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들과 최후의 만찬하시는 나사렛 예수(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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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예수의 종교는 피의 종교, 즉 생명의 종교

김영한 박사

예수는 기독교를 설립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우리의 속죄(贖罪)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시고 그의 피를 흘리심으로써 우리 죄를 대속하셨다. 예수는 제자들과 나눈 최후의 만찬을 통하여 자신의 죽으심의 의미, 즉 대속의 진리를 우리들에게 알려주셨다. 제자들이 예수의 종교를 설립했다. 이 예수의 종교는 그가 흘리신 피의 공로 위에 세워졌다. 피는 희생을 말한다. 이 피 속에서 생명이 있기 때문에 피를 흘린다는 것은 생명을 내어주는 것을 말한다.

기독교는 바로 예수의 흘리신 피, 생명의 증여 위에서 세워진 것이다. 그러나 이 피를 단순히 물질적인 차원에서만 이해해서는 안된다. 마치 피가 죄를 속하는 마술(魔術, magic)의 힘이나 발휘하듯이 생각해서는 안된다. 피가 속죄해주는 것이 아니다. 피는 생명을 나타내는 상징이다. 그러나 염소의 피가 아닌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피가 값진 것이기 때문에 생명을 속(贖)하는 것이다. 독일 엘랑엔의 루터교 복음주의 신학자 퀘네트(Walter Künneth)는 예수의 피란 생명의 증여라는 영적 과정이라고 해석한다: “피(das Blut)란 마술적-물리적 과정이 아니라 최후에 이르기까지 무제한적인 생명의 증여를 의미한다. 피란 전적 증여의 인격적이고 정신적 행위과정의 실재적 징표이며, 탁월한 정신적 과정이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수행된 화해의 객관적 표현이다.” 예수의 생명이 증여되어 희생제물이 되심으로써 하나님이 우리 죄를 사(赦)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의 죽음은 하나님 아들이 자신의 고귀한 생명을 지불함으로써 새로운 생명, 자신의 새 생명을 우리들에게 증여해주신 대속 사건이다. 사도 베드로는 그의 편지에서 어린 양 되신 예수의 피에 의한 구속을 다음같이 해석한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 1:18-19). 어린 양 되신 예수의 피로 우리는 속죄(贖罪)함을 받았다. 그리하여 속죄로 말미암아 중생(重生, regeneration)으로 하나님 아들의 영원한 생명이 우리 신자의 마음 속에 주어졌다. 이 생명을 받음으로써 우리의 영은 죽었던 상태에서 다시 살아나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의 속 사람은 영원히 사는 생명을 소유하게 된다.

4. 피의 대속 능력은 피 자체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언약에 있다.

구약 근동 사회에서 언약은 피로 맺어 졌다. 계약을 맺을 때 자기 목숨을 담보하고 계약을 맺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 대한 언약: “아브람아 두려워하지말라. 나는 너희 방패이고,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 15:1)의 표로서 아브라함에게 삼 년 된 암소와 십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 비둘기를 제물로 하나님에게 드리라고 명하셨다. 아브라함은 짐승을 쪼개 놓고 하나님께 제물로 드렸다. 고대 근동 세계에는 계약을 맺을 때 짐승을 쪼개놓고 그 사이를 지나가며 계약을 지키지 않을 경우 자기들도 이 짐승 처럼 죽음을 당할 것을 피차 명세하였다, 그래서 고대의 계약서에서는“ 이 송아지가 쪼개진 것 같이 ...도 쪼개어 질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을 때 피를 뿌렸다. 하나님는 아브라함에게 아들과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의 확실성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신 것이다. 하나님은 친히 그의 목숨을 담보로 내어 놓으시고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지키시겠다고 선언하시고 임재하셨던 것이다. 밤이 되자 하나님은 횃불로 임하셔서 쪼개진 짐승 사이를 지나가셨다: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창 15:17-18a). 구약에서 하나님의 제단에 뿌려지는 짐승의 피는 다가오는 하나님 아들의 피를 예시하는 것이다. 속죄의 피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언약은 죄인의 인간에게 속죄의 효능을 갖는다.

생체물리적으로 피에는 생명이 있다. 피가 없으면 인간의 몸은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그러나 피의 대속 능력은 피 자체의 능력에 있지 않고 피가 성례전적 능력을 하도록 하는 하나님의 약속 말씀에 있다. 그러므로 성례전(聖禮典)에서 자료로 주어진 떡과 포도주 자체는 그냥 물질에 불과하다. 이것을 성례전적 존재로 만드는 것은 예수께서 선언하신 제정(制定, institution)의 말씀이다.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 시에 떡을 떼시면서 “이것은 나의 몸이다,” 포도주 잔을 주시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언약의 피”라는 제정의 말씀을 하였다. 말하자면, 물질적 자료에 구속론적 의미를 부여하셨다. 이 제정의 말씀에 의하여 떡과 포도주라는 물질은 단지 물리적 자료임을 너머서서 예수의 대속을 상징하는 성례전적 존재(sacramental being)가 된다.

오늘날 나사렛 예수는 우리들에게 과거에 속하나, 그분을 기념하는 성례전적 행위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성례전에 참여하는 모든 신자들 마음 속에 영적으로 현재화 하신다. 이것은 성례전적 신비(sacramental mystery)이다. 그리스도가 내 속에 계시고,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비로운 사건이 믿음으로 성례전에 참여하는 자의 마음 속에 일어난다. 이것은 성령의 현재화 능력으로 일어난다. 성령은 나사렛 예수의 구속사적 행위와 이를 증거하는 신약 증언의 말씀, 케리그마를 매개한다. 이 성령의 매개 행위 속에서 나사렛 예수의 제정의 말씀은 성만찬에 믿음으로 참여하는 모든 신자들 마음 속에 현재화한다. (계속)

김영한(기독교학술원장, 샬롬나비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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