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우리 구원에 기여한 것은 딱 하나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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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욱 교수(아신대 설교학)
신성욱 교수

인간의 ‘자유의지’에 관한 오해들이 있는 것 같다. 하나님의 ‘예정하심’을 믿긴 하지만, 인간이 ‘자유의지로’ 반응을 해야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생각 말이다. 이는 자칫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훼손하고 인간 편에서의 의지적 선택과 결단에 상당한 무게중심을 두는 누를 범할 위험성이 다분하므로 삼가 주의해야 한다. 성경은 수없이 많은 구절들에서 인간 스스로 하나님을 선택할 지각이나 능력이 없음을 말씀하고 있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가 말했다는 유명한 문장이 있다. “You contribute nothing to your salvation except the sin that made it necessary.” 번역하면 “당신은 구원에 필요한 죄 외에는 아무것도 기여한 게 없다”란 뜻이다. 원래 이 말은 필립 멜랑크톤(Phillip Melanchton)이 처음 사용한 문장이라고 한다. 아주 중요한 말이다. ‘우리가 우리 구원에 기여한 것은 우리의 죄뿐’이라고 한다.

죄를 짓지 않았으면 구원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이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우리의 죄 때문에 예수님이 희생되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 구원에 우리가 개입한 것은 죄지은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것이지 우리 스스로의 자유의지로 예수님을 선택했기 때문은 아니란 뜻이다. 말이 ‘자유’이지 ‘나 스스로의 지각과 힘에 의한 자유’가 전혀 아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작동된 자유’란 사실을 놓쳐선 안 된다.

눅 10:25-37절에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나온다.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것인가’를 묻는다. 예수님은 율법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고 되물으셨다. 율법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같이 사랑하라고 되어 있다’고 대답했다. 예수님은 그 대답이 옳다고 하시며 ‘그대로 행하면 영생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이 대화를 관찰해보면 예수님이 ‘행위 구원’을 인정하신 듯 보인다. 물론 아니다. 율법사의 대답에 긍정적으로 답하시면서 한 가지 비유를 활용하셨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말이다. 예수님은 그 비유를 통해서 ‘율법으로는 영생에 이를 만한 사랑을 할 수 없음’을 보여주신다. ‘제사장, 바리새인, 서기관, 랍비, 율법사처럼 율법에 대한 지식을 가장 많이 지니고 있는 ‘당시 종교지도자들로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을 할 수 없음’을 깨우치신다.

그렇다. 율법의 전문가인 종교지도자들조차 강도 만난 동족 하나 사랑하지 못한 채 ‘걸음아 날 살려라!’며 줄행랑친 모습을 볼 수 있다. 이게 바로 율법과 율법적 지식을 가진 인간의 한계다. 하지만 한 사람은 달랐다. 그는 바로 ‘사마리아 사람’이다. 유대인들이 그렇게도 혐오하고 지옥 백성으로 제일 먼저 손꼽는 미움의 대상 말이다. 그는 유대인 종교지도자들도 자기 목숨이 아까워서 회피했던 유대인 강도 만난 자를 도와준 사람이다.

동족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도 회피해버린 강도 만난 유대인을, 다름 아닌 평소 그렇게도 그들로부터 미움을 받아온 사마리아 사람이 목숨 걸고 도와주었다. 그 사마리아 사람이 누구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은 사역을 하시면서 유대주의자들과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시기와 질투를 많이 받아온 분이시다. 그들은 항상 예수님으로부터 꼬투리를 잡아서 관가에 고발할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본문에 등장하는 율법사 역시 예수님을 올무에 빠뜨려 넘어뜨리고자 질문을 시작한 것이다. 실제로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이 목숨을 담보해서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준 것처럼,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 자기 목숨을 아낌없이 바치신 분이시다. 그런 ‘어처구니없는 사랑의 실천자’가 아니면 우리에게 영생의 길은 있을 수 없다. 우리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지 않고선 구원받을 방법이 우리에게 없단 말이다.

그렇다. 율법으로나 높은 종교적 신분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것이 ‘구원과 영생의 문제’다. 구원과 영생은 오직 우리를 위해서 소중한 생명을 희생시켜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이 성취될 수 있음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칼빈주의는 구원을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인간의 자유의지와 선택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는 반면, 알미니안주의는 구원을 ‘전적인 자신의 자유의지와 선택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본다. 이 땅에 이 알미니안주의의 후예들이 여전히 꽤 존재함을 본다.

불신자들은 자기 스스로의 자유의지로 죄를 범하여 지옥에 떨어지는 게 맞다. 하지만 구원받은 우리에게 작동된 것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의한 자유의지이기에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라 ‘그분의 절대적인 은혜에 의한 자유의지’이다. 하나님을 선택하지 않고 지옥행을 선택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시켜버린 ‘통제된 자유의지’ 말이다.

때문에 지옥 가는 이들은 자기 스스로의 능동적인 의지에 의해 지옥 가는 것이고, 구원받아 영생을 얻게 되는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의해 천국 가는 것이다. 고맙게도 이것을 명확히 구분해서 알려주는 구절이 하나 있다. 고후 2:15이다.

“우리는 구원을 받게 되는 자들(who are being saved, 수동태 분사)에게나 (자의로) 망하는 자들(who are perishing, 능동태 분사)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수동태와 능동태의 차이’가 보이는가? 구원받는 이들에게는 ‘수동태 분사’가 사용되었고, 지옥 가는 이들에게는 ‘능동태 분사’가 사용되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구원받는 이들과 자신들이 자발적인 의지로 지옥에 떨어지는 이들을 구분하고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우리의 자유의지가 하나님의 은혜의 통제를 받아 하나님과 영생 편을 선택하게 해주심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이 감사를 새롭게 되새김질함으로 더없이 행복한 우리 모두의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다.

#신성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