름의 손짓이다. 영원한 것을 바라봐야 한다. 그냥 포도나무가 아니다. 예수님은 ‘참 포도나무’(1절)를 언급하셨다. 가짜가 있다는 것, 재물이나 명예나 이념이나 사람이나 미련함이나 집착은 허상이다. 바닷물은 더 목마르게 할 뿐이다. 가짜 붙잡으면 안 되고, 오직 예수 안에 있어야 한다.
가지가 깨끗해야 한다
농부는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 그 가지를 깨끗하게 한다(2절). 여기 ‘깨끗하게 하시느니라’는 헬라어로 ‘카다이레이’(καθαίρει), ‘깨끗하게 하다’ ‘가지 치다’ ‘손질하다’는 의미, 물리적 의미뿐만 아니라 도덕적, 종교적으로 깨끗하게 하라는 거다.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를 잘라내는 것은 ‘아이레이’(αιρει), 깨끗하게 하는 것은 ‘카다이레이’(καθαίρει),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취하시는 조치다. 포도원지기가 실한 가지들을 손질하듯 주님은 제자의 영혼을 정결케 하여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본문은 열매를 맺되 많이 맺는 것을 강조한다. 2절부터 5절까지를 보면 본문의 구조가 점진적이다. “열매가 없다(no fruit)→ 열매를 맺는다(fruit)→ 많은 열매를 맺는다(more fruit)→ 더 많은 열매를 맺는다(much fruit)” 멋지다. 승법번식이다. 30배, 60배, 100배다. 신명기에는 천 배, 만 배라 했다. 그래서 깨끗한 가지여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정화시키신다(2절). 하나님의 관심이 ‘열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열매가 없다는 것, 단순한 결과에 대한 평가가 아니다.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 가치관으로 성공과 성장, 부의 증대만 열매인 것은 아니다. 하나님 뜻 실현과 말씀 선포, 선한 행실이라는 열매와 자녀 양육이나 사람에 대한 사랑이라는 열매가 중요하다. 또 우리는 무엇보다 성령의 열매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5:22-23), 이 성령의 열매와 전도의 열매가 바로 주님의 주관심대상일 것이다.
그런데 열매가 없다면 그건 황폐와 곤핍, 그래서 하신 일이 열매 맺지 아니하는 가지를 ‘제거하는 것’이었다(6절). 첫 번째 제거 대상은 열매 없는 가지, 잘린 가지는 곧 시들고 마를 것이다. 그렇다면 결코 하나님의 제거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가 구소련의 서기장으로 ‘페레스트로이카’(перестро́йка)라는 개혁 개방정책을 펼쳤을 때 사회는 극도로 혼란했다. 경제와 정치의 과도기, 사람들은 식품점 앞에 장사진을 치고 서로 밀고 새치기하며 빵을 구하려고 난리였다. 하루가 지나도 줄이 줄어들지 않았다. 한 모스크바 시민이 울화가 치밀어 “이 모든 것이 고르바초프 탓, 고르바초프를 죽이러 간다”며 줄을 이탈해 어디론가 가버렸다. 하루가 지난 뒤에 그가 풀죽은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자 줄 서 있던 다른 주민이 “고르바초프는 죽였나?”라고 묻자 그는 “그 줄이 이 줄보다 2배나 더 길어”라고 했단다.
사람을 살리지 못하는 이념은 소용없다. 주린 배를 부르게 하지 못하는 정책은 허사이고, 성취되지 못할 이론은 모두가 허구에 불과하다. 많은 정책, 많은 학문, 잎만 무성하면 무슨 의미가 있나?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는 무성한 이론에 불과할 뿐이다.
그런데 2절 말씀에 “붙어있기는 하되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를 언급했다. 그 가지는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구속사의 주역으로 부름받은 하나님의 포도나무였지만 불행하게도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를 거부했다. 그래서 열매 맺지 못하는 무익한 가지가 되고 말았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거부한 그들을 조금도 긍휼히 여기지 않으셨다(롬11:21).
하나님의 두 번째 제거 대상인 그 가지는 표면적 그리스도인, 곧 행함이 없는 성도들이다. 스스로 예수 안에 있다고 여기고 믿음 있음을 자랑하면서 행함이 없다. 야고보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약2:26)이라 했다. 행함이 있는 믿음, 그래야 하나님의 약속에 참예한다. 예수님은 “그가 깨끗이 하신다”고 하셨다. 두려운 말씀인 동시에 고마운 말씀이다. 포도나무에서 떨어져나가거나 짤리면 버려지고 밟히는 불쌍한 운명이 되고 불쏘시개가 되기에 깨끗하게 하는 것은 많은 열매를 맺도록 힘쓰시는 하나님의 열심 때문이다. 실한 가지들로 하여금 더 많은 열매를 맺도록 환경을 조성해 주시는 것, 그게 바로 가지치기다. 방법은 말씀, 3절에 보면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라고 하셨다. 척박한 중동 땅에서 말씀은 그들에게 위로였고, 보호막이었고, 존귀함을 주고, 위대한 민족되게 하는 힘이었다. 말씀이 깨끗케 하고, 말씀이 거룩하게 한다. 바울은 이것을 ‘칭의’(Justification)라고 표현했다.
따라서 2절은 구원받은 이후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하여 깨끗하게 하는 과정, 이것을 바울은 ‘성화’(Sanctification)라고 표현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으로 영혼을 부단히 깨끗하게 해야 한다. 말씀으로 죄와 허물에 대해 통렬하게 책망받아야 한다. 그래야 거룩해지는 것, 우리 영혼이 깨끗해져야 영적 성장이 가능하다. 깨끗한 가지가 되어 많은 열매를 맺기 바란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라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8절), 이 말씀을 헬라어 원문대로 번역하면,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고 나의 제자인 것이 입증되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신다”가 된다. 열매를 많이 맺는 것이 진정한 제자의 삶의 출발점이다. 예수님의 제자됨을 입증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은 열매밖에 없다. 하나님께 영광이 삶의 목표인가? 이게 제자들의 목표였다면 우리의 목표도 되어야 한다.
마태복음 21장에 보면, 예수님은 무화과나무에게서 열매를 찾으셨다. 그리고 나무에 열매 없음을 보고 그 나무를 저주하셨다. 주님의 관심이 열매였다는 뜻이다. 여기서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구약에 의하면 선민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철저히 배반했고 그 결과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다. 열매 없는 가지들, 이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에 실패한 백성들이다.
과수원의 나무들을 보면 아이러니컬하게도 열매가 적은 나무가 잎이 더 무성하고 싱싱하다. 오히려 열매 가득한 나무는 부목을 대거나 장대를 받쳐주어야 한다. 주인에게 일거리를 주고, 주인을 더 힘들게 한다. 하지만 어느 나무가 주인의 마음을 기쁘게 하나? 열매 맺는 나무, 열매로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