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75) 보혜사 성령

오피니언·칼럼
설교
요 14:15-26
이희우 목사

“근심하지 말라”로 시작된 14장, 근심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16장까지 길게 설명한다. 예수님의 떠나신다는 말씀 때문에 근심하는 제자들, 그럴 만하다. 메시아신 줄 믿고 올인했는데 따라갈 수 없는 아버지 집으로 혼자 떠난다고 하시니 당황할 수밖에 없다. 이제 곧 예수님의 훈훈한 친근미를 맛볼 수 없다. 현장에서 직접 목격했던 숱한 기적들, 그 꿈같은 순간들이 아직도 주마등처럼 스치는데, 여기서 끝이라니 기가 막히다. 공동체는 곧 오합지졸이 될 것이 뻔하다. 이걸 아는 당국자들은 일망타진은커녕 제자들을 손도 대지 않는다.

제자들의 당시 심정이 잘 드러난 말씀이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는다”(18절)는 말씀이었다. 마치 고아가 될 것 같은 제자들, 더 이상 의지할 데가 없을 것처럼 막막하다. 그래서 예수께서 “근심하지 말라”고 하셨다.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그래야 할 이유가 있다는 거다. 그 이유는 성령을 보혜사로 보내주신다는 것(16절), 살면서 파트너 하나만 잘 만나도 시너지 효과를 누리며 인생이 달라지는데 단순한 파트너를 넘어서는 영원한 보혜사를 보내주신다는 거다.

‘외롭다’ ‘두렵다’ ‘힘들다’ 이 세 마디를 비명처럼 외치는 사람이 점점 더 늘어나는 이 시대, 우리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의 인도와 보호 속에 살아야 한다.

성령, 또 다른 보혜사

성령 하나님을 예수님이 직접 소개하신다(16절). 핵심 주제는 예수께서 떠나시면 성령이 오셔서 함께 머무신다는 것과 제자들을 대책 없이 내버려두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령님에 대한 정식 소개 같은 말씀이다. 이 전에는 성령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었다. 오순절 강림하실 때마저 누가는 급하고 강한 바람과 불로 임하셨다고 했을 뿐 성령의 존재에 대한 설명은 하지 않았다. 그저 사람들이 그 현상에 놀랐을 뿐이었다.

천지창조 과정에 대한 기록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더라”(창1:2), 성령이 인격이라기보다는 바람 같다. 성령께서도 숙명으로 받아들이셨는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사역만 하신다. “성령 충만 받으라”는 말씀도 마치 주고받는 물건이나 선물 취급 받으시는 것 같다. 또 인간의 몸이나 자연세계 안에서 활동하는 어떤 기운이나 에너지 취급을 받으신다. 하지만 묵묵히 당신의 일을 하시는 성령, 성령은 그저 섬김의 영이시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성령에 대한 예우가 다르다. 인격적인 대우랄까? 등장도 드라마틱하다. 14장 이전까지는 비밀스럽게 노출된 정도셨다. 1장에서는 예수님을 ‘성령으로 침례 베푸시는 분’이라 했고, 3장에서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5절), ‘거듭나게 하는 힘’으로 언급한다. 그리고 7장에서는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38절), ‘믿는 자들이 받는 성령’이라 했고, 6장에서는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63절), 예수님의 말씀이 곧 성령이라 하셨다. 궁금증을 증폭시키는 표현들이다.

그런데 드디어 그 성령을 정식으로 소개하신다. ‘다른 보혜사’이시라는 것, 나와 같은 보혜사이시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다른’이란 단어는 알로스(αλλοs)와 헤테로스(ἐτεροs)가 있는데 알로스는 “똑같은 종류의 다른”이란 뜻이고, 헤테로스는 “다른 종류의 다른”이란 뜻이다. 여기서는 알로스가 쓰였기에 보혜사는 종류와 본질이 같은 분이시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보혜사 성령’이라는 표현은 요한의 독특한 표현이다. ‘보혜사’, 헬라어로 파라 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 파라(παρά)는 ‘곁에서’라는 뜻이고, 클레토스(κλητος)는 ‘말하다’라는 뜻이니 ‘대언자’, ‘변호사’, ‘중재자’, ‘협조자’, ‘대변자’라는 뜻이다. 영어 번역에서는 “돕는 자(Helper), 위로자(Comforter), 상담자(Counsellor)”라 했다. 원래는 법정용어다. 레온 모리스(Leon Lamb Morris)도 위로자의 의미보다는 변호사의 의미라 했다. 하지만 우리말 성경에 나오는 보혜사(保惠師)는 ‘보살피고 은혜 베푸시는 스승’이라는 의미라 가장 적합한 것 같다.

