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76) 평안을 주노라

오피니언·칼럼
설교
요14:27-31
이희우 목사

운전하다 보면 사람들이 참 화가 많다는 생각이 든다. 경적을 울리고 전조등을 번쩍거리는 정도는 약과, 유리창 내리고 소리를 지르는가 하면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지금 어떤 형편인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삿대질을 하고 욕을 한다. 얼굴이 좀 마귀 얼굴에 가깝다. 마음에 평안이 없는 거다. 길가는 사람들 얼굴을 봐도 얼굴을 찡그리고 다니는 사람이 많다. 어떤 사람은 얼굴이 삭았다. 마음에 기쁨이 없고 평안이 없다.

그래서일까? 우리나라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는 ‘심판’이다. 그 이유는 국민들 마음이 편치 않다는 뜻이다. 늘 크고 작은 일에 시달려 마음이 평안치 않기에 “별일 없지?” “안녕하시지?”가 주고받는 인사다. 자살률도 OECD 국가 중 1위, 하루에 38명이나 자살한다. 또 근래에는 마약하는 사람들도 부쩍 늘어났다. 추정하기로는 50만 명 정도 이상, 어느덧 급속한 확산 위험국이 되었다. 약물을 의지해 평안을 찾겠다는 건데 마약과 관련해서 TV 화면에 비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평안은커녕 고통스러운 표정들, 맛이 간 모습들이다. 추한 모습, 이게 평안을 잃은 현대인의 극단적인 모습이다.

근심으로 가득한 제자들, 그래서 “근심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시작한 예수님의 고별설교는 마지막도 근심과 관련된 말씀이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16:33), 시작과 끝만이 아니다. 설교의 중간쯤 되는 본문 27절에서도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셨다. 그만큼 근심이 컸다는 뜻이다.

물론 원인은 예수님의 떠난다는 말씀 때문이었다. 그리고 예수님이 죽으실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예수님은 늘 “아버지께로 돌아간다”고 하셨지 죽는다고 하신 적은 없다. 그런데도 죽음이 근심의 주된 원인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준다고 약속하시고, 이어서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27절)며 축복하셨다. 평안, 예수님의 축복 선언의 가장 위대한 요소 중의 하나이다.

‘샬롬’(שָׁלוֹם)은 주로 인사말이나 헤어질 때 사용하는 표현이었다.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마다 반복하셨던 인사도, 배반한 것 때문에 다락방에 숨어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다가가 다정하게 건네셨던 인사도 ‘샬롬’이었다. 소망이 담긴 인사, 히브리인들에게는 축복을 의미하며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의미했다. 그러니 지금 제자들과 마지막 대화에서 샬롬을 사용하신 것은 적절하다는 생각이다.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샬롬”하며 다가가신 것처럼 불안한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다가오셔서 들려주시는 “샬롬”이기를 기대한다.

주님의 평안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27절), 주님은 ‘나의 평안’이라 하셨다. 평안은 히브리어로 ‘샬롬’(שָׁלוֹם’), 헬라어로는 ‘에이레네’(Εἰρήνη), 전쟁이나 갈등이 없는 것을 ‘평화’라 부르고, 육신이 건강한 것은 ‘평강’이라 부르며, 마음이 안정된 것은 ‘평안’이라 부른다. ‘평화’ ‘평강’ ‘평안’ 이 모든 것이 다 샬롬과 에이레네의 양상들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의 평안’을 주겠다고 하셨고,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고 하셨다. 어떤 평안인가?

먼저 주님의 평안은 ‘의로움으로 인한 평안’이다. 그렇다. 죄짓고 지는 십자가였다면 마음이 평안하셨겠나? 죄가 없으신 분, 남들이 조롱하고 비웃어도 죄 때문에 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 것이기에 떳떳하셨다. 두려울 게 없는 평안이었다.

에덴동산에서의 아담과 하와는 낙원의 평안으로 충만했지만 범죄하면서 곧바로 그 평안은 깨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가장 먼저 찾아온 것은 수치심과 두려움, 그래서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 치마로 삼고,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두려움 때문이다. 우리도 알지 않나? 죄가 들어오면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평안이 깨어진다. 그래서 평안을 누릴 수 없다.

실수로 사람을 죽인 어떤 사람은 감옥살이가 두려워 도망을 다니는데 무려 십 년 이상을 잡히지 않고 도망 다녔다. 그런데 그만 공소시효 이틀을 앞두고 체포당하고 말았다. 사람들은 “재수가 없구먼. 이틀만 지났으면 별일 없었을 텐데” 한마디씩 했지만 정작 당사자는 쇠고랑을 차고 가면서 “이제야 살 것 같다”고 생각한다. 죄짓고 도망 다닌 그 세월이 편치 않았다는 것. 그래서 체포되는 그 순간에 오히려 편안해진 거다. 그렇다. 평안을 누리려면 죄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기억하라. 죄가 있는 한 평안은 없다.

