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종근 목사의 ‘하위렴 선교사 조선 선교행전’(15)

오피니언·칼럼
기고

제7장 남도에서 부르는 전도자의 송가(頌歌)(1909-1912)

유진 벨과 목포 선교지부

백종근 목사

하위렴이 처음 내한하고 얼마 되지 않아 유진 벨과 함께한 전라도 탐사 여행에서 남도에 지부를 세우기로 계획한 곳은 원래 목포가 아닌 나주였다. 나주는 오랫동안 전라도의 행정 중심도시였던 데다 무엇보다 영산강의 수로를 이용해 서해로 나가는 선박의 통행이 가능하다는 점 때문이었다.

서둘러 유진 벨 선교사는 1897년 한옥이 딸린 토지를 매입하고 지부 설치를 추진했으나, 이 소식이 삽시간에 퍼져나가면서 나주의 유생들이 격렬하게 들고일어나기 시작했다. 유림이 사는 고을에 서양 종교가 들어오는 것을 반대한다는 거였다. 반대가 너무도 극심한 데다 타협의 여지마저 전혀 보이지 않자, 유진 벨은 매입한 거처를 다시 매각해야만 했다.

마침 이 무렵 목포항이 개항(1897)되자, 선교부에서는 반발이 심한 나주 대신 목포에 지부 설치를 결정하고, 1898년 유진 벨 선교사가 부인 로티Lottie W. Bell와 함께 이곳에 남도 선교의 깃발을 꽂았다.

그해 6월 유진 벨 선교사가 양동 한쪽 언덕에 천막을 치고, 20여 명을 모아 시작한 양동교회에 대해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史記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목포부 양동교회가 성립하다. 선시(先是)에 선교사 배유지와 매서인 변창연이 당지(當地)에 도착하여 양동에 장막을 치고 선교를 시작해 열심히 전도함으로…(중략)… 20여 인이 믿게 되고 교회가 이뤄졌다."

유진 벨 선교사는 목포 스테이션을 중심으로 나주와 광산, 장성, 광주 지방까지 순회하며 복음을 전했다. 그러던 1901년 4월 벨이 순회 전도를 나가 있는 동안, 부인 로티Lottie W. Bell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쓰러져 34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목포에 지부가 세워지고 3년 만의 일이었다. 선교사인 남편을 따라 조선에 왔으나 조선에 대한 사랑만큼은 유난히 남달랐던 그녀였다.

통신과 교통 사정이 열악했던 시절이라 그녀의 부음을 듣고서도 며칠이 지나서야 집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던 유진 벨은 스테이션 곳곳에 남아있는 로티의 흔적들을 바라보며 가눌 수 없는 슬픔에 북받쳐 눈물을 흘렸다. 무엇보다 엄마가 없이 자라야 할 어린 두 자녀를 데리고 이제 겨우 시작한 선교사역을 지속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앞길이 막막했다. 조선에서의 사역이 순간 위기를 맞는 듯했다.

안타까운 소식이 켄터키에도 전해지자 고향의 누이동생이 아이를 맡아 기르겠다는 기별이 왔다.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는 아이들을 맡아 양육하겠다는 누이가 한없이 고마웠으나 아이들과 떨어져 살아야만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착잡했다.

1901년 5월 3일 두 자녀를 데리고 요코하마에서 미국행 증기선에 몸을 실으면서도 그는 여전히 조선을 향한 기도와 꿈을 놓지 않았다. 고향에 도착한 유진 벨은 누이 집에 아이들을 맡기고 어느 정도 안정을 찾고 적응이 되는 것을 확인한 그는 이듬해인 1902년 10월 30일 다시 목포에 돌아왔다.

양동교회는 1년이 넘도록 목회자가 없었으나 놀랍게도 교인들은 그 허전한 공백에도 자리를 지키며 한 사람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지부의 선교사들 역시 유진 벨의 유고有故 중에도 한마음이 되어 자신들의 사역에 매진하고 있었다.

오웬은 환자를 진료하며 진료소의 토대를 세우고 있었으며 스트래퍼 선교사가 15명의 여학생을 데리고 시작한 여학교 역시 조금씩 기틀이 잡혀가고 있었다. 이 같은 동료 선교사들의 수고에 고무된 유진 벨 역시 1903년 10여 명의 남학생을 모아 교육 사역의 시동을 거는 한편, 같은 해 양동교회를 한옥 기와집으로 증축, '로티 위더스푼 벨 기념 교회당'으로 봉헌하기도 했다.