그리고 ‘또 다른 보혜사’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원래 보혜사는 예수님이시다. 그런데 성령도 보혜사라고 소개하신다. 그렇다면 ‘외롭다’ ‘두렵다 ’힘들다‘를 외치는 자들을 위로하고 새 힘을 얻게 하는 최고의 선물이다. 26절에 보면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고 했다. 레온 모리스는 “복음서 중 성령을 가장 잘 그리고 충분히 설명해 준 구절”이라 했는데 성령은 가르치고 생각나게 하시는 분이다. 성령은 성경의 저자이시자 마음에 빛을 비추시는 분, 그래서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

이어서 예수님은 성령을 “진리의 영이라”하셨다(17절). 16장에서도 같은 표현(13절),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다. 또 “모든 것을 가르치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분”(26절)이라 하셨다. 최고의 스승이시라는 거다. 26절의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이라는 소개가 성령을 삼위일체의 한 분으로 인식하게 한 것 같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전하는 말씀인 동시에 임종을 앞둔 사도 요한이 자신의 제자들에게 주는 위로의 말이기도 하다. 요한 역시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 막막했을 것이다. 스승이 사라지면 공동체는 깨질 것이고, 혼자 어떻게 살아야 할까 두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시는데 영원토록 함께 할 최고의 친구라는 말씀은 제자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고 또 생각났을까? 무심코 지나쳤던 말씀도 생각나고, 미처 깨닫지 못했던 말씀도 깨달아졌다. 선명해진 거다. 그래서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직접화법이 많다. 그리고 내용도 깊다. 아마 공관복음서 기록자들보다 오랜 시절 성령과 동행하면서 예수님에 대해 더 많이, 더 깊게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임종을 앞둔 요한은 같은 방식으로 제자들을 위로한다. 자신은 죽지만 성령께서 계시니 “염려하지 말라, 성령께서 스승이 되셔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요한의 기대대로 당시 소수 종교였던 기독교는 폭풍 성장, 주류가 되었다.

요한이 이처럼 길게 성령에 대해 다룬 것을 보면 성령에 크게 감동되었던 것 같다. 우리에게도 성령의 감동이 있어야 한다. 성령께서 예수님의 말씀을 2천 년 전 그때처럼 받아들이게 하시고, 우리를 다이나믹한 삶으로 인도하실 줄 믿어야 한다.

성령,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17절), 성령은 오셔서 함께 거하고, 우리 안에 계실 것이라는 말씀이다. 2개의 전치사가 등장한다. with와 in, 사람은 누구나 늘 함께해주는 존재가 필요한데 성령님이 오셔서 with you, in you 하실 것이라는 말씀, 놀라운 약속이자 축복이다. 16,17절 두 절에 예수님은 성령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이라는 점을 세 번이나 거듭 주지시켜 주신다.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시는 분, 우리와 함께 사시는 분, 우리 안에 머무는 분이시라는 거다.

성령님은 연합의 영이시다. 요한은 성령 소개 중간중간에 반복되는 말씀을 배치했다.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20절). 또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하리라”(23절). ‘연합’이 강조된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연합, 그리고 이 연합 안에 함께하는 제자 공동체, 고별설교에서 계속 강조된 것이 바로 이 하나됨이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됨을 느끼며 살까? 성령은 교회 공동체 가운데 계시고 동시에 개개인의 인격체 안에 계신다.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님이 우리 몸 밖에 계셨다면 이제 성령의 시대에는 예수님이 우리 몸 안에 계신다. 그래서 지금은 은혜의 때다. 밖에 계신 예수님은 언제 어디로 가실지 모르기 때문에 불안하지만 안에 계신 예수님은 떠나지 않고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신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이 떠나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하셨다. 그 말씀이 맞았다. 살아계실 동안 제자들은 오합지졸에 자리다툼이나 하는 철부지들이었지만 예수님이 떠나시자 죄다 기둥 같은 존재, 순교자, 성인이 되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그들 안에 계셨기 때문이다.

