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이 시대를 바로 보려면 호세아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 호세아는 나라의 멸망을 목전에 두고 울부짖던 선지자였다. 그가 바라본 시대는 마치 오늘을 보는 듯하다. 번영 뒤에 숨은 영적 타락, 정치적 혼란 속 흔들리는 신앙, 순수성을 잃어버린 예배, 그리고 하나님보다 세상을 의지하는 백성들의 모습까지 그렇다.
호세아 시대는 여로보암 2세의 치세 아래 정치적 안정과 물질적 풍요를 누렸다. 하지만 그 번영은 오히려 독이 되어 하나님을 향한 신뢰보다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더 의지하게 만들었다. 강대국 앗수르와 애굽 사이에서 정치적 생존을 위해 이방 문화를 받아들였고, 결국 여호와 신앙은 바알 숭배와 뒤섞여 버렸다.
오늘도 우리는 물질적 풍요 속에 영적 빈곤을 겪고 있다. 첨단 기술과 경제 발전이라는 번영 속에서 하나님보다 재물과 세상의 방법을 더 신뢰한다. 세속화라는 거센 물결 앞에서 신앙의 순수성을 잃어가고, 기독교는 세상 문화와 뒤섞여 정체성을 상실해가고 있다.
호세아 시대의 제사장들이 진리를 왜곡하고 백성의 죄를 책망하지 않았듯이, 지금의 강단은 회개와 심판의 메시지 대신 번영과 축복의 달콤한 말씀이 주류를 이룬다. 그들이 단과 벧엘에서 금송아지를 숭배했듯이, 우리는 하나님보다 성공과 번영이라는 현대판 우상 앞에 무릎 꿇고 있다.
그 시대에 호세아는 무엇이라고 외쳤는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비유하며, 음란한 아내(이스라엘)를 향한 남편(하나님)의 변치 않는 사랑과 회복의 메시지를 강조하며 ‘돌아오라’고 선포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호 6:1)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네가 불의함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졌느니라” (호 14:1)
이 ‘돌아오라’는 간절한 메시지는 명령이 아닌, 사랑하는 남편이 방황하는 아내를 향한 애타는 기다림과 용서, 그리고 회복의 약속을 담고 있다. 음란한 아내(이스라엘)를 용서해주고 다시 관계를 회복하고자 원하시는 하나님의 간절한 애태움의 소망이 담겨있다.
오는 10.27 연합예배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기대해야 할 것은 화려한 구호나 정치적 외침이 아니다. 우리의 영혼이 물질과 성공이라는 우상 앞에 절하고, 세상과 미디어라는 음란한 연인을 좇았던 죄악을 회개하는 것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께 돌아간다면, 비록 지금은 그분이 우리를 징계하시고 아프게 하셨을지라도, 반드시 우리를 고치시고 싸매어 주실 것이다.
호세아 선지자는 문제의 본질만이 아니라 치료책도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의 진노는 단순히 우리의 죄 때문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는 우리의 형식적이고 피상적인 신앙, 그분의 율법을 가볍게 여기는 우리의 태도가 근본적인 문제라고 지적한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라” (호 4:6)
우리가 예배도 드리고 성경도 읽고 설교도 듣는다고는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귓가에 잠시 맴돌다가 사라지고 말 때가 많다. 예배당 의자만 닳게 하고, 성경책 페이지만 무심히 넘길 뿐이며, 하나님의 말씀은 잠자리의 수면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정작 우리가 붙든 것은 '자신의 필요'를 채워줄 복의 자판기 같은 신일 뿐이다. 말씀은 복권 긁기의 도구로 전락했고, 영적 체험은 신비주의의 도구가 되었으며, 예배는 한 주의 죄된 양심을 달래주는 마취제가 되어버렸다
이것은 호세아 선지자가 경고한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하는도다’의 현대적 모습이다. 우리의 종교적 행위들은 단순한 무지가 아닌, 알면서도 모른 척, 들으면서도 못 들은 척, 보면서도 못 본척하는 영적 위선이며, 종교적 포장으로 감춘 하나님 거부다.
