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티(Susan A. Doty) 양의 소개로 만난 에드먼즈
1907년 선교사 공의회가 서울에서 열렸을 때 하위렴은 북장로교 선교사인 도티Susan A. Doty 양을 회의장에서 우연히 만났다. 몇 해 전 자신의 결혼식을 바로 도티가 머물던 선교사 사택에서 치렀기 때문에 그녀와의 인연은 각별했다. 데이비스와 결혼식 이후 하위렴이 도티를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도티는 친구 데이비스가 전주에서 갑자기 세상을 떴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이미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신혼의 달콤한 추억이 채 가시기도 전에 졸지에 홀아비가 되어 자기 앞에 서 있는 하위렴이 그렇게 측은해 보였다. 마침 그 자리에는 하위렴의 결혼식에 참석했던 알렌 공사도 함께 있어 긴 이야기는 하지 못하고, 그녀는 잠시 하위렴을 위로하고 자리를 떴다.
인연이 되려고 그랬을까? 도티는 하위렴 선교사와 헤어져 돌아서는 순간 눈앞에 에드먼즈를 떠올렸다. 도티가 교장으로 있던 정신여학교는 보구여관普救女館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도티는 앳된 에드먼즈를 자주 만나 자매처럼 지내던 사이였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곧바로 발길을 돌려 하위렴을 다시 쫓아간 그녀는 에드먼즈를 그에게 소개했다.
도티의 소개로 하위렴은 에드먼즈와 전혀 예기치 않은 만남을 갖게 되었지만, 이 만남은 두 사람의 운명을 다시 한번 바꾸는 계기가 된다.
에드먼즈 역시 자신이 보구여관에서 사역하는 동안,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내를 잃었다는 선교사의 이야기를 소문으로 전해 들은 적은 있었지만,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자세히 알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도티가 소개하는 이 남자가 그 사람일 줄이야!
에드먼즈를 만난 자리에서 하위렴이 먼저 자신을 소개하자 에드먼즈도 하위렴의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노라고 하면서 말문을 열었다. 각자의 사역을 서로 이야기하는 동안 하위렴은 자신의 처지를 동정해주는 아담한 몸매를 가진 캐나다의 아가씨에게 마음이 끌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날은 아무런 진전이 없이 숙소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리고는 모임이 폐회되던 마지막 날, 에드먼즈를 다시 만난 하위렴은 용기를 내어 자신의 심중을 어렵게 토로했다. 에드먼즈는 즉답 대신 오랫동안 침묵했다. 그날 하위렴은 그녀로부터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하고 군산에 내려왔으나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기도와 묵상 가운데 지루한 몇 달이 흘러갔다.
어느 날 서울에서 에드먼즈로부터 한 통의 편지가 왔다. 또박또박 써 내려간 에드먼즈의 편지는 하위렴에게 연민과 호감을 표시하고 있었지만, 긍정도 부정도 아니었다. 그리고는 말미에다가 그녀는 한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누구하고든 마찬가지이겠지만 자신이 만일 결혼하게 된다면 캐나다의 부모님의 동의 가운데 하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부모를 떠나 조선에 선교사로 올 때도 부모님이 못내 섭섭해하셨는데 조선에서 만난 홀아비 선교사에 대해 부모님의 허락과 축복이 없다면 자기는 결혼을 생각할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녀는 안식년을 맞아 캐나다로 돌아갔다.
2차 안식년(1908-1909)과 에드먼즈와 재혼
공교롭게도 그녀가 떠나고 얼마 있지 않아 하위렴 역시 안식년을 맞게 되었다. 1908년 4월 10일 고베에서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증기선 코리아 마루에 승선했다. 하위렴은 고베에서 배에 오르기 직전 에드먼즈에게 전보를 쳐 자신의 캐나다 방문을 미리 알리는 일도 잊지 않았다. 캐나다로 향하는 여정 내내 에드먼즈 부모님의 반응을 은근히 염려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했다.
에드먼즈의 부모님들은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이었다. 자신의 딸을 찾아 머나먼 조선에서 쫓아온 청년 선교사 하위렴을 진심으로 반겼다. 그리고 그해 9월 2일 에드먼즈 가족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식을 올렸다. 에드먼즈의 가족은 대가족이었다. 11명이나 되는 형제 외에 아버지의 형제가 10명, 어머니의 형제도 8명이나 되어, 결혼식에 모인 에드먼즈의 형제와 사촌들은 다 헤아려 순서를 분간할 수가 없을 정도로 많았다.
온타리오 남부지역은 미국 독립전쟁 당시 미국에서 추방된 왕당파들과 그리고 전쟁이 끝나고 나서 미국에서 건너온 이민자들이 정착하고 있었다. 일부 왕당파들은 미합중국과 연대하는 것에 적의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 후 들어온 초기 이민자들은 소수만이 영국을 지원했을 뿐, 일반적으로 정치에는 무관심했으며 대부분 중립을 지켰다. 에드먼즈의 증조부도 이런 부류였다. 미국에서 태어났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캐나다로 건너온 이민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가족적 신앙 배경은 그 당시 왕당파들이 많이 관련되어 있던 감리교에 적을 두고 있었다.
여름인가 싶더니 캐나다의 가을은 유난히 빨리 찾아왔다. 단풍나무와 자작나무 그리고 참나무의 교목喬木들의 군락이 끝없이 펼쳐진 온타리오의 평원과 구릉을 울긋불긋한 단풍으로 휘덮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결혼식을 위해 찾은 캐나다에서 에드먼즈의 가족들과 캐나다 추수감사절(10월 둘째 주)까지 거의 한 달간을 머무르다가 두 사람은 미국으로 내려와 성탄과 연말연시를 보내며 꿈같은 시간을 함께 지냈다.
그 이듬해 두 사람은 켄터키주를 비롯해 버지니아, 노스캐롤라이나, 테네시 그리고 조지아에 이르기까지 여러 주의 교회를 돌며 조선의 선교상황을 보고하고, 후원교회들을 결성하는 일로 오히려 선교지에서보다 바쁘게 보냈다. 1909년 9월이 되어서야 그들은 다시 조선에 돌아왔다.
백종근 목사는
한국에서 공과대학과 대학원을 마치고 산업연구원(KIET)에 책임연구원으로 근무하다 미국에 유학 후 다시 신학으로 바꿔 오스틴 장로교 신학교(Austin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에서 M.Div 과정을 마치고 미국장로교(PCUSA)에서 목사가 되었다. 오레곤(Portland, Oregon)에서 줄곧 목회 후 은퇴해 지금은 피닉스 아리조나(Phoenix, Arizona)에 거주하고 있다. 지난 펜데믹 기간 남장로교 초기 선교역사에 매몰해 『하나님 나라에서 개벽을 보다』와 『예수와 함께 조선을 걷다』 두 권의 저서를 냈으며 그 가운데 하위렴 선교사의 선교 일대기를 기록한 『예수와 함께 조선을 걷다』는 출간된 지 일 년도 되지 않아 스탠포드 대학과 프린스턴 대학에 이어 시카고 대학 도서관 Koean Collection에 선정되어 소장되기도 했다.
백종근 목사는 하위렴 선교사 기념사업회를 설립해 초기 남장로교 조선 선교역사를 발굴하고 공유하는 일에 전념하고 있으며 미국과 한국에서 설교와 세미나를 인도하고 있다. 최근에도 남장로교 선교사 부위렴(William F. Bull)의 선교행적을 정리해 집필하는 한편 디아스포라 선교역사 연구회를 결성해 미주 한인 교회 역사를 찾아 복원하는 일에 빠져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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