이제 예수님은 우리 안에 놀라운 일이 벌어질 것을 말씀하신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20절).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 안에, 우리는 예수님 안에, 그리고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 벤다이어그램이라는 집합 그림으로 그리면 하나님 아버지라는 큰 원 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그 예수님 안에 우리가 들어가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성령 안에서만 가능한 일인데 예수님은 그날에 일어날 일이라 하셨다. 성령께서 보혜사로 내 안에 들어오시는 날, 삼위일체의 신비가 바로 우리 속에서 일어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 몸이 성령이 거하시는 전(殿)”이라 했다(고전6:19).

이 말씀 때문에 초기 기독교 교부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은 걷는 것도 조심했다고 한다. 톨스토이(Lev Nikolaevic Tolstoy)는 “우리 모두의 자아는 그 내부에 깃들어 있는 신성을 가리는 덮개”라며 “우리가 자아에서 벗어나면 벗어날수록 우리 안의 신성은 더욱 더 뚜렷이 나타난다.”고 했다. 맞다. 우리가 완고한 자아에 갇혀서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지만 자아의 껍질을 깨면 깰수록 우리는 신성에 가까워진다. 육체의 소욕을 죽이고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 주목할수록 성령은 우리 안에서 더 뚜렷이 역사하실 것이다.

우리 몸은 그냥 몸이 아니다. 성령이 거하시는 전,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신다. 한 인간이 위대한 것도 다른 사람을 위대하게 봐야 할 이유도 다 여기 있다. 그 안에 하나님이 계신다.

성령, 사랑의 영

15절, 21절, 23-24절에 보면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라고 하신다. 그렇다.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사랑은 추상적 감정이 아니라 현실적이며 구체적인 것, 순종을 포함하는 사랑이다. 이 사랑이 현재 시제로 쓰였다는 게 중요하다. 계속 사랑, 계속 지킬 것을 강조한 것, 계명을 지키면 그를 사랑하는 사람,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그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 하셨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계명을 잘 지켜야 한다. 그리고 계명 잘 지킨다고 자부하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신랄한 비판을 받았던 것도 알아야 한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마23:23), 여기 나오는 긍휼이 사랑이다. 그러니 사랑 없이 계명 지키는 건 안 된다는 말씀이다. 그건 오히려 화를 부르는 외식일 뿐이다.

마가복음 10장에 보면 어떤 사람이 예수께 달려와서 “선한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묻는다. 그때 예수님은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19절). 그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하자 예수님은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21절)고 하셨다. 그때 그는 재물이 많은 고로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떠나갔다. 진실한 사랑은 결코 쉽지 않다는 뜻이다.

그래서 오신다는 분이 바로 성령이시다.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도록 인도하는 사랑의 영이시다. 그래서 성령이 오시면 사랑할 수밖에 없다. 성령이 푸시하시니까 어떤 목사님은 제 아내 치료에 도움이 될 거라며 후코이단을 보내주셨다. 수십만 원짜리다. 미국의 어떤 권사님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분인데 약값에 쓰라고 6천 달러를 보내주셨다. 성령께서 하신 일이다.

요한복음에서 유일하게 우리에게 주신 계명은 딱 하나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13:34). 하나님과 곁에 있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 이게 사랑의 계명이다. 바울도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3:22-23)라고 했다. 9개지만 헬라어로는 열매가 단수, 사랑하면 다 맺힐 열매들이기 때문에 단수로 쓰였다. 사랑이 진리이고, 사랑이 힘이다. 다른 것은 다 허상이거나 부산물, 사랑이 실체다.

오늘 한국교회의 위기는 사랑의 부족에서 온 것이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가 “그대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은 누구인가? 그대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그대에게 가장 값진 시간은 언제인가?” 이 3가지 질문을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았고, “가장 소중한 사람은 지금 그대와 함께 있는 사람,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그대가 하고 있는 일, 곁에 있는 사람에게 선행을 행하는 일, 그리고 가장 값진 시간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이라 했는데 사랑은 미루지 말아야 하며 전도할 만큼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 전도가 최고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3가지 금이 황금, 소금, 지금이라는 강연을 듣고 공감이 되어 집에 가서 부인에게 얘기했더니 부인이 “뭔 소리? 가장 소중한 3가지 금은 현금, 지금, 입금이야” 그랬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정리한다. 성령은 보혜사, 내 안에 계신 하나님, 사랑의 영이시다. 나를 저 깊은 산속의 청량한 숲길을 산책하는 행복 누리게 하시는 분! 그윽한 울림을 지닌 악기처럼 연주를 시작한 나무숲을 걷게 하시는 분! 성령의 은혜로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한다.

#이희우 #기독일보 #기독일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