한편 광주가 전남지방의 중심도시로 성장할 것을 예견한 선교부에서는 1904년 봄에 개최된 연례회의에서 광주에 지부 설치를 결정하면서 곧바로 유진 벨을 개설 책임자로 지명하고, 목포지부의 일부 선교사들을 광주지부에 전임시켰다.

일이 이렇게 되자 목포지부 설립 당시부터 유진 벨과 함께 사역했던 스트래퍼Fredrica E. Straeffer와 프레스톤(John F. Preston/변요한)까지 광주로 옮겨가고, 목포에는 의료선교사인 오웬(C. C. Owen/오기원)과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낙스(Robert Knox/로라복)와 맥컬리(Henry D. McCallie/맹현리) 등 신참 선교사들만 남아있는 상태에서 오웬 선교사마저 순회 중에 과로로 쓰러져 사망하는 사태가 생기고 말았다.

목포지부의 사정이 이렇게 긴박하게 돌아가자 1909년 7월 군산에서 열린 제18차 선교부 연례회의에서 마침 안식년을 마치고 복귀하는 하위렴 선교사에게 목포지부를 맡기기로 했다.

유진 벨의 후임으로 목포에 오다

하위렴이 만삭이던 아내와 함께 제물포를 출발해 목포에 발을 디딘 것은 1909년 9월 말이었다. 유달산이 바라다보이는 선창에는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낙스 선교사와 맥컬리 선교사 부부가 함께 나와 영접해 주었다. 군산지부 소속의 하위렴과 에드먼즈가 목포에 부임한다는 소식에 선교사들은 물론 모든 교인이 그들을 반겨주었다.

안식년을 마치고 조선으로 돌아올 때까지만 해도 하위렴은 자신의 임지인 군산에서 해야 할 사역들을 구상하며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광주지부가 새롭게 개설되고 선교사들의 이동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부임이었지만, 하위렴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생각으로 지부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지역 선교를 되살리고자 했다.

양동교회에서의 협력 목회

1909년 9월 6일 조선예수교장로회 3회 독노회가 평양의 장대현 교회에서 열렸을 때, 그해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윤식명을 포함한 졸업생 8명(2회)이 노회로부터 안수를 받았다. 이날 독노회는 하위렴을 양동교회 담임목사로, 윤식명을 동사목사로 정하여 목포 파송을 결의했다.

호남지방 최초로 조선인 목사를 세우는 일이었기 때문에, 하위렴으로 하여금 일단 교회를 안정시키는 일에 주력하게 했으며, 일 년 동안 윤식명을 동사목사로 두고 절차적 방식에 따라 리더십이 자연스레 이전될 수 있도록 했다. 현존하는 양동교회 교회사에도 5대 당회장에 하위렴 선교사 그리고 6대 당회장을 윤식명 목사로 기록해 둔 것으로 보아 하위렴의 역할을 분명히 엿볼 수 있게 한다.

그동안 유진 벨(1대, 3대)을 비롯해서 레이놀즈(2대), 프레스톤(4대) 등 선교사들이 잇달아 목회하면서 목포선교지부 직할 교회인 양동교회는 해마다 부흥을 거듭해, 하위렴이 당회장을 맡고 있을 당시(1910)만 해도 교인이 700~800명에 이르고 있었다.

백종근 목사는

한국에서 공과대학과 대학원을 마치고 산업연구원(KIET)에 책임연구원으로 근무하다 미국에 유학 후 다시 신학으로 바꿔 오스틴 장로교 신학교(Austin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에서 M.Div 과정을 마치고 미국장로교(PCUSA)에서 목사가 되었다. 오레곤(Portland, Oregon)에서 줄곧 목회 후 은퇴해 지금은 피닉스 아리조나(Phoenix, Arizona)에 거주하고 있다. 지난 펜데믹 기간 남장로교 초기 선교역사에 매몰해 『하나님 나라에서 개벽을 보다』와 『예수와 함께 조선을 걷다』 두 권의 저서를 냈으며 그 가운데 하위렴 선교사의 선교 일대기를 기록한 『예수와 함께 조선을 걷다』는 출간된 지 일 년도 되지 않아 스탠포드 대학과 프린스턴 대학에 이어 시카고 대학 도서관 Koean Collection에 선정되어 소장되기도 했다.

백종근 목사는 하위렴 선교사 기념사업회를 설립해 초기 남장로교 조선 선교역사를 발굴하고 공유하는 일에 전념하고 있으며 미국과 한국에서 설교와 세미나를 인도하고 있다. 최근에도 남장로교 선교사 부위렴(William F. Bull)의 선교행적을 정리해 집필하는 한편 디아스포라 선교역사 연구회를 결성해 미주 한인 교회 역사를 찾아 복원하는 일에 빠져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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