당신은 정말 하나님을 알고 있는가? 당신은 정말 하나님을 알고 싶은가? 왜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을 떠나고 있는 줄 아는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린 자의 최후가 무엇인지 아는가? 부모의 영적 무지가 버림받는 자녀 세대를 낳고 있다.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만을 강조하다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의롭게 살아야 하는 의의 말씀을 버리고 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제사장으로서의 영적 리더쉽과 영적 권위를 놓치고 있는 것이다. 언제까지 기복주의, 신비주의, 번영주의, 믿음만능주의, 형식주의, 신사도 운동을 쫓아가려는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무엇인가?
우리는 현재 언약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신랑과 신부의 관계처럼 친밀한 관계가 있어야 한다.(열처녀 비유)
우리는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처럼 생명의 관계 안에 있어야 한다.(포도나무와 가지 비유)
우리는 성령님을 모시고 사는 성령의 전으로 거룩하고 성령 충만하게 성령의 전을 관리해야 한다.(고전 3장)
이제 우리는 마지막 선택의 갈림길에 섰다. 종교적 의식에서 벗어나 하나님과의 생명적 관계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치적 구호나 사회적 혁신이 아니다. 시대의 소리를 외치는 운동가도, 교회, 교단, 선행의 종교적 명성을 쌓는 직분자도 아니다.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에스라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열어 백성들의 영적 눈을 뜨게 하고, 메마른 영혼에 생수와 같은 하나님의 지식을 부어줄 참된 영적 지도자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무장하여 우리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고, 마침내 그분의 얼굴을 대면하듯 만나는 참된 예배자가 되어야 할 때다
종교적 의무감이나 형식적인 회개가 아닌, 진정으로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갈망으로 그분께 돌아가야 할 때다. 지금도 그분은 애타는 목소리로 부르신다. “내 백성아, 형식적인 예배와 우상, 종교적 의무에서 벗어나 진정한 사랑과 믿음으로 내게 돌아오라. 너희를 내 품에 안고 모든 상처를 싸매어 주리라. 내 사랑하는 신부야, 이제 돌아오라.”
오는 10.27 연합예배에서 가장 우려되는 것은 우리가 문제의 본질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이 모든 혼란과 위기의 근원은 하나님과의 깨어진 언약관계에 있음을 직시하지 못한 채, 단순히 200만 명이라는 숫자로 세상을 향해 기독교의 영향력을 과시하려 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다윗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고 군사력이라는 세상적인 힘을 의지하여 인구조사를 했던 교만의 죄가 될 수도 있다. 우리도 회개와 돌이킴은 없이 단지 모인 숫자로 세상을 향해 '우리가 이렇게 많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면, 이는 또 다른 불신앙의 모습일 뿐이다.
하나님 나라는 결코 웅장한 구호나, 사람의 수나, 인간의 힘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임하는 것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진정한 회복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 꿇고, 깨어진 언약 관계를 회복하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200만의 외침보다 한 영혼의 회개가 더 큰 능력이 있다.
우리는 선택의 갈림길에서 하나님을 믿는 성도의 모습을 세상 앞에 어떻게 보일까를 주의해야 한다. 숫자로 보여줄 것인가, 회개로 돌아갈 것인가? 숫자의 힘인가, 성령의 능력인가? 집회의 광장에서 부르짖을 것인가, 그곳이 진정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회개의 단이 될 것인가? 보여주기 위한 집결인가, 주님께 돌아가기 위한 회개인가?
필자는 이 일이 10.27 연합예배 가운데 이루어져 진정 한국 교회에 진정으로 성령을 통한 제 2의 종교 개혁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예루살렘아 네 마음의 악을 씻어 버리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네 악한 생각이 네 속에 얼마나 오래 머물겠느냐” (렘 4:14)
#홍광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