둘째, 주님의 평안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누리는 평안’이다. 여기서 생각해야 하는 게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과의 관계는 물론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아야 평안을 누린다. 주님은 불과 몇 시간 후면 십자가를 지실 분, 죽음이요 굴욕이며 모순이자 부조리한 십자가, 그런데 그 십자가를 바라보시며 예수님은 “나는 평안하다”고 하신다. 하나님과의 관계 때문이다.

그리고 세상 세력이 나를 잡으러 오지만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하신다(30절). 십자가를 지기는 하겠지만 세상 권력에 의해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언뜻 보면 사악한 종교지도자들의 음모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것 같지만 그게 아니라는 것, 그건 오히려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버지의 명한 대로 행하는 것이라고 하신다(31절). ‘그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기 위해!’ 그렇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였다. 만민을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루는 것, 그래서 죽어도 좋다는 거다. 그 뜻을 이루기 위해 “나를 제물로 바쳐도 나는 기쁘다”, 이게 주님의 평안이다.

마지막으로 이 평안은 ‘믿음으로 누리는 평안’이다. 제자들에게 하신 설교의 마지막 말씀은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16:32),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이게 믿음이다. 이제 곧 제자들은 다 주님을 버리고 도망가고, 누구도 함께할 수 없는 고독한 길을 가겠지만 혼자가 아니라 끝까지 아버지께서 함께하시므로 믿음으로 평안을 누릴 것이라는 말씀, 이게 바로 주님의 평안이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

사람들은 평안을 환경에서 오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주님은 ‘내가 주는 평안’이라 하셨다. 사람들 생각대로 환경에서 오는 평안이라면 내일 아침 십자가를 지셔야 할 예수님은 평안하실 수 없다. 그런데도 ‘내가 주는 평안’, 평안이 있다는 말씀이다. 사면초과 상황에서 일반 사람들처럼 외롭고 두렵고 힘든, 평안과는 거리가 먼 환경이지만 ‘나의 평안’을 준다고 하신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그 평안을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라 했다. 찬송가 중 “왜 내게 굳센 믿음과 또 복음 주셔서 내 맘이 항상 편한지 난 알 수 없도다” 이런 게 바로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다. 이유도 없이 이상하게 마음이 평안하다. 하루는 좋았다가 하루는 나쁘고, 하루는 즐거웠다가 하루는 우울한 그런 게 아니다. 사람들은 ‘일주일을 즐겁게 보내려면 새 차를 사고, 한 달을 즐겁게 보내려면 새 집을 사고, 일 년을 즐겁게 보내려면 결혼을 하라’고 한다. 유효기간이 짧다. 요즘 유행하는 요가를 통한 마인드 콘트롤이나 최면요법의 심리적 안정도 순간적일 뿐이지만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영원한 평안이다. 감사한 것은 주님은 때마다 일마다 그 평강을 주신다는 거다(살후3:16).

과거에는 허름한 주택가 대문 모퉁이에 명태 대가리와 콩나물 그리고 조금의 반찬을 신문지 위에 놓아둔 것을 볼 수 있었다. 귀신을 위해 차린 귀신 밥상, 이것 잡수시고 우리 집에는 재앙이 지나가게 해달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정말 귀신을 대접하려 했다면 상을 좀 잘 차렸어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어두육미(魚頭肉尾)라지만 명태 대가리? 먹을 것 없다. 그런데 그걸 차려두고 재앙을 피하고 평안을 누리고 싶어한다.

어떤 부자는 돈은 많은데 늘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해서 어떻게 평안을 누릴 수 있을까 궁리한 끝에 거실에 마음을 평안하게 해주는 그림을 걸기로 했다. 그래서 유명한 두 화가에게 거액을 주고 평안을 주는 그림을 그리게 했다.

두 화가가 ‘평안’이라는 주제로 그림을 그린는데 한 화가는 산골짜기에 잔잔하게 자리잡고 있는 맑은 호수를 그렸다. 호수를 둘러싸고 있는 산들은 한없이 조용하고, 호수 위에는 푸른 하늘에 뭉개구름이 떠 있다. 참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풍경이다. 다른 화가는 완전 대조되는 그림을 그렸다. 먹구름으로 온 하늘이 다 캄캄한 바닷가, 장대비가 쏟아지고 성난 파도가 무서운 기세로 바위에 부딪혀 흰 거품을 품고 부서진다. 끔찍한, 평화와는 거리가 먼 풍경, 그런데 그 바위틈에서 잠든 비둘기 두 마리를 그린 것이다.

어느 그림이 더 마음에 드나? 취향 따라 다르겠지만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골짜기에 자리 잡은 잔잔한 호수 같은 평안이 아니다. 바람이 없기 때문에 조용하고, 비가 쏟아지지 않기 때문에 고요할 뿐, 그 평안은 진짜 평안이 아니다. 바람 불면 물결 일고, 비 쏟아지면 고요함은 깨질 것, 성경은 이런 것을 평안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주님 주시는 평안은 비바람이 불고 거센 파도가 일어도 바위틈에서 잠들어 있는 비둘기가 누리는 평안이다. 어떤 환경도 이기는 평안,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런 평안을 주기 원하신다.

