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러시아군을 지원하기 위해 북한이 군인 1만2천 명을 파병한 사실을 부인하던 러시아 푸틴 대통령이 파병의 구체적인 증거가 속속 드러나자 “우리가 무엇을 하든 우리가 알아서 할 일”이라고 했다. 북한이 러시아에 군 병력을 보냈고, 이들이 우크라이나 전쟁에 투입된 걸 사실상 시인한 것이다.
북한군의 러시아 파병은 우크라이나 정부가 처음 문제를 제기할 때만 해도 확인되지 않은 의혹 수준에 불과했었다. 그러나 지난 18일 국가정보원이 이를 공식 확인한 뒤 동영상과 위성사진 등 입증할만한 증거들이 계속 쏟아져 나오자 줄곧 신중한 태도를 보였던 미국과 NATO까지 북한군의 파병 증거를 확인했다는 공식 입장을 밝힌 상태다.
북한군의 러시아-우크라이나전 참전은 한반도 안보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스럽다. 북한이 파병 대가로 러시아로부터 ICBM 탄두 재진입 기술, 핵추진 잠수함 기술 등 첨단 무기기술을 전수받을 경우 우리 안보에 직접적인 위해가 된다.
또 러시아는 파병군인 수로 계산해 큰돈을 북한에 지불하게 될 것이다. 이 돈은 전쟁에 ‘총알받이’로 끌려온 군인의 목숨값이지만, 북한은 이 돈을 받아 전술 핵무기와 미사일을 만드는데 사용할 게 틀림없다.
이 시점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게 우리 정부의 대응이다. 북-러 간의 전쟁 밀약에 따른 공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 그건 곧바로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안보 불안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27일 “북한의 러시아 파병은 한반도와 유럽을 넘어 전 세계의 안보를 위협하는 도발”이라면서 “러·북 군사 협력의 진전 여하에 따라 단계별로 국제사회와 함께 필요한 조치를 취해 나갈 것”이라고 경고했다. 윤 대통령이 언급한 ‘필요한 조치’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직접 밝히진 않았으나 전문가들은 대공방어 무기와 살상 무기 지원 등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그런데 우크라이나에 살상용 무기를 직접 지원하는 건 신중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인도적인 차원에서 방어용 무기 지원에 협력할 순 있어도 공격용 살상 무기부터 내주는 건 자충수가 될 수 있다.
가장 우려되는 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자칫 남북 간의 대리전 양상으로 흘러갈 수 있다는 점이다. 세계 평화 수호 차원에서 우크라이나를 돕는 게 마땅하지만, 한반도에 위기 상황이 닥칠 때 반대로 러시아가 적이 되는 상황도 고려해야 한다. 남의 나라 침략전쟁에 병사들을 보낸 북한은 위험한 도박판에 끼어드는 선택을 했다. 우리까지 그런 선택을 하는 건 국민의 뜻과 국익 차원에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북한군 러시아 파병 소식에 민주당 등 야당은 엉뚱하게 모든 화살을 정부에 돌리고 있다. 정부가 “전쟁을 조장”하고 있다며 규탄대회까지 열었다. 그런데 남의 나라 침략전쟁에 나이 어린 군인들을 ‘총알받이’로 내보내고, 연일 오물 풍선을 보내 한반도의 긴장을 조성하는 건 북한이 아닌가. 피아(彼我)를 구분하지 않는 무분별한 정치적 공세는 국론 분열을 야기할 뿐 국익에 백해무익하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2022년 2월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시작됐다. 3년째 접어든 지리한 전쟁으로 17만 명의 군인이 전사하고 부상자도 75만 명이 넘게 나왔다. 지금도 매일 200명에 가까운 젊은이들이 전쟁터에서 서로를 죽이고 죽는 참혹한 현장이다. 그런데 이들 중 과연 왜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죽이고 죽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런 전쟁터에 아무 영문도 모른 채 끌려온 북한 병사들이야말로 도륙의 희생물로 버려진 것이다.
세계 각처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분쟁의 속을 들여다보면 그럴만한 이유와 명분이 있다. 하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그냥 말 그대로 ‘약육강식’의 침략전쟁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만약 이 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한다면, 그다음 차례가 한반도가 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
러시아는 중국과 함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다. 그런 위치에서 남의 나라 영토를 빼앗기 위해 전쟁을 일으킨 건 무력 행위를 금지한 유엔 헌장 2조4항 위반 행위다. 국제형사재판소(ICC)가 푸틴 대통령을 전쟁범죄자로 체포해 처벌해야 마땅하다. 북한 김정은 또한 전쟁 범죄 공범이다.
안타까운 건 영문도 모른 채 전쟁터에 끌려온 북한의 병사들과 자식이 전쟁터에 간지도 모르고 있는 가족들이다. 전투 경험이 전무한 북한 군인들이 치열한 격전지에서 끝까지 살아남아 고향으로 돌아갈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교도소 죄수들까지 전쟁터에 끌고 가는 러시아는 북한군이 죽든 살든 신경을 쓸 겨를이 없다.
그런 점에서 우리 정부는 우크라이나 정부를 인도적 차원에서 지원하되 파병 북한군이 자유를 찾아 귀순하도록 유도하는 데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살상 무기를 지원하는 것보다 몇 배나 더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정부는 북한군의 러시아 전선 배치에 대해 미국·일본·나토 등 우방들과 긴밀하게 협력하면서 자유와 평화 수호에 글로벌 중추 국가로서 역할과 소임을 다해야 한다. 여야 또한 북한의 침략전쟁 파병이 한반도 안보와 직결되는 문제인 만큼 정파적 이익을 떠나 한목소리를 내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