누리며 살아야 할 평안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관념이나 선언이 아니라 실제이고 방법이고 능력이다. 문제는 사람들이 이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거다. 심리학자 케이체프 노이드는 사람들이 여섯 가지 감옥에 갇혀있다고 했다. 첫째 감옥은 자기만 이쁘다고 생각하는 자기도취의 감옥, 구제불능이다. 둘째는 다른 사람의 나쁜 점만 자꾸 생각하게 되는 비판의 감옥, 이것도 못 말린다. 셋째는 항상 세상을 암담하게만 보는 절망의 감옥, 못 고치는 병이다. 그런가 하면 과거만 황금시대로 여기는 과거 지향의 감옥, 항상 어제가 좋았다는 거다. 다섯 번째는 남의 것만 무조건 좋게 보는 선망의 감옥, 만족이 없다. 그리고 여섯 번째는 남이 잘되는 것을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하는 질투의 감옥, 무서운 감옥이다. 이렇게 갇혀있는 한 절대 평안을 누릴 수 없다.

2010년에 인터넷과 방송매체를 통해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한 초등학생의 글이 있었다. 14년 전이지만 여전히 생각의 여지를 남긴 글이다. “엄마가 있어 좋다. 나를 예뻐해 주셔서. 냉장고가 있어 좋다. 나에게 먹을 것을 주어서. 강아지가 있어 좋다. 나랑 놀아주어서. 그런데 아빠는 왜 있는지 모르겠다.” 이 소년의 마음과 생각 속에는 엄마처럼 ‘현실적 도움’과 냉장고처럼 ‘물질적 풍요’와 강아지처럼 ‘감정적 만족’을 주지 못하는 존재가 아빠다. 하지만, 아빠의 보지 못해 미처 깨닫지 못한 수고와 헌신, 그게 가정의 평화를 가능케 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아빠가 있어서 참 좋다. 아빠로 인해 내가 있는 거니까” 그러지 않을까?

혹시 “하나님은 왜 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지내는 어린 아이 같은 성도는 없을까? 죄 문제로 고민이 많았던 마르틴 루터는 한때 차라리 하나님이 안 계셨으면 좋겠다는 어린아이 같은 자세를 보였다. 성숙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 어디서 무얼 하든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리며 살아야 한다.

아이들은 잠을 자다가도 엄마가 곁에 있나 손으로 더듬는다. 그리고 엄마가 곁에 있으면 계속 평안히 잠을 자지만 엄마가 곁에 없으면 운다. 평안이 깨어지는 거다. 묻는다.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확인하며 사나? 그래야 주님의 평안으로 충만한 삶을 살지 않을까?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중에 “내 평생에 가는 길”이라는 찬송이 있다. 시카고의 사업가이자 변호사요 대학교수였던 H.G.스패포드가 지은 찬송인데 이 찬송시를 쓰게 된 사연이 감동이다. 어느 날 시카고에 대화재가 나서 많은 재산을 잃고, 충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족여행을 하기로 한 스패포드는 부인과 네 자녀를 먼저 유럽으로 보내고 자신은 화재 뒤처리를 한 후 나중에 출발하기로 했다. 그런데 부인과 네 자녀를 태운 배가 대서양에서 영국의 철선과 정면충돌하는 사고가 났다. 부인만 기적적으로 구조되고 네 자녀가 생명을 잃었다. 유럽에 도착한 부인으로부터 전문을 받았을 때 스패포드는 눈앞이 캄캄했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슬픔에 잠겨 있을 부인을 빨리 만나기 위해 배를 타고 영국으로 출발한다. 항해 중 선장이 곧 사고지점을 지나갈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아이들이 수장된 곳, 그는 선실로 돌아와 아픈 가슴을 안고 눈물로 기도했다. 새벽녁쯤 되었을 때 마음에 신비로운 평화가 임한다. 주님의 평안이다. 곧바로 펜을 찾아 마음에 임한 그 평안을 시로 옮겨 적은 것이 찬송이 되었다. “1.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2. 저 마귀는 우리를 삼키려고/ 입 벌리고 달려와도/ 주 예수는 우리의 대장되니/ 끝내 싸워서 이기리라...”

네 자녀를 잃은 사고지점을 지나가고 있지만 주님의 평안으로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래서 큰 풍파가 일어 무섭고 어려울 때도 주의 손안에 있는 내 영혼은 평안이라고 간증한다. 이것이 주님의 평안이다. 1873년이었으니 151년이 지났음에도 은혜가 된다. “4. 저 공중의 구름이 일어나며/ 큰 나팔이 울릴 때에/ 주 오셔서 세상을 심판해도/ 나의 영혼은 겁 없으리” 우리의 고백 되면 좋겠다.

인천신기중앙교회 담임 이희우 목사

#이희우 #기독일보 #기독일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